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번아웃이었다

적응이라고 믿었던 7개월

by 졸참

출근 첫날.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팀장이 자랑을 한다.

"우리 회사는 아침, 점심, 저녁, 커피까지 모두 줘. 아침이랑 저녁은 공짜야. 그리고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셔틀버스도 운행하고, 밤 10시 반 이후엔 택시비도 지원해 주니까 다 이용하도록 해."


아침을 먹으려면 늦어도 8시까지는 와야 되는구나, 출근시간이 1시간 반이나 걸리는데 그럼 몇 시에 일어나야 되는 거지? 그 시간엔 지하철에서 앉을 수 있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다스러운 옆팀 직원이 한마디 거든다.


"그거 좋은 거 아니다. 다 회사에 오래 있으면서 죽어라 일만 하라고 만들어둔 거야. 호호호호"


맞다. 사장은 돈이 되지 않는 곳에 돈을 쓰지 않는다.

분명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인사팀에서 포괄임금제를 설명하며 '한 달에 한두 번 야근할 거니까 실제 근로자에게 이득이다'라고 말했는데 왜 나는 첫날부터 야근을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도 잠시였다. 나는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어차피 할 야근이니 몸이라도 편하자며 밤 10시 반까지 일 하다 야근택시비를 사용한 날도 허다했다.


적응의 시간이라기엔 너무 숨이 막혔다

연구원 생활 하지 않겠다고 박사과정을 뛰쳐나왔는데 먹고살 길이 없어서 다시 연구원으로 직업을 구한 상황이었다. 원하지 않는 일이니 취업이 즐겁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일 자체가 전임자들이 싸질러 놓은 똥밭이었다. 똥밭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학교와 연을 끊고 사는 내가 그 소식을 듣지 못했던 거였다.


입사 첫날부터 내가 받은 인수인계서는 3개. 모두 근속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 박사급 책임연구원 또한 내가 입사하고 얼마 후에 퇴사를 했다. 그렇게 나는 책임연구원의 업무까지 총 4개의 인수인계서를 떠안았다.


사교육 회사에서 자사상품의 인지발달 촉진 효과를 검증하는 5년짜리 종단연구였다. 아무래도 사장은 연구소장의 허풍에 낚여 일을 크게 벌인 것 같았다. 아무리 종단연구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작은 규모의 연구 하나로 7개월에서 24개월의 인지발달에 미치는 그 교구의 효과를 확인하는 건 어렵다. 그러니 다들 도망갔겠지. 하지만 이미 진행 중인 연구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그냥 시키는 걸 하고 뭐라도 결과를 만들어야지 싶었다. 실험 기획부터 준비, 실행과 더불어 코디네이터 역할까지 최소 2, 3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 떠안았다.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 왕복 3시간의 긴 출퇴근 시간, 거의 매일 야근을 해도 끝나지 않는 일, 결제권자이면서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고 성과 가로채기로 생색내고 싶어 하는 소장, 바로 옆에서 전화응대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는 빨간펜 팀장, 그리고 내가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른 교육격차를 키우는데 일조하는 자료를 생산하고 있다는 문제의식까지.


숨이 막혔다. 머리가 멍해졌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일을 못하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됐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걸 차분히 생각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번아웃 초기 증상이란 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했다. 야근도 더 많이 했다.


그런데 열심히 하면 할수록 참담했다.


천천히 메말라갔다

3개월쯤 지났을까. 토요일 행사 때문에 출근을 했던 것 같고 그날도 팀장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지적을 받았던 것 같다. 순간 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둘이 한 공간에 있자 목이 턱 막혔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자꾸 시계를 보는 팀장이 보였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더 못하겠어요. 저도 제가 일을 이렇게 못하는지 몰랐어요. 제가 이렇게 칭찬에 목마른 사람인지 몰랐어요."


나는 퇴사 선언마저 한심했다.

참다 참다 나온 말이 칭찬이 없어서 서럽다는 말이라니. 꾹꾹 눌러서 한번 크게 터트리려던 나의 첫 퇴사 선언은 결국 한 시간짜리 눈물의 하소연이 되어 버렸다.

팀장은 자기가 조금 더 신경 쓰겠다고 했고, 자기가 나에게 내일 배움 카드 수업까지 빠지며 시간을 내주었다고 생색을 냈다.


물론 그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팀장도 노력했고 나도 노력했다. 나는 사무실에서 지하철 4 정거장 거리로 이사를 했다. 월세 지출이 생겼지만 아침에 한 시간이나 더 잘 수 있었고 지하철도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노을 지는 시간에 불광천 산책로를 걸어서 퇴근하는 상상도 했다. 사무실엔 아주 밝고 예쁘고 초롱초롱한 갓 석사 학위를 받은 연구원 한 명이 채용되었다. 아주 조금 숨통이 트였다.


기분을 끌어올리려 시간을 쪼개 지인들을 만났다. 소개팅도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힘들어졌다.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쓸 여유와 에너지가 없었다. 안부를 묻고, 일상을 공유하는 그 간단한 스몰토크가 잘 안 됐다. 당장 오늘도 나는 언제 집에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야근 중인데 얼른 퇴근하라는 소개팅남의 연락이 반갑지 않았다. 다음 만남은 언제로 할 거냐는 질문에는 한숨만 나왔다. 평일 저녁에도, 주말에도 나는 일을 해야 조금이라도 덜 혼날 것 같았다. 일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피곤했다.

나는 점점 생기를 잃고 메말라갔다. 일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더 예민해졌고 화를 많이 냈다. 일도, 대인관계도 엉망이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내가 이렇게까지 한심한 사람인지 몰랐다.


출근하는 게 무서웠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오늘도 멀쩡한 내 맹장을 원망했다. 왜 나는 감기도 안 걸리고 배탈도 나지 않는지 한탄했다. 왜 그 흔한 교통사고도 안 나는지 절망했다. 5층 자취방에서 계단을 내려가며 '여기서 구르면 얼마나 다칠까? 며칠이나 출근 안 하게 될까'를 생각했다. 언젠간 내가 의도적으로 발을 헛디디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고 딱 회사에 출근하지 않을 정도만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번아웃 증상이었다. 그때도 내 상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살사고가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적응 중이라고 생각했다. 회사 생활은 원래 힘든 거라고들 하니까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한 상태였다.


절대자가 준 시련이라고 생각해도 견디기 어려웠던

이 삶이 내 선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끔찍했다.

이 끔찍한 현실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즈음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하는 모습에 이거다 싶었다. 내가 겪는 이 지옥 같은 삶이 절대자가 주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좀 덜 싫어질 것 같았다.


집 근처 성당에 찾아갔다. 새 신자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접수 기간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지금 당장 종교인이 되어야 했다. 옆동네 성당을 찾아갔다. 다행히 새 신자 교육 신청기간이었다. 신의 뜻인 것 같았다. 바로 등록을 했다. 등록한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일요일 오전 9시에 교육을 듣고 11시 미사에 참석한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소리 내며 가슴을 두드린다. 내 탓이 아니고 싶어서 왔는데 내 탓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니 한숨이 나온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성당을 가득 채운 수백의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읇조리린다. 다들 신에게 구원을 청한다. 염원이 담긴 목소리가 성당에 울려 퍼진다. 나에게 잘못한 팀장을 내가 용서할 테니 나를 좀 힘들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 환한 미소로 나의 평화를 빌어준다. 울컥 눈물이 차 올랐다. 여기 모인 이들이 다들 나처럼 힘든 사람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었다. 나도 온 마음으로 그 사람의 평화를 빌었다. 숨이 좀 쉬어지는 것 같았다.


4개월가량 지속된 교리 시간에 나는 매번 지각을 했고 꾸벅꾸벅 졸았지만 빠지지 않았다. 뭘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11시 미사에 참여하는 그 시간만큼은 너무 좋았다. 주변 사람들의 평화를 빌었고 그들의 평화 인사에 위안받았다. 매번 온 마음으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나의 구원을 빌었다.

그리고 회사로 출근했다.


일요일에도 일을 했는데 이렇게밖에 못했냐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사무실에 출근한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도 그냥 앉아있었다.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당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가 남는 시간에 사무실에 왔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은 내가 극복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고 들었지만 그 시간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고통스러웠다. 매주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구원을 청했으나 구원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며 맹장이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짧아진 출퇴근시간에 익숙해지니 야근 시간이 길어졌다. 일이 익숙해져도 양이 줄지 않았다. 하루 한 번도 하늘을 올려보지 못했고 퇴근길 불광천 산책은 시도도 하지 못했다.


2015.12.31. 자전거를 타고 일몰을 보러 가던 오키나와 사탕수수밭 어느 길목에서


12월 초.

세 번째 시도만에 드디어 울지 않고 퇴사를 고했다. 너무 지쳐서 긴 여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해를 한국이 아닌 곳에서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팀장은 더 이상 나를 더 잡지 않았다.


고작 7개월.

번아웃은 근속기간이 오래되어야 걸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막 입사한 내가 겪는 일이 번아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이 메마른 데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돌아보면 영혼까지 메마르기 전에 퇴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곳의 근황을 찾아봤다. 그 연구소는 5년 종단연구를 마치지 못하고 2년 후에 해체되었다. 그때 진행한 종단 연구가 학회에 발표되거나 회사 홍보자료로 사용되지도 않는 것을 보니 그 실험 자체가 망한 것 같다. 이제야 그 기억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이렇게 되게 두지 않는 사람이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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