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강원도에서 포대 통신병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훈련 중 야전에 뿌려놓은 전화선을 걷으러 후임 한 명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통신선은 일찌감치 걷었고 귀대 시간이 많이 남아 우리는 인근 가게에서 낮술을 거하게 했다. 모처럼의 해방감에 기분이 들떴다.
거나하게 한 잔 걸치고 가게를 나와 어슬렁거리는데 전방에서 지프차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누가 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불콰해진 얼굴을 들킬 양이면 그야말로 영창감이었다. 우리는 얼른 인근 시골집의 창고로 숨어들었다.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창고 안은 우리가 몸을 누일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곧 우리는 깊은 잠에 빠졌다.
서너 시간은 족히 잤을 것 같다. 초봄의 서늘한 기운에 잠에서 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창고를 겸한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머리를 두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닥에 화장실 구멍이 있었고 불결한 냄새기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먹었던 술이 역류하며 구역질이 나왔다.
여전히 자고 있는 후임을 깨워 창고를 나서려는데 구석에 잡지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플레이보이(Playboy)가 족히 십여 권은 되어 보였다. 극도로 수위 높은 사진이 가득했고 내용은 온통 영어로 적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판매가 되지 않지만 미군 부대를 통해 유입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잡지를 시골 창고에서 발견하다니 이건 분명 횡재였다.
잡지를 챙겨 들고 부대로 복귀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전리품을 챙겨 온 장수마냥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노총각 포대장에게 한 권을 바치고 나머지는 찢어서 포대원들에게 배포했다. 모범 병사라며 고참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다. 그날 저녁 전 포대원들은 독서모드로 전환했다. 늘 보던 TV도 켜지 않고 사진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포대장은 점호를 생략한다며 무한 자유시간을 부여했다. 그리고 야한 사진 사이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궁금하다며 영어를 잘하는 이를 불러 해석을 시켰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진과 본문의 내용은 그리 연관성이 없었던 것 같다.
한 달 뒤 나는 포대장의 추천으로 4박 5일의 포상휴가를 가게 되었다. 추천 사유는 병영 내 외국어학습 분위기 조성 및 사기 진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