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유의 화신인 크눌프를 부러워하는 아이 다섯을 둔 재단사가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 크눌프를 부러워하는 장면. 크눌프는 이런 그에게 자신도 아이가 있었지만, 자유를 선택하여 한 번 안아볼 수도 없다며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의외로 재단사는 자신은 아이들을 사랑하며 그중 첫째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마 재단사는 이 대화로 무언가를 느꼈겠다고 생각한다.
별것 아니라고 넘기면 흘러가는 공기에 불과한 이야기이지만, 의외로 눈길이 이곳에 한참 머물면서 등가교환 원칙이 생각났다. 경제학 용어인데 이것을 경제학으로 풀면 딱딱해지니 한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로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극 중에서 엘릭은 동생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팔을 잃고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하여 자기 다리를 내어 주며, 동생은 몸을 상실한다. 이들이 강철의 심장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이처럼 원하는 무언가를 위하여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지불하는 것을 등가교환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도 등가교환의 법칙이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아침잠을 포기하거나, 글을 쓰기 위하여 저녁 모임을 포기하거나, 가족을 위하여 취미 활동을 포기하거나 하는 것 등등 말이다. 여기서 누구나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이 등가교환이 공평한가에 대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아침잠과 미라클 모닝의 무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구에게는 미라클 모닝의 가치가 클 것이고 아침잠을 자지 못하면 생활이 망가지는 사람에겐 미라클 모닝의 무게에 1그램도 실리지 못할 것이다.
즉, 등가교환 법칙에서 양자의 가치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인 잣대가 아니라 철저히 주관적인 저울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선택한 것이 타인에게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 않으니 언제나 눈금이 이동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줄자를 무조건 들이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뭐 이쯤은 누구나 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잣대로 내가 가치를 측정하여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것에 시간의 흐름이 더해져 이것이 실수로 느껴지는 경우이다. 아마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실망과 좌절을 겪으며 자신이 처음 세웠던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유는 예측한 것과 같은 결과가 착실하게 나타나지 않아 본인의 계산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는 두 가지 정도를 먼저 생각한 후에 하던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첫 번째는 바로 나의 계산 착오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객관화를 제대로 한 것일까? 나의 능력은 50인데 90의 능력으로 이것을 해내는 사람을 보고 이 사람에 맞춰 계산했다면 당연하게 동일한 방법, 비슷한 시간에 같은 결괏값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나는 이런 경우가 꽤 있다.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것이다. 처음엔 이것을 직접 해보기 전엔 잘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것이니 실행하면서 조금씩 계획에 변화를 주면 충분히 결과에 도달할 것이다.
두 번째는 세상을 잘못 계산한 것이다. 자고 나면 세상이 변하는 요즘은 자신이 일을 시작했을 때와 일이 흘러가 결과를 맞이할 때와 확연히 다르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세상인 것을. 그렇다고 실망만 하고 시작한 일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럴 땐 뭔가를 진행하면서 세상의 변화도 변수로 넣어 계산하는 방법과 우직함으로 세상에 귀를 닫고 시간의 무게를 믿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오로지 일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전자의 예로는 과학자들이 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로는 다나카와 같은 연예인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를 모두 잘했을 때도 같은 현상이 있을 수 있다. 이때는 단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바로 초심이다. 시작할 때의 열정과 긍정의 힘이 시련을 하나씩 만나면서 초심이 흔들리면 애초에 계산을 잘한 등가교환이더라도 좌절하게 된다. 처음에 어떤 것을 선택하고 다른 것을 포기했다면 당시 자신은 꽤 많이 고민하고 그에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시련이 와서 초심이 흔들린다고 포기한다면 과거의 시간에 기록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지 않을까?
오늘의 본문에서 재단사도 결국은 크눌프를 부러워하기보다 다섯 아이의 양육에 치이는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더는 불평불만 했다는 얘기가 없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너무 지치거나 힘들면 초심을 간과할 수 있다. 아마 내가 제일 많이 그랬을지도. 하지만, 조용히 노트를 펴고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사안과 마음을 글자로 나열하면 아마 지금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무엇인가를 포기할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지금 삶이 나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가? 바로 이때가 자신이 선택한 등가교환의 법칙을 고요하게 생각하며 초심으로 돌아갈 때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