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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Nov 17. 2021

FATHER

그 목사님은 목사 같지 않았다. 늘 허름한 옷에 녹이 슨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작은 스피커를 들고 노방에서 전도를 했다. 내가 생각한 목사는 자기가 봉사하며 급여를 받는 교회가 있어야 했고 아내가 있어야 했으며 항상 단정한 양복을 입고 머리는 기름에 발라 단정히 넘긴 사람이어야 했다. 말투까지 근엄하게 힘을 준 사람이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18살의 나에게는 목사였다. 그렇지만 길에서 만나는 그 목사는 나에게 목사라는 소문만 있었지 어디서 학위를 취득했으며 어느 교단에서 봉사했는지 같은 이력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른 목사들이 그를 그냥 목사님이라 불렀기에 목사님이라 알고 있었다. 그 목사는 늘 길에서 해가 지도록 전도를 했다. 날이 추운 저녁에도 옷이 그것뿐 인지 늘 얇은 점퍼 차림으로 한 손에는 스피커를 들고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전도의 내용을 이야기했다. 그 내용인 즉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오며 죽음 뒤에 신앙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지옥이 기다린 다는 말을 거침없이 해댔다.

 

넘겨짚는 내용인지 모르겠으나 그 목사님에게는 수입이 없었다. 재산이라고 해봐야 들고 다니는 스피커와 타고 다니는 녹슨 자전거가 전부였을 것이다. 겨울철에도 옷은 늘 변하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점퍼와 통이 큰 늘어난 청바지 그리고 검정 낡은 구두가 그가 어떤 경제 사정에 있었는지 늘 말해주고 있었다. 18살의 나는 그 목사를 길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지고 있던 신앙이 부담되곤 했다. 내가 신앙을 물론 가지고야 있지만 저런 형태로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저런 허름한 모습으로 내가 가진 신앙을 전하는 것이라면 난 몇 번이고 내 신앙을 부끄러워할 거라 생각했다.

 

그 목사님이 배의 허기를 모처럼 만족스럽게 채우는 날은 내가 살던 곳의 기독교 연합회가 잔치를 여는 날이었다. 연합회의 돈으로 천막을 치고 음식을 골고루 했을 적에 여지없이 그 목사님도 나타나 나른 목사님들과 악수를 대등하게 나누며 스피커를 어깨에 건 채로 인사를 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 목사님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당당함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양복을 잘 차려입은 목사님들이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에게 눈치를 주면 천막 한 곳 구석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에 그 목사님은 혼자 조용히 앉아 차려온 음식들을 거침없이 먹었다. 내 기억을 의존해 보자면 그때 목사님의 모습은 공사장에서 식사를 하는 인부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날이 추운지 코가 빨개진 채로 그 추위 속에서 식사를 했던 그 목사님은 그렇게 식사를 해결하고 나서 스피커를 어깨에 걸고 다시 시장 통 안으로 들어가 원색적이고 무서운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내가  목사님에게 은혜란 것을 받은 것은 뜻밖의 일이었고 뜻밖의 장소에서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길을 걷다가 마주쳤고 나의 얼굴을 알던  목사님은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내가 다니는 교회 이름을 대고 우리 교회 목사님들 이름을 대며 나름 나도 그들보다 낫다는 식의 말로 자신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자리에는 목사님 말고도 어린아이가  목사님이 자전거  안장에 타고 있었다.  아이는 목사님의 아들이라 했다. 아들의 모습도 목사님과 같았다. 허름하고 낡아있었다. 아이였지만 낡아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옷가지며 신발들이 낡아있었고 아이의 모습도 낡아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불량식품이 들려있었다. 그것은 껌이었고 신호등 모양의 그것이었다. 옷보다 몸이 커버려서 점퍼 밖으로 손목이 보였지만  고사리 같은 손으로 껌을   채로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장에 앉아  껌을 음미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만족감을 느낄 레야 느낄  없어 보였던  아이는  속의 추위와는 상관없이 포근함 속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모습 속에서 보고야 말았다. 내가 보기에는 형편없는 목사이자 아버지였을는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전적으로 신뢰하며 안정감을 주는 아버지라는 것을  눈과 마음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아이에는 의존해야  유일한 대상이었으며 내가 확인한 아이의 눈빛 속에서는 이미 그것이 형성되어 지극한 안정감을 누리고 있는 것은  겨울 저녁에 나는 보았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저 아이의 손에 이 세상 최고의 과자와 장난감이 들려있고 이 세상 최고의 명장이 만든 옷을 입고 있는데 저 아이가 아버지를 잃고 숲 속을 헤맨다면 저 아이는 저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그때 알았다. 입은 옷이 낡아있어도 내가 먹는 간식이 나의 배를 아프게 할 불량 식품이어도 그리고 그런 것들밖에 사줄 수 없는 아버지여도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단 한 명의 아버지의 품에 있다면 그 아이는 행복하구나!라는 생각 말이다. 그 행복은 이 세상 무엇도 줄 수 없는 행복인 것이다. 나는 그 목사님의 말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목사님의 자랑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사님이 품는 그 아이의 마음과 눈에서 나는 하나님을 발견했다.

 

그렇게 그날 나는 따뜻한 하나님의 품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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