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 반응하지 않는 사회와 ‘기생수’의 조건
사회는 재난에 반응한다. 그러나 그 반응은 지속되지 않는다.
대규모 감염병이나 환경 재난이 발생하면 사회는 일시적으로 과민해진다. 정보 소비는 폭증하고, 정부는 통제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언론은 위기의 강도를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킨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불안은 피로로 전환되고, 공포는 무관심으로 귀결된다. 반복되는 재난은 사회로 하여금 감정적 반응을 억제하고, 위험을 통제 가능한 범주로 재정의하게 만든다. 결국 재난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제거된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오염에 대한 우려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물 소비는 원산지 확인이라는 의례적 행위를 통해 일상으로 복귀했다. 공포는 잔재하지만, 실질적 행위는 시장 논리에 복속된다. 광우병 파동 역시 유사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위험 인식으로 광범위한 저항을 형성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산 쇠고기의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증가했다. 위기는 기억되지 않고, 효율은 복원되며, 구조는 이전보다 더 정교해진 방식으로 지속된다.
코로나19는 이러한 구조의 반복을 가장 명확히 드러낸 사례다. 감염 확산 초기, 정부는 ‘분수령’, ‘고비’, ‘안정세’ 등의 수사로 통제 가능성을 강조했다. 확진자 수는 실재 위험이라기보다는 통치 가능성을 시각화하는 지표로 활용되었고, 바이러스는 점차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프레임화되었다. 감염병은 퇴치가 아닌 관리의 문제로 전환되었고, 방역은 생명 보호보다는 체제 유지의 전략으로 기능했다.
공존 전략은 과학적 판단의 산물이 아니다. 대부분 그것은 사회적 무관심과 정치적 필요가 일치할 때 등장한다. 방역 체계의 미비나 초기 대응의 실패는 일정 시점 이후 ‘이미 지나간 일’로 분류되며, 위험 수치는 ‘관리 가능’이라는 수사적 형식으로 하향 조정된다. 메르스, 구제역, 조류 독감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일상화되었고, 반복을 통해 감각은 둔화되었다.
이러한 대응은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크게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정치 시스템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윤리의 부재라기보다는, 자기 보존 본능에 충실한 구조적 반응에 가깝다. 정치인은 생존을 목표로 작동하는 생명체다. 여론의 급격한 변동, 감정적 동요, 책임 추궁은 생존을 위협하는 외부 요인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그들은 이를 제거하거나 우회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여기서 핵심은 퇴치가 아니다. 핵심은 위협을 통제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속하는 일이다.
영화 〈기생수〉는 이와 같은 구조를 은유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인간의 뇌를 점유해 신체를 조종하는 외계 기생 생명체들을 전면에 배치한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고, 인간 사회에 잠입하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조건들을 계산적으로 확보해나간다. 감정은 필요하지 않으며, 도덕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선택할 뿐이다. 이 중 일부는 정치권력 내부로도 진입한다. 수단은 위장이고, 목적은 생존이다. 인간 사회는 그들을 식별하지 못하고, 그들은 인간처럼 기능한다.
주인공 신이치는 오른손만 감염된 채 기생수 ‘미기’와 공존하는 혼종 상태에 놓인다. 그와 미기의 공존은 감정과 계산, 인간성과 생존 본능 사이의 긴장을 구성한다. 영화가 진정으로 문제 삼는 것은 생존을 추구하는 방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감정이 제거되고, 공감이 무력화되며, 타인의 고통이 변수로서 배제되는 구조다. 영화는 이렇게 묻는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존재를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픽션 속 은유를 넘어 현실 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피해자들에게 한국 사회가 보여주었던 반응은 이 질문에 대한 집단적 테스트였다.
304명의 생명이 구조되지 못한 채 침몰한 이 참사는, 초기에 광범위한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흐르자 사회적 반응은 빠르게 피로로 전환되었고, 감정은 ‘지속되면 불편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정치인은 “언제까지 울 것이냐”고 말했고, 유가족은 ‘정치화된 존재’로 간주되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언론은 그들을 ‘피해자’에서 ‘소란’으로 위치시켰고, 사회는 점차 말을 줄였다. 참사의 중심에서 피해자가 밀려나는 과정은, 감정의 기능이 구조적으로 제거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타인의 고통은 어느 순간부터 ‘사적인 감정’으로 전환되었고, 그 감정은 공론장에서의 효력을 상실했다.
이런 반응은 생물학적 반사 작용과도 닮아 있다. 생명체는 반복적으로 노출된 위험에 대해 반응 역치를 높인다. 자극에 무뎌지는 것은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한 방식이며,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기생수 ‘오른손이’는 이를 노골적으로 말한다. “존엄한 것은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나의 생명이다.” 이 선언은 반사회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생물학적이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감정의 제거는 효율을 위해 선택되고, 공감의 부재는 체제 유지의 조건이 된다.
〈기생수〉 후반부에서 료코 타미아가 인간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구조가 교란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험적 시도였지만, 그는 아이를 보호하려는 충동을 느끼고, 이후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다. 감정은 그에게 처음으로 개입한 외부 변수였고, 그 변수는 기존의 로직을 전복시킨다. 그는 생존이 아니라 관계를 선택한다. 이는 기생수라는 존재가 인간적 윤리의 조건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정적 전환점이다.
이 장면이 함의하는 바는 단순하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구조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인간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공감은 시스템의 안정성과 상충하는 영역에 있지만, 그 부재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저해한다. 감염병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공존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제거가 불가피해진 결과일 수 있다. 우리가 여전히 인간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그 경계에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미루지 않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