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국으로!
숙소 벽에 있던 관광안내 그림이었다. 버스를 이용해 모허 절벽을 가려면 50유로를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왕복 버스를 이용할 수 있고 토미라는 아저씨의 관광안내도 들을 수 있었다. 이래 저래 혼자 버스 타고 택시 타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보다 관광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저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골웨이를 떠나 다시 더블린으로 간다. 더블린에서 하루를 좀 못되게 잠을 잔 후 새벽에 일어나 공항으로 가야 한다. 에어 코치라는 버스를 타고 말이다.
다시 정겨운 더블린이다.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기네스를 찾았다. 몸이 많이 피곤해서 피로를 풀기 위해 기네스를 마셨다.
초콜릿우유와도 같은 기네스! 이제는 마지막이다. 지난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많은 생각이 지나쳐 간다. 솔직히 아쉬움보다 얼른 한국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11년 11개월을 은행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높은 사회적 지위의 직업도 아니었고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는 직업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대에 가까운 경험을 많이 했다. 여성들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나를 매력이 있는 이성의 범주로 편입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흔을 넘기고 꾸역꾸역 살아냈다. 물론 현실에 안분지족 하고 안빈낙도하며 안주해 버린 나 자신의 잘못이 제일 크겠지만 말이다. 스스로를 개발하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면 장가는 갔겠지! 어느 날 약국에서 약을 지어서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유능하 정신과 의사 거나 작은 점포의 약사였다면 그래도 결혼은 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후회는 없다. 내가 불같이 살지 않고 열매가 있길 바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 말이다. 노력이 없었으니 후회도 없다. 그렇지만 12년에 가까운 경비원 생활을 멋지게 해낸 나에게 아일랜드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랬다. 난 더블린의 저 강변을 보며 스스로를 위로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여전히 시청 앞은 한산하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단골(?) 펍이다. 멤버들은 처음 왔을 때 그대로이다. 자주 가니까 다들 눈이 마주치면 나와 인사해 주었고 기네스를 마지막으로 들이키고 어른들 한분 한분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여 한국식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 다고 말이다. 다들 손을 잡아 악수를 해주셨고 바텐을 보던 아가씨고 손을 잡고 악수를 해주었다. 저 친근한 어른들은 아침부터 이곳 펍에 찾아와 오후가 늦도록 계시면서 얼굴이 벌게지도록 기네스를 드신다.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가? 나는 아일랜드에 머물면서 이곳 아일랜드가 미래에 유럽의 여러 산업의 중심부이자 여러 가지들을 선도할 나라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아저씨들에게 농담을 좀 하고 올걸 그랬냐? 기네스를 높이 쳐들고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To King Henry and St. George!"
아마 그랬다간 저기 있는 어른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을 것이다. 나에게 선대를 베풀어준 어른들이니 따스하게 한분 한분에게 전부 악수를 했다.
기네스를 두 잔 정도 마시고 김치찌개를 먹고 숙소로 와서 이른 저녁부터 잠을 청했다. 잠이 잘 오질 않았지만 그래도 자야만 했다. 새벽 2시 반에는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설레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빵과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고 햄버거를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고 2시가 조금 넘어서 일어났다. 나는 애초에 캐리어를 가져가지 않았다. 에어프랑스라는 얍샵한 항공회사는 이코노미도 자리마다 가격을 다르게 먹이고 수화물을 싣게 하려면 비용을 더 지불해야 했기에 나는 배낭이랑 보조가방만 들고 아일랜드로 갔다. 그리고 우리 매형에게 줄 선물인 부쉬밀을 사서 용감하게 기내반입을 시도했다.
(새벽의 오코넬 거리)
공항 면세점에 들어왔다. 에어 코치를 타고 공항에 떨어져서 출국 수속을 하고 오랜 줄을 그 새벽에 기다려야 했다. 이유인 즉, 아일랜드 잼민이들이 수학여행을 프랑스로 가는 것 같았다. 그 많은 잼민이들의 줄만 아니었다면 벌써 들어갔을 텐데 오랜 시간 기다려서 면세점으로 들어갔다. 인천공항의 면세점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인천공항에 없는 것들이 있었다. 사고 싶었지만 이제 백수의 길을 용감히 걸어야 할 나에게 명품은 사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아이리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유통이 되지 않아 마실 수 없는 위스키 바로 틸링(Teeling)이었다. QR코드를 찍어 주문을 하면 내 자리로 가져다주는 아주 한국만큼이나 발달된 결제 시스템이었다. 새벽 4시가 넘어서 마시는 틸링은 꽤나 썼다. 그렇지만 관광의 의미에 중심을 두고 경험 삼아 마셨다. 이내 곧 뱃속이 따뜻해졌고 다시금 긴 시간 비행을 할 용기가 솟아났다. 편의점에서 콜라와 샌드위치를 급하게 먹고 에어링구스 안으로 탑승했다.
동이 터왔다. 이제 내 삶에서 다시 유럽을 방문할 일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걸어 다니면서 많이 지치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고 고독을 떠나고 싶어서 온 곳에 고독이 나를 환영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내 삶에 이제 긴 여정은 없을 거다. 아마도 신혼여행은 색시될 사람과 잘 상의해서 설악산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2주라는 시간이 정말 빨리 갔다. 다른 사람이 말하길 아일랜드에 그토록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는데 나의 목적은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이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프랑스에 내려서 급하고 급하게 다시 에어프랑스를 탔다. 검색대에 이르렀는데 역시 테러를 한번 심하게 당했던 나라라 그런지 아주 세세하게 가방을 검사했다. 여자들 화장품이 액체로 되어있으니까 그 무게까지 정확하게 달아서 필요 이상이면 과감하게 압수를 했다. 그걸 본 나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우리 매형을 위한 나의 부쉬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코 큰 프랑스 놈은 자비 없이 싸늘한 눈으로 쏘리를 말하며 내 부쉬밀과 골웨이에서 만난 프랑스인이 준 와인을 가져갔다. 돈으로 하면 아마 10만 원 정도 하는 물품을 가져갔다. 사정해도 소용없었고 비행기 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그냥 손을 털고 비행기를 탔다. (아마도 지들 회식때 공짜라고 좋아하며 처먹겠지...)대신 매형을 위해서는 면세점에서 다른 위스키를 사서 준비해 두었다. 면세점 밖에서 사는 술이나 면세점 안에서 사는 술이나 차이가 뭐냐? 이 답답한 프랑스 놈들아! 창밖으로 내려다본 구름들은 나의 마음을 더없이 맑게 해 주었다.
14시간의 비행 끝에 나는 한국에 떨어졌다. 아침 7시였고 비행기를 정차시키고 게이트를 통해 발을 한국에 딛는 순간 안도가 되었다. 이제는 비싼 물가에 계산하지 않아도 되었고 한국말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나는 당장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역에 떨어져 시장을 찾아가 곰탕을 사 먹었다. 이 좋은 게 만원뿐이라니! 전에는 곰탕이 만원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이젠 감사하며 먹는다.
그렇게 여행이 끝났다. 그리고 삶이 무료하면 그때의 기억을 꺼내어 웃곤 한다.
"고마웠다! 자유와 항쟁의 땅! 아일랜드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