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하지만, 여전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용기를 내서 써보고 싶었다. 거창한 얘기는 아니다. 그저 살아가며 일어날 수 있는 것들에 흔한 스토리다.
개인적으로, 나이 마흔을 전후해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태도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예전에는 뭐가 안 되면 그것들에 매달려서 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 면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대한 집착을 거의 하지 않게 됐다. 스트레스 탐지기의 성능이 민감해졌는지 그런 요인이 감지되면 잘 피해 갈 수 있게 스스로를 돕는다. 혼자서도 꽤 깊은 생각을 하고, 내면의 평화가 깨지는 것 극도로 싫어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일상을 뒤흔드는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 비중이 작은 것들이 개입해 일상을 뒤흔들거나 불쑥 삶을 헤집어 하루나, 한주, 일상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높은 곳에서 유유하게 떠도는 롤러코스터처럼 익사이팅(exciting)하고 짜릿한, 그러나, 사람을 극도로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감정들이 이젠 좀 별로다. 조금 지루하더라도 오리 배를 타는 것처럼 꾸준히 발을 저어 고요하게 수면 위를 걸을 수 있는 상태를 더 선호한다고 하면 잘 표현이 될까. 그러니까 내적 긴장감이 높은 상태를 뭐랄까, 병적으로 싫어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평범하지만 소중한, 내적 평화를 위해서는 하고 있는 일의 강약을 잘 조절해야 하고, 만나는 사람들의 성향 또한 중요하다. 불필요한 언쟁이나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평소의 태도는 습관처럼 자연스러워하고. 하지만, 이 중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어쩔 수 없이 그냥 벌어지는 일들도 끼어 있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일이나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이미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 그동안의 경험들을 통해 학습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나는 나름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바사삭 소리가 날 만큼 유리도 이런 유리 멘털이 따로 없다. 많은 인간관계에서도 그 취약성이 너무 쉽게 드러나 괴롭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감지한 것도 꽤 오래된 일인데, 사실 이 관계의 개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방관자적인 입장이 더 맞다. 세월이 지나면서 여전했던 그 무엇들은 변하고, 변형되고 끝내는 여전하지 않게 되는데, 처음에는 이런 일들이 무척 신경 쓰였지만, 이제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는 중'이고 여전하지 않은 우리의 관계를 잘 받아들이는 것도 내가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느껴진다.
그 무엇도 당연한 건 없고 여전할 리 없는데, 무작정 오래된 관계라고 해서 모든 게 예전과 같을 거라고 생각한단 거 자체가 함정이다. 무책임이다. (코로나 이후) 지난 3년여의 일상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것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일엔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나. 는 실로 잔인한 팩트가 아니었던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순간, 많은 것에 구멍이 생기는 것 같다. 그 사이로 새는 것들은 무엇이던가.
봄비가 추적거린다. 날씨만큼 생각이 가라앉고, 또 가라앉지 않고 떠도는 것들은 부유한다. 여전하지 않은 것들을 받아들일 용기가 아직 나한테 남아있을까. 그리고 내게 여전한 것들은 무엇일까. 여전히 내가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것들. 잡고 놓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받아들일 용기는 어쩌면 새로운 국면이나 관계를 당당하게 바라보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저 회피하거나 방어벽을 치지 않고 그 무엇이든 민낯을 마주하겠다는 용기. 내가 만든 세계에서 꼼짝 앉고, 팔짱 끼고 앉아서 '어디 이 선을 넘어오기만 해 봐라' 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내가 느끼는 여전하지 않은 것들을 바로 볼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