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두지 않고 물 흐르듯 넘어가면 전혀 이상함을 느낄 수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인식함과 동시에 한 문장 안에 함께 있으면 매우 어색한 단어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픔과 선물이라니….
이런 선물을 누가 받고 싶을까?
작가는 굳이 말만 들어도 꺼려지고, 굳이 누군가 공을 들여 하지 않을 행동을 자기 작품에 왜 집어넣었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 바람에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고민한 결과 그럴듯한 나름의 이유를 찾아냈다.
슬픔을 느끼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 첫 번째로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 두 번째로 그 대상과의 일정 시간과 생각의 공유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생각의 소통 여부는 상관없다. 물론 소통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 개체나 무생물과는 어려울 테니까.
- 세 번째로 그 대상에게 기대한 부분이 어긋나야 한다. 어떠한 방식의 이별이라는 관문이 반드시 발생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쓸모의 다함도 포함된다.
즉,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추억, 사랑, 감정의 교류, 희생, 인내가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상과 노력을 담은 시간의 축적. 물론, 슬픔을 느끼게 만드는 대상은 자신의 꿈이나 목표도 있을 수 있으며 나 이외의 생명체일 수도 있다. 이 중에 중점적으로 고찰한 대상은 나 이외의 생명체 즉 타인에 관한 부분이다.
현대 사회는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유니크함과 빠름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우리가 슬픔을 느낄 정도의 관계 유지가 생각보다 힘든 편이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작가는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을 스스로 감금의 상태로 만들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위한 노력은 점점 단절되어 가고 있다고.
이런 상태에서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 바로 슬픔이다.
슬픔을 느끼기 위한 가장 첫 번째인 대상의 존재라는 조건부터 어긋나기 때문이다.
첫 번째가 없으면 그 이후로 넘어갈 여지 자체가 없으므로 첫 번째 조건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슬픔이라는 결실은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희생과 노력의 산물이다.
아주 작은 관계라도 거저 주어지는 때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슬픔은 자신의 열정과 노력과 희생의 크기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최선을 다한 관계의 단절 즉 이별에 따른 슬픔의 크기는 크다.
그러나 굉장히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픔의 치유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보다 빠른 경우가 많은 편이다.
아마도 후회, 미련 등의 새로운 감정이 군살처럼 덕지덕지 붙지 않아서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인간에게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건 숙명적으로 다가오는 이별로 발생하는 슬픔이라는 놈은 언뜻 보면 부정적인 느낌만 가득하다.
하지만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자신에게로만 향한 눈을 타인에게 돌려, 스스로가 가진 것을 나누는 행위의 산물이기에 얻어내는 것이며 마냥 차가운 느낌의 의미가 아닌 따뜻한 단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