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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쓸신팝 Dec 04. 2023

[레드벨벳] 레드벨벳의 정반합, 레드와 벨벳의 완성체

레드벨벳의 정규 앨범이 드디어 돌아왔다. 클래식하고 감각적인 벨벳 콘셉트의 정수를 완성한 [Perfect Velvet] 이후 무려 6년 만이다. ‘피 피카 피카부’를 반복하는 중독적인 후렴구와 알록달록 무지개 패턴 의상, 소름 돋는 호러풍 뮤직비디오, 일명 ‘갓덤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명곡 ‘Kingdom Come’까지 남긴 2017년 겨울은 아직까지 쉬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레드벨벳의 완벽한 벨벳 음악을 곱씹으며 다음 정규 앨범이 나오기만을 갈망해 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발매된 세 번째 정규앨범 [Chill Kill]은 추운 계절감과 오싹한 스토리, 몽환적인 알앤비 음악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Perfect Velvet]과의 접점이 많다. 하지만 벨벳의 색채가 중심이 된 음반이 분명함에도 이전 앨범과 비교했을 때 음악도, 메시지도 사뭇 다르다. 과연 [Chill Kill]은 레드벨벳의 새로운 정규작으로서 어떠한 특이점을 갖고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레드부터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의 벨벳까지 계속해서 콘셉트의 지평을 넓혀온 레드벨벳의 변천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The Red (2015)


레드벨벳의 시작은 밝고 활기찬 ‘레드’였다. 그룹의 인사말 ‘Happiness!’를 탄생시킨 데뷔곡 ‘행복 (Happiness)’이 첫 발판이었으며 이들을 대표하는 히트곡 또한 ‘러시안 룰렛’, ‘빨간 맛’, ‘Rookie’, ‘Power Up’ 등 발랄하고 통통 튀는 곡들이 많다. 레드 콘셉트의 타이틀곡들은 멤버들의 매력과 에너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수월했고, 음원 차트에서도 대체로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데뷔 초 레드벨벳의 필승법으로 통했던 ‘레드’ 컬러를 가장 강렬하게 펼쳐 놓은 앨범은 단연 첫 정규앨범 [The Red]일 것이다. 말괄량이 삐삐를 떠오르게 하는 비주얼과 의상부터 앨범 커버까지 온통 빨갛게 물들인 앨범은 마치 레드벨벳이 추구하는 ‘레드’ 콘셉트의 정석 같았다. 앞서 데뷔곡 ‘행복 (Happiness)’에는 생기발랄함이, ‘Ice Cream Cake’에는 부드러운 세련미가 돋보였다면 [The Red]의 타이틀곡 ‘Dumb Dumb’에는 환상적이면서도 기묘한 동화 모티브와 변화무쌍한 사운드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레드 콘셉트 앨범의 교과서와도 같던 [The Red]를 시작으로 레드벨벳의 성장세는 급물살을 탔고, 팀만의 독특한 개성을 대중에게 인정 받으며 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 앨범 이후 ‘러시안 룰렛’, ‘Rookie’, ‘빨간 맛’까지 ‘레드’를 내세운 앨범으로 3연타석 홈런을 치며 레드벨벳은 데뷔 이래 가장 거침 없는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다.  


Perfect Velvet (2017)


정규 1집 [The Red]가 레드 콘셉트의 기틀을 마련했다면 2집 [Perfect Velvet]은 붉은빛으로 칠해 왔던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반전시켰다. 물론 이전에 벨벳의 색채를 내세운 앨범이 전무했던 건 아니다. 절제미와 성숙한 매력을 표현한 ‘Be Natural’과 ‘Automatic’, ‘7월 7일’이 있었지만, 세 곡 모두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레드 콘셉트 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부족했고, 대중이 인식하는 레드벨벳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Perfect Velvet]은 타이틀곡 ‘피카부(Peek-A-Boo)’를 필두로 인기 몰이에 성공하였고, 벨벳 콘셉트의 타이틀곡은 좋은 성적을 거두기 어렵다는 편견을 본격적으로 깨뜨렸다.


‘벨벳’ 정체성에 설득력을 더해준 [Perfect Velvet]만의 매력은 콘셉트의 전형성을 탈피한 사운드와 이를 지탱하는 콘셉추얼한 요소들에 있었다. ‘피카부(Peek-A-Boo)’는 진입장벽이 높았던 이전의 벨벳 곡들과 달리 반복적인 코러스와 쉬운 리듬의 챈트를 활용하였고, 변칙적인 흐름 속에서도 스산한 분위기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까꿍’을 의미하는 제목에 담긴 뜻처럼 ‘술래는 너로 정해졌어 재밌을 거야 끼워 줄게’, ‘저 달이 정글짐에 걸릴 시간까지 노는 거야’라며 놀이를 연상케 하는 가사가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공포스러운 뮤직비디오와 만나 오히려 섬뜩함을 배로 증가시켰다. 레드벨벳 멤버들이 피자 배달원을 유혹해 계획적으로 살해한다는 내용의 뮤직비디오는 큰 충격을 안겨준 동시에 이들의 ‘벨벳’ 콘셉트에 강한 파급력을 불어넣어준 요소였다. 


‘피카부(Peek-A-Boo)’가 앨범 흥행의 주역이었다면 고혹적인 멜로디의 수록곡들은 음악적인 호평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찌릿한 신스 사운드와 우아한 보컬이 돋보이는 ‘봐 (Look)’, 드라마틱한 퓨처 베이스가 몽환의 깊이를 더한 ‘I Just’ 같은 곡들이 대표적이다.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던 유려한 선율의 알앤비 곡 ‘Kingdom Come’과 ‘Perfect 10’처럼 레드벨벳표 벨벳 사운드의 핵이나 다름 없는 곡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Perfect Velvet]은 벨벳 콘셉트 앨범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거둔 첫 번째 결과물이었으며 이는 레드벨벳이 향후 과감한 도전을 넘어 난해한 실험까지 감행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피카부(Peek-A-Boo)’의 아성은 쿨한 알앤비 곡 ‘Bad Boy’로 이어졌고, 익숙한 사랑 소재와 부드러운 그루브에 사람들은 쉽게 빠져들었다. 예측불가한 사운드 전개로 충격을 안겨주었던 ‘RBB’에서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수 차례 시행착오는 벨벳의 결정체, ‘Psycho’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가치 있는 도전이 분명했다. 중심을 잃지 않고 그룹의 정체성을 꼿꼿하게 유지한 결과, 레드벨벳은 비로소 두 가지 콘셉트를 때맞춰 자유롭게 탈바꿈할 수 있는 독보적인 개성의 아티스트로 거듭날 수 있었다. 


Chill Kill (2023)


두 장의 정규 앨범을 통해 각각 ‘레드’ ‘벨벳’의 정석을 보여주었던 레드벨벳은 이제 두 가지 색깔이 공존하는 팀의 정체성을 따르는 듯 상반된 두 색깔의 합체를 시도한다. 사실 이들은 최근 몇 년간 ‘레드’ ‘벨벳’ 콘셉트 사이의 경계를 줄이려는 노력을 꾸준히 시도해왔다. 2019년과 2022년에 걸쳐 총 5부작으로 기획된 [The Reve Festival]을 기점으로 한 가지 색깔만을 강조한 기획을 조금씩 탈피하기 시작했으며 2021년 발매한 ‘Queendom’ 또한 두 가지 색채가 공존하는 곡이었다. 이와 같은 흐름을 계승한 [Chill Kill]은 겉보기에 ‘벨벳’이 강조되어 있지만 멤버들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레드’ ‘벨벳’의 양면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양면성의 미학이 크게 두드러지는 건 타이틀곡 ‘Chill Kill’이다. 스산한 신스 사운드와 벨소리, 멤버들의 날카로운 보컬로 시작되는 벌스는 오싹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후렴구에서 밝고 희망찬 메이저 음계로 전환되면서 예측할 수 있는 흐름에 변칙을 더하고, 다채로운 음색으로 쌓은 멤버들의 하모니는 산뜻한 반전의 역할을 한다. 벨벳 콘셉트의 타이틀곡 중 처음으로 두 가지 색채의 ‘조화’를 표현하는 데 힘썼다는 게 ‘Chill Kill’만의 차별점이다. ‘밝은 비극’을 표현한 가사 속 역설적인 의미 역시 사운드의 흐름과 맥락적으로 일치한다. 평화를 깨뜨린 비극의 순간에도 희망을 갈구한다는 스토리가 사운드에 그대로 담겨 곡의 설득력을 높였다. 


타이틀곡에 ‘레드’ ‘벨벳’의 성격이 비교적 균등하게 녹아 있다면 앨범의 전체적인 구성은 어둡고 차가운 사운드를 중심으로 벨벳의 정체성을 따르고자 했다. ‘Knock Knock (Who’s There?)’은 서늘한 보컬과 오르골 연주, 긴박함을 더한 날카로운 스트링 선율까지 모든 사운드 요소가 ‘공포’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어 수록곡 중 임팩트가 제일 압도적이다. 왈츠풍 리듬의 음산한 도입부와 겨울 캐럴 분위기의 코러스가 대비되는 ‘Nightmare’, 멤버들의 도발적인 보컬과 웅장한 베이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뮤지컬 풍의 ‘One Kiss’까지 벨벳 콘셉트 앨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호러틱한 곡들이 많다. 심연에 잠식된 듯한 사운드가 매혹적인 음색을 만나 황홀함을 자아내는 ‘Underwater’, 멤버들의 풍부한 보컬이 공허한 비트를 꽉 채운 신스팝 ‘Will I Ever See You Again’처럼 차분한 정서와 절제미가 돋보이는 곡들도 인상적이다.


[The Red], [Perfect Velvet], 그리고 [Chill Kill]까지 세 장의 정규 앨범으로 이어진 레드벨벳 9년의 역사는 이들만의 정반합 공식을 완성 지었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레드벨벳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레드 콘셉트의 [The Red], 이를 정확히 반대로 뒤집은 벨벳 콘셉트의 [Perfect Velvet], 그리고 두 가지 색깔의 결합을 시도한 [Chill Kill]까지. ‘레드’‘벨벳’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이분법적 구도가 모호해지면서 앞으로 레드벨벳의 음악과 콘셉트를 예측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는 레드벨벳이 앞으로도 ‘레드’‘벨벳’이 뒤섞인 음악을 선보일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며 어쩌면 ‘레드’ ‘벨벳’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현 시점에서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콘셉트의 팔레트는 더욱 무궁무진할지도 모르겠다. 10년차에도 신선함을 잃지 않는 레드벨벳답게 앞으로도 새로운 앨범을 통해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충격을 안겨줄지 그 벅찬 기대감을 절대 놓을 수 없을 것이다. 


- written by tim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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