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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쓸신팝 Feb 26. 2024

[르세라핌] 쉽지 않았기에 두렵지도 않다, 르세라핌

르세라핌 EASY⏐르세라핌 앨범⏐르세라핌 노래⏐르세라핌 컴백

완벽을 위해 기꺼이 관절이 부서질 듯 춤을 추는 독기, 새로운 목표를 위해 과감히 행로를 비틀 수 있는 기개, 그리고 금기 앞에 두려움 없이 욕망을 표출하는 주체적 여성상으로 완성한 르세라핌의 정체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피나는 노력을 가했고, 무수히 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강인함 뒤에 숨어있던 약한 내면의 모습을 알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마치 아이돌이 되기 위한 모든 달란트를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사람인 것처럼 매사 모든 걸 쉬워 보이게끔 했기에, 멤버들의 고통과 시련이 깃든 이면은 쉽게 조명 받지 못한다.


다섯 명의 멤버들이 지금의 르세라핌이 되어 많은 것을 이루기까지 쉬운 순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신보 [EASY]의 인트로 곡 ‘Good Bones’에서 “나만 계속 운이 좋은 거 같아서 화가 나니? 세상이 우리한테만 쉬운 거 같니?”라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이를 솔직하게 언급한다. 하지만 각자의 불안과 두려움을 인정하고, 당돌하게 응수하는 태도는 오히려 이들이 줄곧 강조해 온 정체성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 행보다. 쉽지 않은 걸 쉬워 보이게 만드는 단단한 세공의 과정이 늘 뒤따랐다는 것. 이는 다소 공허하게 비칠 수 있던 팀의 ‘독기’ 내러티브에 굵직한 설득력을 더해준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왔기에 더 이상 두려울 게 없고, 내면의 연약함을 직면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언제나 강하고 당차게만 보였던 르세라핌은 이제 대중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날 것의 자아마저 포용하며 왜 그들이 걸어온 길이 쉽게만 보였는지를 증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제의식의 힘을 싣기라도 한 듯 음악적으로도 판을 새롭게 짰다. 한결 여유롭고, 절제된 [EASY]의 사운드는 강한 외면 없이도 스스로의 진가를 완전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당찬 자신감을 상징한다.

[출처] <엠카운트다운> 공식 SNS
용서 따위 필요 없는 황야의 무법자

세상의 시선을 향해 두려움 없이 맞서고, 시련 앞에 더욱 단단해진 소녀들은 누군가의 용서, 관대한 태도 따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1960년대 서부극 <석양의 무법자>의 테마곡을 샘플링한 첫 정규앨범의 타이틀곡 ‘UNFORGIVEN’은 성공을 향한 열망을 갖고 험난한 케이팝 신을 누비는 르세라핌의 주제가나 다름없었다. 날아오는 총탄도 막을 듯한 견고함과 사막의 황량함을 재료 삼은 펑크 리듬은 이들의 당당함과 담대함을 보여주기에 탁월한 선택이었다.


금기를 깨고, 저 너머 높은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는 후속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로 완전해진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브, <그리스 신화>의 프시케, 프랑스 전래동화 속 푸른 수염의 아내로 대표되는 금기를 깬 여성에 스스로를 대입하며 아이돌 걸그룹으로서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던 메시지를 담담하게 토로했다. “웃어 웃어 더 인형이 되렴 덮어 덮어 다 감정 따윈 다 / 싫어 싫어 난 인형이 아냐 찡그린대도 그것도 나야”라는 가사는 사사로운 감정을 숨기고,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을 보여야 하는 아이돌의 틀에 갇히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들린다. 긴박한 저지 클럽 리듬과 자유분방한 스트릿 의상, 그리고 격렬한 안무는 챌린지를 기반으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룹의 아이덴티티를 효과적으로 강화하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쏘스뮤직 공식 SNS
르세라핌의 산뜻한 일탈, 오히려 좋아

‘FEARLESS’, ‘ANTIFRAGILE’‘UNFORGIVEN’으로 이어진 르세라핌의 ‘독기’ 세계관을 지탱하는 건 힙합, 펑크, 아프로비츠, 라틴 등 강렬한 사운드였다. 이를 기반으로 깨끗하고 청량한 뉴진스의 이지리스닝, 대중성과 화려함으로 중무장한 아이브 등의 음악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그룹의 개성을 확립했고, 난도 높은 퍼포먼스와 함께 타 그룹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팀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그렇게 한 줄기의 콘셉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색깔을 강화하던 찰나 예상 못한 방식으로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사운드에 힘을 덜어내고, 산뜻한 터치를 더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당시 르세라핌이 꾀할 수 있는 최고의 반전이었다.


게임 ‘오버워치’와 콜라보레이션의 일환으로 발매한 싱글 ‘Perfect Night’은 역대 타이틀곡들의 스타일을 전부 거스르는 곡이었다. 감성적인 기타 리프가 이끄는 투스텝 개러지 사운드의 부드러움과 허윤진, 김채원이 주도한 보컬 라인의 따뜻함은 기분 좋은 의외성을 선사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트렌디한 이지리스닝 팝의 형태에 가까웠고, 힘을 뺀 모험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단발성 영어 싱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르세라핌에게 최고의 음원 성적을 안겨주었고, 무게감을 덜어낸 음악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의의를 남겼다. 그렇게 ‘Perfect Night’으로 쓴 완벽한 반전은 새 앨범 [EASY]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르세라핌의 변곡점을 만들어주었다.

[출처] 쏘스뮤직 공식 SNS
쉽게 보여줄게, 르세라핌이니까

르세라핌의 세 번째 미니앨범 [EASY]. 최초로 타이틀에 부정 접사가 빠짐으로써 2막에 돌입했음을 알린 이들의 음악 또한 ‘Perfect Night’의 흥행을 의식한 듯 탈바꿈을 감행했다. 미니멀한 알앤비와 트랩 리듬으로 이뤄진 타이틀곡 ‘EASY’는 보컬과 사운드에 모두 힘을 들이지 않았고, 시크한 중저음 보컬이 여유 있게 그루브를 타며 춤춘다. 마치 이미 수차례 강렬한 음악으로 본인들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으니 이제는 절제미로도 충분히 기량을 뽐낼 수 있다는 위세를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곳곳에 팀만의 공격력을 적절히 숨겨두었다. 인트로의 오묘한 피리 연주는 매혹을 일으키고, 허윤진과 카즈하의 단단한 보컬 톤은 묵직한 트랩 비트의 주춧돌이 되어 준다. 해외 래퍼의 힙합곡에 준하는 완성도의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힘차게 박자를 타고 노는 멤버들의 퍼포먼스를 함께 감상한다면 르세라핌의 매력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음악의 방향성은 변모했지만, 팀을 관통하는 서사와 메시지는 더욱 강해졌다. 타이틀곡 ‘EASY’의 경우 사운드의 파괴력은 가장 미약하지만, 이를 승부수로 띄운 르세라핌의 선택만큼은 더욱 대담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Perfect Night’에 이어 이번 앨범까지 이지리스닝의 송폼마저 섭렵하며 팀의 팔레트를 확장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음악은 한층 쉬워졌지만, 이와 대조되는 극한의 격렬한 퍼포먼스는 쉽지 않은 걸 쉬워 보이게 만드는 이들의 행보에 담긴 역설을 형상화한 것만 같다. “난 나비가 될 애송이”라고 칭하는 수록곡 ‘Smart’의 가사처럼 타고난 스타가 아닌 노력형 아티스트임을 인정한 태도는 이들에게 진솔한 매력을 부여해 줄 뿐 아니라 매서운 독기로 가득 찬 서사를 납득하게 만든다. 음악적 도전은 이전만큼의 위력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할지 몰라도, 르세라핌은 그들의 더 많은 나날들이 ‘Easy’해 보이도록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 written by tim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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