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와 미디어가 구조화하는 혐오 그리고 연대의 부재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왜란 때였는지, 왜정 때였는지. 다만 나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조선의 남자는 주로 목을 베어 죽였지만 여자는 굳이 음부에 날카로운 무엇인가를 찔러넣는 방식으로 죽였다고 한다. 나는 그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한다. 털끝 하나가 쭈뼛 곤두설 만큼의 전율만으로도 역겨움은 충분하다. 그런데 2025년 5월 27일, 제21대 대선 후보 3차 TV 토론회에서 개혁신당의 이준석 후보는 그 잔혹한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언어를 끄집어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아들이 “여성의 성기 이런 곳에 ***을 꽂고 싶다”는 발언을 SNS에 남겼다면서 생방송 중 불특정 다수의 국민 앞에서 그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는 이 발언이 “(여성)혐오가 아닌 사실 전달”이라고 주장했고, 이후에는 “진보 진영은 (자신에게) 혐오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서도 정작 본인 진영 내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한다”고 반박했다. 즉, 그는 혐오를 드러냄으로써 혐오에 저항했다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타인의 혐오 표현을 비판하기 위해 똑같은 문장을 공중파에 되뇌는 행위는 폭로가 아닌 재생산에 가깝다. 게다가 발화의 지점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다. 그는 공격자였다. 그 ‘문장’을 직접 읊은 순간부터.
정치인은 언제나 진영 논리를 경유해 혐오를 정당화하려 한다. ‘저들이 더 나쁘다’는 상대적 도덕의 우위는 혐오를 드러내는 이들에게 면죄부처럼 작동한다. 정치적 혐오는 그래서 교묘하다. 공격의 형식을 하되, 논쟁의 외피를 덧씌운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더불어민주당이 그간 내부 성폭력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조치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자녀가 했던 성적 폭력을 공론장에서 반복해 재현할 정당성을 확보해주지는 않는다. 그 발언을 '내가 한 것이 아니므로 상관없다'고 말하는 건 정치적 연극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문제는 그 연극의 무대가 ‘공적 감수성’을 근본부터 마모시키는 장치로 기능할 때다.
이준석 후보는 이른바 ‘이대남’이라는 정치적 존재를 최초로 대중정치의 무대에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가 보여준 정치 언어의 전술은 언제나 '피해자 중심 서사'였다. 다만 그 피해자가 대부분 '강자에 의해 억눌리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에 의해 밀려난 또 다른 강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피해 서사는 언제나 의심받아 마땅했다. 이준석이 그날 말한 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감정을 호출하고, 어떤 전선을 구성하고, 어떤 적대의 구도를 고착시키는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소수자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대신 진보 진영의 ‘위선’을 고발하며, 그 위선의 피해자 역할을 스스로 떠맡는다. 이런 구조는 혐오를 정당화하는 가장 현대적인 방식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다만 참을 수 없어서 말했다’는 유형의 발화는, 정치적 공감자들에게는 ‘용기’로 해석된다. 그 순간, 피해의식은 정치를 삼키고, 증오의 정당성은 확보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인 이준석의 이른바 ‘혐오 전략’은 효율이 몹시 떨어진다. 여성, 장애인, 비이성애자 등 사회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격한다면, 그는 대체 어디서 표를 얻겠다는 심산일까? 정치적으로 자신이 직접 표를 구할 수 없는 집단이라서, 혹은 그들의 권리 요구가 불편해서 이들을 배제하겠다는 의도라고 쳐도,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다수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 각자는, 자신이 인식하든 못 하든, 하나씩은 반드시 중첩된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 여성인 동시에 비정규직이고, 퀴어이면서 청년이고, 장애인이자 지역 출신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 배제를 전면에 내건 정치는, 전략이라기보단 스스로에게 겨누는 자해에 가깝다.
그래서 정치에 임하는 후보들은 웬만하면 어떤 이해집단도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두루뭉술한 표현을 택한다. 예컨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도 마찬가지다. 그는 윤석열이라는 내란의 수괴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도, 정작 공식 석상에서는 그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 똑같은 자리에 있지만 굳이 긍정하지는 않는 태도. 정치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이준석은 혐오를 소신처럼 밀고 나간다. 진보진영이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좋고, 공정이나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굳이 그 방식이어야 했을까. 그렇게 자기 정치의 바닥을 혐오로 발라가며 무엇을 얻고자 했는가. 혐오를 정치적 정체성으로 삼은 자의 고립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립을 스스로 선택한 이가 느끼는 외로움을, 노무현의 그것과 나란히 둘 수 있을까? 그는 2025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16주기를 맞아 봉하마을을 찾아 참배했고, “소신 있는 정치를 하겠다”, “노무현의 외로움에 공감한다”는 발언을 남겼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수자 권리 보장에 있어 비교적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던 드문 정치인이다. 그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강조해온 ‘설득의 정치’는 대중의 반감을 감수하고서라도 공공의 당위 앞에 정치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입장의 밀도, 순도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에 대한 입장으로 가늠할 수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간단히 말해 성별, 장애, 성적 지향, 종교, 출신 지역 등 어떠한 사유로도 개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다. 이 법안은 2007년 참여정부 시절에 처음 발의돼 이후 지속적으로 논의돼왔고 입법의 정당성이나 사회적 합의의 수준 역시 일정한 기준 이상으로 축적돼 있다. 그런데 이 법은 여전히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종교계와 재계의 저항 때문이다.
2025년,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 법안 제정을 공약으로 제시한 후보는 드물었다. 이재명 후보조차 ‘나중에’라는 단서를 달았고, 사회적 합의가 더 필요하다는 언급으로 물러섰다. 이는 정치적 소신이라기보다는 표의 이탈을 계산한 결과로 보인다. 반면, 노무현은 이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는 당위에 무게를 두었고,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하겠다’며 대중 앞에서 책임을 감수하는 방식의 정치를 선택했다. 그는 ‘설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를 만큼 순진하거나 현실 감각이 없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다만, 불가능하더라도 설득을 시도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준석 후보가 소수자 문제에 대해 그동안 일관되게 보여준 태도는 노무현이 취했던 정치적 태도와는 정반대다. 특히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해 ‘문명사회‘를 운운하며 집단을 비문명적으로 규정한 발언은, 정치가 권력을 향유하는 다수의 감정에 기대어 소수자의 권리를 통제하려는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정치인의 외로움은 그 정치가 지향하는 대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노무현의 외로움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어려운 ‘당위의 정치’를 고집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수를 설득하려는 시도였고, 정치가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소수를 버리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과정이었다. 반면, 이준석이 말하는 외로움은 어떤 성격인가. 설득의 부재, 희생의 부재, 타협 없는 단언. 소수자에 대한 정치적 민감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다수의 불편을 강조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정치 행위에 과연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적용할 수 있는가.
그의 외로움은 정치적 고립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고립을 통해 만들어낸 정체성의 일부다. 다시 말해, 그 외로움은 고립 자체를 대중에게 설득의 무기로 활용하려는 전략이지, 설득을 위한 고립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노무현의 정치와 어떤 접점을 가진다는 것인가. 입으로 노무현을 말하는 것과, 실제 노무현의 정치적 태도를 계승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요컨대, 이준석의 정치에 ‘설득’은 없다. 갈등의 중간지대도 없다. 그는 늘 적과 아군을 나눈다. 그리고 그 전선 너머에는 소수자들이 놓여 있다. 그런 정치가 노무현의 이름을 호출한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의 ‘기표 남용’이 어디까지 치달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이다.
관련하여, 나는 2022년 4월 1일 방송된 KBS 〈시사직격〉‘차별금지법, 15년 표류기’ 편을 연출하며, 인권 선진국을 자임하는 대한민국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여전히 요원하다는 사실을 고발한 바 있다. 실제로 방송 직후, 나는 연출자로서 각종 항의와 민원, 소송에 휘말렸다. 일부 종교단체가 '차별금지법, 15년 표류기' 편이 편향됐다면서 시청자항의청원을 올렸고 동의자가 1,000명을 넘어서면서 나는 관련 답변을 준비해야 했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차금법 제정을 공영방송의 시사프로그램이 하루 빨리 제정되길 촉구하는 것은 공정과 공익에 어긋난다, 소수를 위한 그 법은 다수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것이 주요 요지.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국민 여론은 찬성이 우세하다.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이 2022년 6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제정 찬성 여론은 57%에 달했다.
소송도 들어왔다. 원고는 프로그램의 주요 인터뷰이 중 하나였던 한 시민단체였는데, 그들이 제기한 핵심 쟁점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혐오세력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을 다룬 방송 내용과 그 방식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한국방송 KBS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를 거쳐 민사소송을 걸어왔다.
KBS <시사직격>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특정 사유로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있지 못하는 개인에 대해서는 굳이 법을 제정하면서까지 보호해줄 필요는 없다는 원고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실었다. 여기서 '특정 사유'는 주로 '동성애'다. 그러니까, 이 법이 통과되면 이 사회에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성병이 우리 사회에 만연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활개치며 다니게 할 수는 없다는 것. <시사직격>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그들의 주장을 검증했을 뿐이다. 평등에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니라는 신념 하나로.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조정은 불성립으로 종결됐다. 그리고 서울 남부지방법원은 원고가 제시한 근거나 피고가 원고에 대한 사실을 적시했다는 것만으로는 피고의 방송으로써 원고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런 저항은 특정 세력이나 이익 집단이 전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문화, 언어, 미디어 전반에 걸쳐 구조적으로 내재돼 있다. 대표적인 예가 〈나 혼자 산다〉(MBC)의 한 장면이다. 방송인 전현무와 구성환이 한 시골의 수돗가에서 상의를 벗은 채 장난을 치며 물을 뿌리자, 제작진은 이 장면에 슬로모션을 삽입하고, 패널들은 “더럽다”, “토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해당 장면은 이성애 중심적 시선에서 비이성애 남성 간의 신체 접촉을 조롱과 불쾌함으로 편집한 사례다. 이는 ‘장난’이나 ‘예능’이라는 포장 속에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유통시키는 일상적 구조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혐오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이 연대가 굳건할 수 있는 핵심적인 축은 ‘소수자성’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비정상성이나 어떤 결핍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령자, 여성, 청년, 장애인, 지역 거주자, 저소득층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자로 규정되는 걸 꺼린다. 주류가 아니라는 정체성은 불편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연대를 가로막는다. "나는 너를 이해하지만, 네 옆에 서고 싶진 않아."라는 거리두기는 결국 ‘소수자 간의 비연대’라는 구조를 낳고 확대재생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인을 규탄하는 데는 열정적이다. 하지만 그 악인이 우리 자신일 가능성, 혹은 우리가 구조의 일부일 수 있다는 의심은 쉽게 꺼내지 않는다. <시사직격>은 그 불편한 질문을 던지려 했고, 그 결과는 종종 외면이었고 저항이었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혐오는 오늘도 구조 속에 살아남는다. 문제는 그 구조가 언제나 비가시적이고,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세상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