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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남자, 어디 없나요?

- 우리는 왜 '관계 맺기'에 지속적으로 실패하는가

by Minseung Kang

소개팅을 주선하는 일이 갈수록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특히 소위 ‘괜찮은’ 남자를 찾는 일이 그러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려면 결국 외모, 직업, 연봉, 거주지 같은 조건을 나열하게 된다. 이 항목들은 이미 관용구처럼 굳어져 소개팅 전 필수 확인 리스트가 되었고, 주선자 또한 이런 조건들을 선별할 책임을 진다. 상대의 내면이나 성격보다 조건의 조합이 우선된다. 실제로는 성실하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기대치를 벗어난 조건 앞에서는 매치업이 성사되기 어렵다. 나중에는 마치 ‘덜 된 사람’을 홍보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어 나는 주선 자체를 망설이게 된다.


물론 신상명세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이자, 삶의 궤적을 유추하게 해주는 사회적 증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고정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만남은 점차 인사(人事)가 아니라 무슨 대기업 입사 면접처럼 심사(審査)의 절차로 변하고, 개인의 총체성은 수치와 스펙으로 환원된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은 애초에 관계 형성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 없다”고 말하는 건, 실제 사람의 부재라기보다,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감정이 아닌 기능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질서가 있다. 우리의 일상은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이름 아래 치밀하게 조직된다. 직장은 물론, 여가와 휴식, 인간관계까지도 일정한 목적 아래 관리되고 계량된다.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얼마나 안정적인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이런 질문들은 이제 연애와 우정을 포함한 거의 모든 관계 판단의 기준이 된다. 감정은 관계의 출발점이 아니라, 관계를 맺기 위한 자산처럼 취급된다. 사랑은 헌신이 아니라 성과이고, 호감은 선발의 이유가 아니라 유지의 조건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소개팅처럼 명시적으로 기능적인 만남을 피하며, 스스로 ‘자만추’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자만추’는 지금 두 가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혼용되고 있다. 하나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우연한 인연 속에서 관계가 자연스럽게 싹트길 바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자보고 만남 추구’라는 직설적 표현이 암시하듯, 관계를 성적 합치로 축소하는 환원적 관점이다. 전자는 관계 맺기에 대한 수동성과 회피를 은근히 정당화하고, 후자는 감정과 서사를 최소화한 채 기능적 호환성만을 따진다. 둘 다 관계의 서사를 감당할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결국 유사한 회피 구조에 닿는다.


이처럼 감정이 구조로부터 분리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친밀감을 갈망한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 나를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줄 유일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감정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관계에 실패할 때조차 구조보다는 감정을 문제 삼는다. ‘내가 사람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반복되고, 결국 감정만 교체되며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매번 같은 실패 속에서 사람들은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 믿지만, 그 믿음조차 구조의 일부다.


문제는 관계의 종료가 언제나 일방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결핍은 이해받고 싶어하면서도, 타인의 결핍은 감당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건 내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관계는 이해의 공간이 아니라, 계약의 장으로 기능한다. 감정은 관리되어야 하고, 균형은 거래되어야 하며, 기대의 교환이 깨지는 순간 관계는 파기된다. 누가 먼저 마음을 거두는가, 누가 더 많이 애썼는가가 관계의 권력 구조를 결정짓는다. 결국 더 사랑한 사람이 약자가 된다.


이런 방식의 관계에서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사랑은 서로의 부정성을 감내하고도 함께 있겠다는 ‘결정’이어야 하지만, 지금 우리는 사랑을 ‘계산’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실패를 반복한다. 이 피로의 축적은 우리로 하여금 고립과 불통을 자초하게 만드는 한편 오히려 이해와 위로 받음에서 오는 쾌락에 더욱 갈증나게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다가설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우리는 SNS를 전전하고,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이 외로움 앞에서 쩔쩔 맨다.


그래서 우리가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것은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의지가 부족하다’거나, 연락이 뜸해진 친구에게 ‘노력이 없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사회. 국가는 저출생 문제를 우려하면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비난하고, 공동체는 정서적 소통의 부재를 개인의 무책임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능력은 있어도, 그 사랑을 감당할 조건은 가지고 있지 않다.


관계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우리는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관계를 피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감정은 복잡해지고, 이해관계는 무겁게 얽힌다. 관계는 결코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경제력, 시간, 체력, 심지어 건강까지도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어야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정서적 친밀함을 만들어가는 데에는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자원을 빼앗긴 채로 살아간다. 타인의 삶을 책임질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타인에게 선뜻 기대지 않는다. 기대지 않으려다 보니 기대지 못하고, 결국 모두가 기대지 않는 상태로 버틴다. 그러다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그 균열은 회복이 아니라 소멸로 귀결된다.

감정은 조건을 초월하지 못한다. 구조가 허락하지 않는 감정은 언제든 파기되며, 파기된 감정은 무효가 된다. 결국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감정의 기술이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삶의 조건들이다. 관계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나눠진 책임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가능한 관계란 무엇일까. 감정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감정을 보류하고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거리의 윤리, 무해한 동행의 방식이 아닐까.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관계맺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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