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쓰자! 쓰다 보면 뭔가 보일 거야.

강제로 만든 마감과 선언

by 졸참

마흔의 진로탐색 고민을 함께 나누겠다는 큰 마음을 담은 첫 글을 쓴 지 벌써 11개월이 지났다.

첫 글을 쓰고 찌질한 나의 본질을 직접 마주하니 너무 쪽팔리고 꼴 보기 싫어서 글쓰기를 방치했다.



그 사이에 나는

주말을 통으로 쏟아야 하는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고,

챗 GPT와 함께 이력서를 쓰며 제일 훌륭한 인재, 그곳이 원하는 인재는 너 하나야라는 AI 식 가스라이팅에 취해 있다가 서류 광탈에 멘탈 바사삭을 경험하고,

정부 지원금 받고 취업용 자격증을 따겠다고 5:1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한 번에 자격증 두 개 하는 건 힘들지 않고 오히려 유사 분야니 더 잘할 수 있지 않겠냐는 치기 어린 답변에 또 광탈을 경험하고,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잡고 이 기회에 살이나 빼야겠다며 비싼 스위치온 쉐이크를 사고 호기롭게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가 지금이 아니면 먹지 못할 앵두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서 GG.

시간이 많으니 운동이나 열심히 하자고 복싱장을 매일 나갔다. 부족한 왼쪽 팔 근력을 올리겠다고 신나게 샌드백을 때리다가 어깨 관절이 물이 차고 회전근계 파열이라는 부상을 입어 아직까지 치료 중이다.

아주 가지가지로 버라이어티 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규칙적인 생활이 주는 안정감.
근데 이게 맞아?


뜻대로 되지 않는 미래를 계획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다가 6월 말, 만 마흔을 한 달 앞두고 취직을 했다.

시민단체에서 일할 때 감시 대상이었던 정부기관의 병가휴가자 대체로 4개월간 기간제 근로자가 되어 민원실 상담원이 되었다.


'고작 4개월짜리 뽑으면서 아침 10시에 세종까지 불러서 면접비도 안 주다니 진짜 짜다 짜!'라고 툴툴거렸지만 잘 아는 분야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4개월간 돈 받으며 새로운 경험을 한 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업무 성과를 평가하지도, 협업을 하지도, 보고서를 쓰지도 않는 이 삶은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직장 생활이다.

생각 없이 출근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필요한 말을 한 뒤 퇴근 시간이 되면 1초의 지체도 없이 칼같이 사무실을 나선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워라밸이 생긴다.

퇴근과 동시에 업무가 종료되니 머리가, 마음이 쉰다.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지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하지도, 더 열심히 하려 노력하지도, 더 발전하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노력하는 게 오히려 동료에게 민폐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웹툰을 보고, 뜨개질을 하고, 자격증 시험공부를 한다.

매일 점심마다 입주 근로자를 위한 운동센터에서 트레이너와 무료 그룹운동을 하고, 구내식당에서 5천 원짜리 밥을 먹는다.

처음엔 어색하고 불안했던 여유가 점점 익숙해진다.

4개월만 하려던 이 일은 휴직자의 휴직 연장으로 내년 4월까지 6개월 계약 연장을 제안받았다.


편하고 안정감 있어서 좋은데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이렇게 사는 삶에 대한 물음표가 있다.

공공기관의 민원인을 대하는 이 일이 힘들지 않은 건 끝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일단 2월 말까지, 봄이 오기 전까지만 이 일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일단 쓰자. 쓰다 보면 명확해질 거야.


못 견디게 싫은 것이 없는 일이고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왜 나는 싫을까? 왜 더 길게 하고 싶지 않을까?


이번에야말로 싫어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선택 말고, 우연히 만나는 일 말고, 어쩌다 하게 된 지금 같은 일 말고.

진. 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갖길 원한다.


지난 1월처럼 고민하다가 도망가지 않도록 글쓰기 모임에 돈을 냈다.

반 강제로 마감을 만들었다.

주 1회, 앞으로 10주간 나는 매주 내 고민을 담은 글을 쓸 것이다.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며 나의 성급함과 경솔함을 반성한다.


나름의 목표를 잡고 거창한 마음으로 브런치를 시작했지만 첫 글을 다시 읽으며 내 찌질함과 내 배부른 고민을 다시금 마주하는 이 시간이 즐겁지 않다.


자격증 시험도 끝나고 이제야 겨우 저녁과 주말에 여유가 생겼는데 고새를 못 참고 또 일을 벌인 걸 보면 나는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이것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겠지??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

억지로 자존감을 +1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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