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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Sep 16. 2019

나에게 서핑이란?

9월 양양살이 - 1주 차 

1.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마시기는 내 대학 4년 목표 중 하나였다. 현대인은 아침을 깨우는 커피 한 잔 없이 이륙할 수 없고 밤을 재우는 와인 한 잔 없이 착륙할 수 없다던데(feat. 알랭 드 보통), 나는 커피와도 와인과도 어울리질 못했다. 특히 아메리카노는 너무 썼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해 질 녘까지 파도를 타고 돌아와 빈속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역사적인 아아 한잔


촥- 캬, 하마터면 이 맛을 모르고 서른이 될 뻔했다!



2. 드라이빙

나는 운전 체력이 좋다. 작년에 포천 지역 영업관리자로 일하며 하루 서너 시간을 운전했다. 월급의 1/3을 운전하며 받은 셈이다. 그때 있는 대로 욕을 하며 차를 샀는데(아니 왜 회사일에 내 돈을 쓰게 하냐고!), 우리 떼떼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디지털 노마드나 9월 양양살이는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꿈꾸는 것, 그 꿈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회사원이던 시절, 양양 서핑샵과 서울 직장을 왔다 갔다 하며 일하는 쌤(주말엔 서핑 강습을 하신다)을 만났다.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자 "너도 이렇게 살 수 있어"라고 너무 쉽게 말씀해버리셨다. 아마 그 순간 결심했지 싶다. 그 결심을 이렇게 빨리 실천할 줄은 나도 몰랐지만.


다만 나 홀로 준형차를 끌고 다닌다는 게 에너지 낭비인 것 같아 카풀을 찾고 있다. 



3. 파도

백수는 야생이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다. 신석기 혁명 이전의 수렵 채집하는 원시인이다. 그래서 백수에게 '식사하셨어요?' 같은 한국 사회의 정형화된 질문은 통하지 않는다. 12시 땡 하면 밥 먹습니까?

나의 첫 직장생활이었던 인턴 시절, 어린아이에게 '몇 살이야?' 묻듯 '점심 뭐 먹었어요?'라고 다들 내게 물어왔다. 둘 다 별달리 할 말은 없지만 친근하게 안부는 묻고 싶을 때 던지는 질문일까 싶다.


파도는 갑옷이랄까, 가면이랄까, 내가 힘겨운 사회화 퀘스트를 거쳐 얻어낸 빛나는 아이템들을 다 벗겨버린다. 그 무거운 것들을 이고 지고 파도를 탈 수 없어 내 스스로 벗는 것일까 싶기도 한데, 아마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그렇게 맨몸으로 파도를 타다 서울로 돌아오면, 한국말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어벙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사회화 레벨 1부터 다시 시작이다. '점심 뭐 드셨어요?'부터 시작한다.



4. 무한동력

파도는 먼 바다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해수면 위에 만들어 낸 잔물결들의 중첩이다. 뜨거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가 아래로 가라앉는 대기의 순환으로 편서풍이나 계절풍 같은 바람이 만들어지고, 지구 중력장 속 바닷물을 달의 중력이 잡아당기면서 만조와 간조가 생긴다. 해와 달의 인력, 지구의 자전이 바닷물에 끼치는 원심력, 이런 무한한 힘들이 파도를 만들어낸다. 

파도는 끝없이 밀려오지만, 신기하게 똑같은 파도는 하나도 없다. 서핑의 매력이다. 무한동력을 타고 논다는, 나의 유희는 영원하다는 짜릿함이 있다.



5. 변화

바다는 변화무쌍하다. 바다에 종속된 파도도 예측불허다. 내일의 파도 차트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다음 날 일어나 눈 비비며 발코니에 뛰어올라 봐야만 그 날의 파도를 알 수 있다. 그 날의 파도도 시시각각이다. 

바다가 고요한 날, 장판도 이런 장판이 없어 이게 호수인지 저수지인지 헷갈리는 날도 있었다. 그다음 날은 집채만 한 파도가 사정 없이 몰아쳐서, 서울서 온 친구가 두 번의 입수 시도 끝에 서핑을 버리고 '멀찍이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파도가 휘몰아치지 않을 때, 파도가 비교적 잠잠한 곳을 찾아 패들 해서 물결을 거슬러야 한다. 그렇게 힘을 아껴 바다로 나아가야 힘껏 파도를 잡아탈 수 있다. 비슷하게, 일이 없다고 빈둥빈둥하다가는 파도가 휘몰아칠 때 휩쓸려 날아갈 수 있다. 내 나이 29, 파도에 싸대기 맞고 풀썩 날아가기에 이렇게 적당한 때도 없다. 보드도 나와 반대 방향으로 저만치 날아간다. 으어푸으어푸!

좋은 파도는 서퍼의 행운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행운이란 불행을 안겨 주나 보다. 로또 맞은 사람 대부분이 파산하듯이 말이다.

파도도 타고 싶고 일도 하고 싶고, 디지털 노마드로 살기 위해서는 미리 패들을 땡겨놔야 한다.



6. 자연

바다를 떠다니다 보면 대자연의 무자비함을 느낄 수 있다. 선악과는 인간이, 혹은 어쩌면 신이 만들었을 뿐, 자연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포악하지도 않다. 

서핑은 자연과 하나 되는 물아의 순간이라고들 한다. 나는 아직 쪼렙이라 그런 건 느껴보지 못했다. 서핑은 라이프스타일이라고도 하던데, 확실히 플라스틱 사용은 줄이게 된다. 2030에는 바닷속 물고기보다 바다 위 플라스틱이 더 많아진다던데, 정말 최악이다.

영화 그래비티를 보며 '우주먼지로서의 나'의 존재감을 새삼 확인하는 것처럼, 자연에게 바닷속 물고기와 내가 무차별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 ㄴ도 ㄷ도 알지 못해도, 천지불인(天地不仁), 바다는 언제든 나를 감쪽같이 삼켜버릴 수 있다는 건 잘 느낄 수 있다.



7. 흑수

졸라 탄다. 광노화 무섭다.

무릇 백수()란 궂은 밭일과 논일을 대신할 노비를 거느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허연 손의 지위겠으나, 나는 그런 건 없고 그저 거뭇하게 그을렸다. 그래서 백수는 못 되고 흑수가 되었다.


흑수의 시간은 빨리 간다. 흑수 3개월 차, 움켜쥘수록 빠르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이 아쉽다.

직장인은 월급날을 기다리는가? 콘크리트 더미 안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손이 희다.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퇴근을 기다린다.

아니? 내 인생이 빨리 지나길 기다린다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금보다 귀하다는 시간을, 인피니티 스톤이 있어야만 되돌릴 수 있다는 시간을!

벌써 9월의 반이 지났다. 아니다,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



8. 라니카이(Lanikai)

천국의 해변, 라니카이라는 이름의 서핑샵에서 한 달 동안 지내기로 했다. 공간이란 커뮤니티를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좋다. 그래서 더 좋은 사람들이 더 모여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트코인 결제가 가능합니다!!!!!(중략)!!!!! YES SURF YES LIFE!!!!!(후략) 펀디엑스 가즈아!!!(중략)!!! 


어찌 되었건 양양군 남애리, 천국의 해변으로 놀러 오라는 초대다.



9. 낭만

낭만(浪漫), 물결 랑에 찰 만을 쓰는 낭만은 서핑과 잘 어울린다. 라인업에 나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모두 파도를 낚는 낚시꾼이다. 내 파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비라도 온다 치면 마음속에도 물결이 일렁인다. 해수면을 향해 자유 낙하하는 빗방울이 장관이다. 막상 뛰어드니 바닷물이 짜기는 짰는지 수면을 도움닫기해서 탓! 튕겨 오른다. 팝팝팝! 하고 물방울 팝콘 튀기는 소리도 난다. 

해라도 진다 치면, 붉은색 형광 도료를 바케스 통째로 쏟아버린 것 같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도 않고 그림 같이 걸려 있다. 보드 위에 드러누워 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는 하루의 마무리가 된다.

9월 양양군 남애리 해 질 녘 파도가 좋다. 하늘에 불이 다 꺼지고 땅 위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파도를 탄다. 퇴근 파도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퇴근길이 아쉽다. 이렇게 몰입할 일을 찾아 낭만워커홀릭이 되야겠다.



10. 현실

백수 예찬은 무책임하니까 현실적인 얘기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백수는 불안하다. 

하지만 미래는 원래 불안하니까요! 결론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실험하는 것이 기업가 정신 (feat. 피터 틸)이라던데, 백수가 천직인 나는 천상 경영학도인가 보다. 무책임한 경영학도는 자라서 백수가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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