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꼭 사장님이 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그 긴 시간 동안 꿈으로만 남아있었던 이유 오만가지가 떠오른다.
용기 없는 내가 가장 쉽게 숨을 수 있는 핑계인 기승전돈돈을 시전한다. 그때 빚을 갚지 말고 주식을 샀어야 했다는 후회부터, 1년 넘게 돌려받지 못한 채권이 떠올라 원망스럽고, 내가 사업을 하려면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등등이 도돌이표를 달고 머릿속을 뱅글거린다.
답 없는 고민을 계속하니 짜증이 난다. 잠도 오지 않는다. 밤새 뒤척거리다가 출근을 위해 아침 6시에 눈을 뜬다. 수면시간이 부족하니 컨디션이 엉망이다.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는 민원인들의 말을 듣는 게 힘들다. 오늘도 민원인은 내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국민의 요구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냐며 소리를 지른다. 국민의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기관에서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민원인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모든 행정을 알고 알지 못하고 본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며 나를 한순간에 능력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비하와 무시, 국민을 위하지 않는다며 대통령에게 직접 너를 신고할 거라는 협박,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하냐는 하소연, 나라꼴 잘 돌아간다는 비아냥, 아가씨 말고 위에 남자 바꾸라는 성차별적인 발언들이 오늘도 돌아가며 나에게 쏟아진다.
똑같은 내용으로 7번째 전화를 한 민원인에게 지난달에도 같은 내용으로 통화했음을 알리자 갑자기 쌍욕을 한다. 나도 같이 쌍욕을 해주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욕설하셨으니 통화를 종료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민원인이 전화를 끊기 전에 내가 먼저 종료버튼을 누른다.
민원인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2700건의 전화를 받으며 어느 정도 대처 스킬을 익혀서 데미지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 업무강도로만 따지면 연구원이나 활동가를 할 때보다 훨씬 널널하다. 내가 꿈꾸던 일과 삶이 분리된 직업, 머리를 쓰지 않고 일하는 단순노동에 가까운 업무, 5시 칼퇴근과 워라밸은 그동안 내가 일했던 그 어느 곳보다도 확실하게 보장된다.
이 생활을 나쁘지는 않지만 오래 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4개월 계약직으로 이 일을 시작했던 이유는 실업급여 때문이었고, 어쩌다 보니 계약을 4개월 연장해서 일하고 있지만 이번 계약기간이 다 하면 추가 연장은 없다고 다짐한다.
화풀이 대상을 찾아서
사장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처럼 '남편놈은 왜 돈을 벌지 않고 몇 년째 집에서 놀고 있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로 귀결된다.
억울하다. 화가 난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남편놈의 방에 쳐들어간다. 고민의 원흉은 세상 해맑다. 한쪽 모니터에서는 이세계아이돌 방송, 한쪽 모니터로에서는 게임 화면이 보인다. 나는 빡치는데 너는 행복해? 더 화가 난다.
남편놈에게 시비를 건다. 책상에 왜 음료수 캔을 두냐, 방이 너무 더럽다, 이거 치워라, 왜 집안일을 나만하냐, 건강 생각해서 운동도 좀 해라 등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지적한다. 남편놈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래그래. 나중에 할게'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답한다.
나만 세상 찌질한 시비쟁이가 된 것 같다. 화가 더 난다. 남편에게 지금 당장 움직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제서야 남편놈은 일어나서 내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가슴팍에 내 얼굴을 끌어안고 토닥토닥을 시작한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니 남편놈이 즐거워한다. 나는 화가 더 난다.
다정한 척 안아주는 것도 싫고, 우쭈쭈 하며 내 짜증을 받아넘기는 것도 싫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과자를 꺼내는 행동도 싫고, 요즘 유산소 운동을 덜해서 그런거다, 호르몬 탓이다, 잠 잘 시간이다 등등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그의 답변도 싫다.
"나는 네가 돈을 벌어오지 않아서 화가 나는 거라고!! 왜 나만 일해!! 왜 나만 돈 걱정해야 해!!"
소리를 빽 지른다.
'그래 내가 돈 벌어올게. 너는 돈 생각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좀 쉬어.'라고 말하라고 답을 알려줘도 능구렁이 같은 남편놈은 절대 그 말을 하지 않는다.
“너의 고민과 짜증을 내 탓으로 돌리지 마. 그건 네 것이야”
나의 온갖 신경질과 막말폭격 속에서 그는 본인이 일을 할 때도 나는 항상 짜증을 냈다며 선을 긋는다.
"그래 너 잘났다. 맨날 나만 모지리고 찌질이지."라고 빈정거리는 나에게 남편은 "어이구 이제 알아차렸어? 그러면 이제 고쳐볼까?"라며 허허 웃는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든 서러워서 꺽꺽 울어대든 그는 나에게 절대로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소리지르고 짜증내는 것이 정서적폭력에 해당한다며 앞으로는 자중하라고 말한다. 진짜로 나쁜놈이다.
마음의 단단함은 언제쯤 완성될까
남편은 상담심리사 자격증 소지자이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상담심리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5년째 주변 사람들의 온갖 구박과 핍박 속에서도 여전히 행복하게 놀고 있는 백수이다.
남편을 처음 만난 건 11년 전 소개팅이다. 그땐 남편이 막 일을 그만두고 백수 생활을 시작한 때였다. 나랑 관계 없는 사람일 때는 그가 돈을 벌건 까먹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놀만 하니까 놀겠지 싶었고 그의 자유를 응원하고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렇게 그는 3년쯤 놀면서 모아둔 돈이 다 떨어졌을 때쯤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가 백수로 놀던 3년간 나는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직장을 3번이나 바꾸는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았기에 그의 플랫한 인생이 너무 신기했다. 내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안정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일을 시작한 시점에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1년 연애 후 결혼식을 올리고 4개월 후에 그는 다시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백수로 9개월을 놀다가 주문진에 있는 대학교 상담실에 취업을 했다.
마치 ‘내가 일을 하면 네가 원하는데로 나랑 같이 있는건 불가능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2년 정도 주말부부로 지내고 그는 다시 백수가 되어서 서울로 돌아왔고 현재까지도 계속 백수이다.
그는 컴퓨터와 전기, 인터넷, 치킨만 있으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지 않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선 긋기가 아주 명확하다. 어려서부터 역사책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나와는 달리 허세도, 욕심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크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내심이 엄청나다.
분명 객관적으로는 내가 월급 받는 일을 하고, 내가 세대주이고, 집도 내 이름이고, 대출도 내 이름이고, 뭐든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이상하게 권력의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좋았다 싫었다 화났다 웃었다를 반복하며 싸움을 건다. 그는 이런 나의 지랄 맞음을 견디는 힘이 내가 아는 사람 중 단연 으뜸이다. 최근에는 지랄 맞음을 다루는 방법도 터득한 것 같다. 내가 뭘 생각하고 뭘 시도하건 번번이 그의 그래그래와 허허 웃음, 따뜻하고 말랑한 몸뚱이에 다 걸린다.
연애할 때부터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손오공이 된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그가 원하는 데로 흘러갔다. 생각해보니 세대주도, 대출도, 미래에대한 불안도 온통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주도적인 삶을 사는 여성의 모습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은 피곤함의 연속인 책임감이었다. 내가 스스로 둘러맨 책임감에 허덕일때 남편은 룰루랄라 백수의 행복한 삶을 즐긴다. 약 오르게.
지난 8년간 그 손바닥을 벗어나겠다고 버둥거렸지만 그 인내심과 단단함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매번 감정을 참지못하고 먼저 시비 걸고, 처맞고 깨갱한다.
이제 패배를 인정하고 그 인내심과 단단함을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 세대주를 넘겼고 호칭도 바꿨다.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의 상징이라 생각했던 ‘오빠’라는 호칭을 입 밖으로 꺼내는게 얼마나 큰 결심인지 그는 모를 것이다. 이제 불안도 넘기면 되는데 인내심이 바닥인 나에게는 이게 진짜 쉽지 않다. 인내심이 1에서 20이 될 정도의 엄청난 진전이 있었지만 100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나는 여전히 단단하지 않고 미래는 초조하고 불안하다. 인내심을 갖는 건 노력으로 잘 안되지만 올해는 버텨볼 거다.
“사장이 되면 진상들을 대면해야 하는데 넌 표정관리 잘 못하잖아. 전화로도 부들부들하는데 지금 직장을 더 다니면서 인내심 훈련을 하는 게 여러모로 더 나은 선택 같지 않아?”
남편이 또 사탄 같은 속삭임으로 나를 꼬신다. 정신차려야 한다. 이놈은 내가 집에 없는 시간을 즐기는 거다. 흥. 이번엔 네놈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불안하다고 월급쟁이로만 살지 않고 사장님이 되어서 돈을 벌어볼 거다.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