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화란> 리뷰 : 스스로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소년의 얼굴
영화〈화란〉은 보호받아야 할 청소년이 어떻게 고립되고, 결국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폭력과 침묵으로 가득 찬 공동체의 구조를 통해 말없이 증명해 보이는 작품이다. 연규(홍사빈)는 반복되는 가정폭력, 무책임한 어머니, 무관심한 교사, 범죄조직조차 하나의 대안으로 기능하는 지역사회라는 다층적 결핍 속에 놓여 있다. 이 결핍의 총합은 ‘어른의 부재’다. 어른이란 보호하고 이끌며 기준을 제시하는 존재이자, 삶의 방향성을 환기하는 타자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어른이라는 존재는 연규의 삶에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폭력적이거나 무기력하며, 때로는 기회와 착취를 동시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연규를 갉아먹는다.
연규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의붓아버지 정덕(유성주)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다. 반복된 학대와 가난 속에서도 그는 네덜란드(화란)로 떠나 엄마와 함께 평범하게 살기를 꿈꾼다. 그가 말하는 평범함이란 사실상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는 삶’의 은유다. 화란은 단순한 이국적 공간이 아니라 자본이나 폭력의 논리에 짓눌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상징하는 이상향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상향에 닿기 위해 연규는 오히려 지옥의 심연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치건(송중기)은 연규가 그 지옥을 건너는 데 있어 거의 유일한 어른의 형태를 띤다. 그는 연규의 상황에 연민을 느끼며 자신이 과거에 겪은 아버지와의 상처를 투사한다. 그러나 치건은 실제로 어른이기를 거부한 인물이며 그 역시 어른으로부터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범죄조직 안에서 살아남는 법만을 배웠다. 그는 연규에게 조직 내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가르치지만 그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치건은 연규가 자신의 보살핌 아래 성장해봐야 이미 삶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현재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아니 다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가 제시하는 모델은 일종의 ‘재생산된 실패’이며, 그는 연규에게 다른 가능성—범죄 밖의 삶, 또는 비폭력적 생존 방식—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그가 조직의 보스인 중범(김종수)에게 수단으로만 취급당하는 장면, 즉 현재의 유사 아버지로부터도 진정한 인정과 돌봄을 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로도 드러난다. 그는 연규에게 어른의 형상을 하고 다가가지만 실제로는 어른의 책임이나 비전을 부여하지 못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연규는 치건 외의 인물들과도 관계를 맺지만, 이들 관계는 대부분 상호적이지 않고 구조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의붓여동생 하얀(김형서)은 폭력적인 가족 안에서 서로를 지키려 애쓰는 동지적 존재지만, 그녀 또한 보호가 아닌 생존을 위해 감정을 억제하고 방어하는 아이일 뿐이다. 중국집 사장(정만식)은 연규에게 일자리를 주지만 연규가 다쳐서 일을 못 하게 됐을 때 보호 대신 즉각적인 퇴장을 요구한다. 이는 연규가 사회 속에서 보호받는 청소년이 아닌, 단순히 기능하는 노동력으로만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학교는 어떠한 보호 장치도 작동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연규가 폭력에 휘말렸다는 이유로 가해자 취급을 받게 만든다. 연규의 일상은 사적 공간에서도, 공적 체계에서도 누구도 그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 이중의 고립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연규는 계속해서 ‘정상성’을 욕망한다. 그는 치건에게 배운 조직의 방식에 익숙해지며 자신도 나름대로의 효율성을 갖춘 조직원이 되어간다. 하지만 연규는 그 과정이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지옥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한다. 치건이 말하는 ‘자신만의 방식’이란 결국 폭력과 복종, 그리고 반복된 배신과 고립을 전제하는 방식이었고, 연규는 그 지옥의 또 다른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 말미에서 연규는 치건과의 유대조차 거부하고, 결국 치건이 제시한 삶의 방식에서 탈주함으로써 다른 방식의 어른이 되기를 선언한다. 이는 보호받지 못한 자가 오히려 보호자의 허상을 걷어내고, 스스로 삶의 기준을 새로 설정하는 고통스러운 ‘성인의식’에 가깝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점층된 시간으로 말미암은 관계의 회복과 감정의 윤리가 비혈연적 유대를 어떻게 새롭게 구성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화란〉은 그와 반대로 유대의 기반 자체가 부재한 사회에서 개인이 어떻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치건은 자신을 거둬준 보스에게 평생을 바쳤지만, 결국은 한낱 소모품일 뿐임을 깨닫는다. 그는 연규에게 ‘이 길 외엔 다른 길이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생존방식을 전수하지만, 연규는 그 말조차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말이 아닌, 스스로 체득한 감각이다. 이 감각은 타자의 조언이나 보호를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반복된 배신과 침묵, 방치 속에서 스스로 쌓아 올린 생존의 감각이다.
〈화란〉이 전달하는 어른의 부재는 단순한 가정 내 폭력이나 교사-학생 관계의 무관심 같은 사적 영역의 문제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사회, 경제구조, 법제도, 돌봄의 시스템 전반이 작동을 멈춘 결과이며,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다. 조손 가정, 청소년 가장, 보호종료 아동, 탈학교 청소년 등이 겪는 제도 밖 삶의 조건은 이 영화가 그리는 지옥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보호의 언어’를 말하면서도 실제론 자립과 생존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전가하는 정책 환경 속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연규처럼 지옥에서 지옥으로 이동하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묻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호받지 못한 이가 타인을 보호하려 할 때, 그가 어른일 수 있는가. 혹은 보호의 방식조차 알지 못한 채,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 감정만으로도 어른이 될 수 있는가. 치건은 어른이기를 포기했고, 연규는 어른이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과연 누가 어른의 자격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연규는 자신이 배운 유일한 어른의 형식을 거부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른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 선언 자체가 이 영화의 유일한 희망이자 서늘한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