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 첫 번째 장편소설
반쪼가리 자작이라는 작품에 반해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모두 읽고 오랜만에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을 손에 잡았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며 1947년에 발표되었다가 1964년 작가가 원고를 대폭 수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정하면서 서문을 집어넣었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어떤 목적과 어떤 생각으로 장편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동화적인 작품의 세계가 어떻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그러면 민음사에서 출간한 그의 첫 장편 소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작품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연합군이 1943년 7월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직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실각한다. 국왕 빅토르 엠마누엘 3세와 새 총리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동년 9월 8일 연합군에게 항복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보복이 두려웠던 그들은 로마로 도망쳤으며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 군대는 스스로 해산하고 만다. 독일은 당연하게 이탈리아의 배신에 분노했으며 보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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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때의 전우였던 이탈리아군을 독일군은 강제로 무장해제시켜 살해했으며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진다. 이후 이 두 부대는 격돌하였으며 그 결과 이탈리아 군 1600명이 숨졌으며 항복한 이들 5000명은 독일군이 총살시켰다. 이에 힘입어 무솔리니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정권을 세웠지만, 1945년 4월 25일 무솔리니는 반파쇼 의용군에게 붙잡혀 28일 총살당했으며 하루 다음 날 히틀러가 스스로 권총을 쏘면서 전쟁이 끝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격대를 파르티잔이라고 한다. 의용군, 민병대와 비슷한 의미이며 이들은 연합군의 이탈리아 점령 이후 카시빌레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부터 연합국에 협력하는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단체를 말한다. 이들은 연합국과 공동으로 나치 독일에 맞섰으며 스스로 이 투쟁을 두고 이탈리아 해방 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시 유격대원이 되는 것에 특별한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일반 민중은 살기 위해 박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 덕분에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이탈리아의 전범 행위에 연합군은 관대한 편이었다.
파르티잔 운동이 한창일 때 창녀 누나를 둔 핀은 아이들에게도 섞이지 못하고, 어른에게도 섞이지 못하여 항상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굶주린 아이였다. 괴롭힘이 아니면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 아이들보다는 온갖 나쁜 말을 하더라도 받아주는 어른들에게 섞이는 것을 좋아했던 그였다. 누나에게는 가족이 생각날 때마다 몸을 풀러 오는 독일 병사인 파리크가 있다. 어느 날 위원회 사람이 마을로 오면서 동네 사람들이 핀에게 독일 병사의 권총을 훔쳐오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며 협박을 한다.
벌벌 떨면서도 가까스로 권총을 훔쳐서 그들에게 가지만 칭찬과 함께 환호해 주리라 생각했던 그들은 묘하게 그를 배제시킨 채 자신들만의 꿍꿍이를 담은 회의를 한다. 이에 화가 난 핀은 권총을 자신만 아는 장소인 거미가 집을 짓는 오솔길로 가서 권총을 묻어버리고 그 혁대를 빙빙 돌리며 마을로 돌아가다가 독일 군대에게 잡혀간다. 권총이 어디 있냐며 온갖 문초를 당하지만 실토하지 않고, 그곳에서 만난 빨간 늑대와 함께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지며 핀은 사촌(특정인의 사촌이 아니라 그냥 사람 이름 같은 별명)을 만나 그를 따라 유격대에 합류하게 된다.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였기에 그곳에서 처음부터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만의 자리를 잡아간다. 이후 독일군과 대격돌이 일어날 상황이 되니 사람들은 핀을 내버려 두고 자신들만 싸우러 갔으며 이 전투에서 나름의 승리를 거머쥔 이들은 자신들만의 구조 조정(?)에 들어갈 낌새가 보여 핀은 집으로 가버린다.
사실, 이 작품은 줄거리만 적어 놓고 보면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전쟁 시대의 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딱히 특별함을 꼽으라면 주인공이 어린아이라는 것 정도이다. 하지만, 각각의 의미를 파고들어 가다 보면 이탈로 칼비노만의 색채를 강하게 느낄 수 있으며 '우리의 선조들 3부작'에 비교하면 상당히 현실적인 면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그가 첨부한 서문 덕분에 객관적인 부분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자신의 소설이 되어 가는 것을 깨달으면서 작품의 향방을 알 수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면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말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등장인물 각각의 이름은 나름의 색채를 지닌 개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다. 빨간 늑대, 오른팔, 왼손잡이, 백작, 기린 나무 모자, 위원장 킴(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의 작품인 '킴'에서 방랑하면서 자신을 알아가고, 사명을 깨달아가는 주인공 이름) 등등. 그러나 이들을 통해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각각의 공동체의 대표적 인물로 볼 수 있다. 농민, 도축업자, 산지기들처럼 무엇인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 지식인의 대명사인 킴까지. 이렇게 보면 딱히 작가가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등장인물보다 그들이 속한 단체가 독자들에게 더 부각되었다. 이들이 유격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나오기에 그들의 결핍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핀의 경우 해설에서는 피노키오에서 따왔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읽다가 보면 악동 피터팬도 굉장히 많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핀은 과연 순수한 어린아이였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이는 작가 자신을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기에 어린아이적인 순수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핀이 권총을 훔쳐서 한밤중에 거미집으로 가서 한 행동이 꽤 충격적이었다. 그는 동물들에게 아주 심술궂었으며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곳에 존재하는 거미를 보며 인간처럼 구역질이 난다면서 총을 쏜다. 그 외에 평소에도 거미 굴의 문을 부수고, 귀뚜라미를 조각내어 모자이크를 만들기도 한다.
핀은 인간처럼 끔찍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돌려서 생각을 해 보자면 인간의 악한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시 서민 계급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검은 셔츠단이나 유격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당장 눈앞에 닥친 더 거대한 계급에 저항하지 못한다. 핀의 행동 또한 스스로 저항할 수 없는 작은 동물들을 함부로 하는 것으로 보자면 약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당시의 인물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 입안이 썼다.
그 외에 킴이 말하는 비 지식인 계층의 심리를 저항하여 그들로 하여금 유격대원으로 활동하게 만드는, 그리고 조직에 충성하게 만드는 행위 즉 정치 작업에 관한 독백은 정치의 본질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것을 상황에 맞게 제대로 이용하는 정치인이 현대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핀에게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의 의미와 권총의 의미, 각자 거느리는 유격대의 의미 등 꽤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 둔 작품이었다.
현대 문학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이탈로 칼비노의 첫 작품은 이후의 작품에 비하여 동화적인 요소면에서는 거친 부분이 많지만 이후 그의 소설 변화를 확연하게 느끼기 위하여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 뒤 다 찾아내지 못한 알레고리 해석을 파헤쳐볼 생각이다. 첫 작품이기에 엉성한 면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가볍게 시작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소설이었지만 반쪼가리 자작 이후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이라면 또 다른 새로운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았다. 비록 아직도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p.24
* 형법은 잘못된 거야. 한 사람이 인생살이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잔뜩 쓰여 있지. (중략) 하지만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어. -p.60
* 핀이 보기에 인간이란 존재 안에는 벌레처럼 구역질 나는 어떤 것과 친구를 끌어들이는 따뜻하고 친절한 어떤 것이 함께 들어 있었다. -p.102
* 자유로운 창의성, 모든 것의 비밀은 자유로운 창의성에 있는 거라고. -p.114
* 핀은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잘 몰랐다. 그는 태어난 뒤로 줄곧 전쟁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폭격과 소등령만은 그 뒤에 생긴 것이지만. -p.134
* 역사와 인간의 머리 사이는 엄청나게 괴리되기도 하고, 또 뜻밖에 결합되기도 해서 총체적 이성이 개별적 이성이 되어버리는 어두운 구역과 낭떠러지가 남아 있다. -p.147
* 난 우리의 정치 작업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어, 우리의 해방을 위해 굴욕에 대항해서 그것을 이용하는 거야. 마치 파시스트들이 굴욕을 영속시키기 위해 그 굴욕을 이용하고 인간과 인간을 싸우게 만들듯이 말이야. -p.158
* 우리의 싸움, 인간 해방이라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긴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방법들을 이해할까? -p.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