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사장님이 될 거야
지금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거의 매일 만나던 데이트로 내가 해야 할 일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 듣고 싶은 강의를 뒤로 미루는 게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결혼하면 이 문제가 다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잘 살 수 있을지, 나랑 잘 맞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를 고민하는 게 피곤하기도 했고.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은 나를 이렇게 설득했다.
"네가 나보다 더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생각해 봐. 네가 나를 만나기 전까지 몇 번의 연애를 했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어? 그걸 생각하면 나 정도에서 타협하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나도 나의 결혼 결심이 뜻밖이었다. 결심했으면 그 결심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전에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만들어야 한다. 연애를 하는지도 몰랐던 엄마에게 뜬금없이 전화해서 "엄마 나 결혼을 해야겠어."라고 말했다. 엄마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오랫동안 입에 달고 살던 딸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전화로 통보하듯 소식을 전한 상황에 엄마는 내가 혼전임신으로 결혼하는 게 아닌지 며칠을 걱정했다고 했다. 내가 아는 엄마는 걱정했으면 바로 서울에 올라왔을 텐데 걱정했다고 나중에 나에게 전해준 것을 보면 엄마에겐 걱정이 아니라 안도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즈음에 새해가 되었다. 결혼을 하는 해이니 뭔가 특별한 새해 이벤트 같은 게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돌이 집순이인 당시 남친과 나는 새해 일출을 보자는 이벤트를 만들었다. 당시 나는 마포구청 근처에 살고 있었고 집 근처 노을공원이 일출 명소라고 하니 거기를 가보기로 했다.
아침에 노을공원에 가는 마을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흠칫했다. 버스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직후에는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좁은 등산로는 사람들로 꽉 차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일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등산로가 아닌 곳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매우 가파른 곳이고 등산로 옆은 덤불이 우거진 곳이었다.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이 얼마나 강한지 사람들은 손발을 모두 사용해서 덤불숲을 오르기 시작했다. 앞사람이 오르다 미끄러지는데 뒤 따라오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 옆을 네 발로 기어올라간다. 등산로 옆으로 뻗어나가는 사람들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흡사 좀비 떼 같았다.
너무 놀랐지만 홀린 듯 우리도 그 사람들을 따라 네 발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뒤에는 우리 앞만큼 많은 이들이 전투적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을 봐도 무섭고, 뒤를 봐도 무서웠다. 새해 일출을 보는 게 좀비 아포칼립스를 찍는 이런 험난한 일일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출 시간은 점점 더 다가왔다. 꼭대기까지는 어림도 없었다. 억지로 조금 더 올라간다 해도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키가 작은 내가 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중간 어디에서 봐야 할지 고민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한 아주머니가 옆에 한 사람 설만큼의 자리를 만들어 주며 우리를 부르셨다.
"여기서 봐요. 내가 여기서 매년 보는데 여기도 괜찮아요."
우연히 만난 그 아주머니는 노을공원 일출 고인물이셨다. 그곳은 전망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멋진 곳이었다. 새해 첫날부터 귀인을 만났다. 시작이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아주머니에게 감사인사를 여러 번 전했다.
도심에서 보는 일출은 처음이라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바다의 일출과 다른 신묘한 느낌이 있었다. 귀농할 거라 입에 달고 사는 내가 서울남자를 만나 서울에 정착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백년해로까지 바라지도 않으니 결혼해서 사는 동안은 즐겁게, 재밌게, 건강하게 살기를 빌었다.
매년 1월 1일
함께 일출 보기
좀비 일출의 강렬한 기억을 양분 삼아 지금까지 매년 새해 첫날에는 일출을 보고 있다. 주문진 바다, 남산, 노들섬, 한강다리, 달맞이공원 등 해마다 다른 곳에서 새해 일출을 봤다. 게으른 남편은 매년 '올해는 가지 말자'며, 유튜브로 볼 수 있다고 나를 꼬신다. 31일 밤에 타종행사도 보게 하고, 오밤중에 케이크도 먹인다. 모두 아침에 못 일어나도록 하는 수작이다.
올해는 춥기도 오지게 춥다고 한다. 체감기온 영하 17도라고 한다. 재작년부터 함께 동행하던 동생은 추워서 못 가겠다고 한다. 남편은 이때다 싶은 듯 또 나를 꼬신다. 나는 패딩바지를 샀다. 강가 말고 너무 높은 산도 말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적당한 곳에서 보자고 타협했다.
집에서 일출을 40분 남기고 눈을 떴다. 평소 출근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일어난 시간임을 깨닫고 새삼 지금 내 직장이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매년 일출을 보러 갈 때만 쓰는 털모자를 꺼내고 장갑을 낀다. 내복을 입고 벌써 9년째 입는 털 추리닝을 입는다. 이제 털이 거의 죽어서 따뜻하지 않지만 난 어제 패딩 바지를 샀지. 넉넉한 바지 사이즈에 만족하며 양말도 2개를 껴 신었다. 매년 일출을 보러 갈 때 입는 초록 패딩은 이제 뚱뚱이가 되어서 옷을 많이 못 껴입으니 패스. 내복에 목티에 후리스 집업을 입고 까만색 패딩을 입었다. 너무 많이 입었나 싶지만 추운 것보단 나으니까.
남편을 깨운다. 가방에 무릎담요를 말아 넣고, 뜨거운 핫초코와 미지근한 생수를 텀블러에 담는다. 사탕과 초콜릿도 가방에 넣는다. 혹시 모르니 장갑이랑 양말도 하나씩 더 챙기고 내 안경도 잊지 않는다. 남편은 가까운 곳에 가는데 쓸데없이 짐만 많이 챙긴다고 궁시렁댄다. 결혼 첫해에 남산으로 일출을 보러 갈 때 고도비만인 남편이 눈뜨자마자 빈속에 계단을 오르다 저혈당으로 쓰러질 뻔했던 아찔한 경험을 한 후 매년 과하다 싶게 챙긴다. 호시탐탐 새해 일출보기 이벤트를 중단할 핑계를 찾는 남편에게 조금의 꼬투리도 잡히지 않도록 내가 더 움직인다.
초안산은 집에서 걸어서 20분.
일출이 잘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이었는데 가는 길에 만난 사람이 너무 적으니 시작부터 김이 빠진다. 추워도 전망이 훤한 곳으로 갔어야 했나 싶기도 했다. 남편과 노을공원 추억을 떠올리며 올해는 어떤 소원을 빌건지 이야기를 나눈다.
도심이고 강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더워서 양말도 하나 벗고 후리스도 벗었다. 진작에 벗었어야 했다. 홀가분해진 몸으로 다시 산을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정상 표지석을 만났다. 일출 시간이 되었는데 해가 떠오르지 않는다. 작년에는 구름이 꽉 껴서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 설마 오늘도 그러려나 싶어서 아쉬움이 커졌다. 정자에 앉아서 가방을 내려두고 핫초코를 꺼냈다. 몸이 뜨끈거려서 패딩을 벗었다. 그때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해 뜬다!"
앞에 큰 산이 있어서 늦게 올라왔나 보다. 나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빨갛고 말간 해가 떠올랐다. 여느 일출처럼 웅장하거나 기운찬 느낌은 적었지만 올해도 이렇게 첫날 첫 해를 만났다.
소원을 빌었다.
"올해도 남편과 행복하게, 즐겁게, 건강하게 지내도록 해주세요."
덧붙여서 작은 소원도 하나 더 빌었다.
"올해는 꼭 사장님이 될 거예요. 돈도 잘 벌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