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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Mar 04. 2019

영업(관리)란 무엇인가?

20190303, 삼일절 100주년 연휴 마지막 날

1. "가진 게 사람밖에 없어!"  

예능판 만큼이나 캐릭터 잡는 게 중요한 직장 생활, 나의 첫 직장 대리님 캐릭터는 '거지'였다. 그래서 "아 나는 돈이 없어, 가진 게 사람밖에 없어!" 라고 하셨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영업통'으로 전략기획팀에 합류한 분이었다. 영업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첫 직장은 무조건 영업으로 가겠다고 다짐했다.


2. 식은 죽 먹기

식은 죽을 뜨겁게 먹는 건 볼썽사납다. 지레짐작으로 입술을 모아 호호 불어 삼키는데, 수저도 죽도 냉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혀를 데이고 싶진 않다. 입천장은 더욱 소중하다. 복구하는 데 삼일은 족히 걸린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죽 한 사발의 온도를 알 수 없을 때, 나는 어떻게 그 죽을 퍼먹을 것인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퍼줄 것인가? 누군가 날 먹여준다면?

영업이란 무엇인가? 식은 죽 먹기라는 마음가짐으로 총알도 없이 전장에 뛰어드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비이성적인 판단인 "돌격 앞으로!"를 시전하는 것이다. 노력이 더해질수록 실망만 커지리라는 걸 알면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치고, 내가 노력하는 모습이 비치고, 그사이 연민의 빛이 스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쓰다 보니 쓸데없이 장렬해져서 밝히자면, 나는 영업을 하지 않았다.


3. 식은 디저트 먹기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 유명한 김영민 교수님께서는 지난 구정, 소주 말고 디저트를 권하셨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권력 관계를 확인하려 하지 말고, 다 같이 즐겁게 음미할 수 있는 디저트를 먹자는 것이었다. 알코올성 치매가 제일 두려운 내게 필요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영업 현장에서 술 대신 디저트를 권하면 어떨까?

정리하자면, 나는 '영업'을 하지는 않았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가맹점을 관리하는 '영업 관리'자였다. 목 뒤의 칼날처럼 서늘한 '목표 매출액'을 항상 유념하며 '성냥 사세요' 해야 하는 진짜 영업 사원들이 본다면, 나는 아마 '박카스 영업', 혹은 식은 죽의 뜨거움을 모르는 아이라고 귀여워 해 줄 것이다. 나는 "점주님~~~"들과 식은 디저트를 먹으며 영업을 했다. 마치 20년차 영업왕 회고록같이 쓰겠지만, 사실은 15개월 일했던 잔잔바리의 체험학습일기에 가깝다.


4. 냉정과 열정 사이  

오해부터 풀고 가자면, 본사 직원이라고 해서 편의점 '영업 사원'들이 '점주'에게 갑질하진 않는다. 정 반대다. 근래 미디어에 쏟아져 나왔던 편의점 본사의 갑질 스토리에 얼마나 공감하는지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가을 백수 일기 참고), 법인과 개인의 싸움에서 경기장이 기울어 있듯, 영업사원과 가맹점주의 콜로세움 또한 기울어져 있다. 편의점인 만큼 '올 때 메로나'는 없지만(가서 사드리면 된다),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의료 기기 영업 사원, 의사 대리 집도' 뉴스는 내게 뉴스가 아니었다.

영업 관리는 현장과 본사의 간극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본사 차원에서 가심비니, 고객 체류 시간이니, 지역 거점 점포니, 포스트 편도족이니 등등을 위해 전국 CU에 '와인'을 도입하려 한다(본사 MD들이 스페인이니 나파밸리니 발로 뛰며 편의점에 적당한 와인도 공수해왔다). 장기적으로 편의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하지만 점주님들이 가장 많이 치는 대사는 '그거 우리 점포에선 안돼'다. 맞는 말이다. 포천 지역 점포들은 대다수가 로드사이드(차도에 휴게소처럼 덩그러니 있는 입지, 손님당 단가가 높고 월세도 낮아 개인적으로 주택가 입지보다 낫다고 생각한다)이고, 중장년 남성 고객층이 두텁다.  

재밌는 건, 로드사이드건 공장 지대건 막상 와인을 깔아 놓으면 솔찬히 팔린다. 아무래도 유통업이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도 있고, 이게 여기서 먹힐지는 유사 입지 데이터를 참고한들 (데이터 클리닝 작업이 빠져서 그런가?) 직접 해 봐야 아는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예상외로 매출이 잘 나와 공장 지대 점포에 진열대까지 추가해 가며 '와인 Zone'을 따로 꾸몄었다.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그렇게 와인을 찾으신다고.


5. 여담을 빼는 게 제일 어렵다  

여담이지만, 항상 빼는 게 어렵다. 오프라인 유통업에서 가장 한정된 자원은 점포 공간이다. 와인을 새로 들이면, 뭘 빼야 하지? 벽면 진열대니 (높이)연장 진열대니 밴드 붙이듯 본래 레이아웃에 덕지덕지 덧붙이다 보면 동네 슈퍼(편의점 관리 못 한다고 혼날 때 항상 비유되는 존재. "여기가 동네 슈퍼야!?") 꼴을 면치 못한다. 매출 비중/구매 빈도순으로 재고를 날리자니, 딱풀 없는 편의점이 될 순 없지 않은가. 건전지 같은 잡동사니들은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진열대 효율 분석 종종 해줘야 한다.

여담이지만 분석 결과 형광펜 쳐서 갖다 드려도 점주님은 꿈쩍 안 하신다. 거기서부터 영업 사원의 일이 시작된다. 그래서 난 AI가 아무리 판을 쳐도 쁘띠브루주아를 상대하는 영업 관리직은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여담이었다.


또 여담이지만, 밴드 덕지덕지 붙은 장기 운영 점포들은 개점일 등 특별한 날을 맞아 '리뉴얼' 되는데, 예산을 왕창 쏟아 점포를 갈아엎어 재탄생 시킨다. 이게 본부 예산 사용의 우선순위고, 그래서 평소에 점주님들께 멋지게 한턱 쏘기는 쉽지 않다. (총알이 많으면 영업은 어렵지 않다 - 점주님! 아 제가 이번에 미니 냉동고 하나 넣어 드릴게요! 대신 신상품 발주 좀 빵빵하게 넣어 주세요, 아핫핫하!)


마지막 여담인데, 미운 정이 무섭다고,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털양말을 싸 들고 퇴사하고 처음 포천 점주님들을 찾았다. 겨울철 편의점은 몸도 마음도 추운 곳이지만, 개중에 발이 가장 시리다. 오랜만에 만난 한 점주님과 점포 청소를 했다. 다른 점주님과는 포목소 같은 곳에서 산 두꺼운 투명 비닐을 점포 밖 테라스에 기둥을 세우고 덮어씌웠다. 비닐하우스다. 안에 전등과 전열 기구를 넣어 놓으면 겨울철에도 종종 손님들이 찾아든다. 본사가 예산이 없어 점포 앞에 펼칠 투명 몽골 텐트를 지원해 줄 수 없다면, 영업 사원이 투명 비닐을 펼쳐 몸으로 때우면 된다.


6. 영끌

SC들이 영혼까지 끌어올려 와인 도입률을 끌어올려도 일반 소비자들은 '어 요즘 편의점에서도 와인 파네?'라고 느낄까 말까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CU라는 브랜드가 소비자의 머릿속에 어떤 기대를 심어줄 것인가, 그리고 개별 점포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어떻게 그 기대를 충족시킬 것인가'를 고민할 때, 전제는 '점주님이 "그거 우리 점포에선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다. 전국 4만여 편의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다(일본 편의점 그대로 베끼면 된다). 하지만 점주님 한 분 한 분은 자영업자다. 당장 이번 달 아이 학원비를 걱정하는 생계형 편의점주에게 '장기적 방향성' 같은 얼토당토않은 설득을, 물론 그 단어를 쓸 정도로 생존 본능이 떨어지는 SC는 없겠지만, 펼치는 게 영업 관리자다.


7. 51:49, 트럼프:김정은

당시 포천/철원 지역 편의점 백여 개를 담당하던 나의 팀장님은 워커홀릭으로 악명이 높은 분이셨다. 덕분에 배울 점이 많아 좋았다. 옆에 있는 GS25 많이 가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한 번은 "팀장님, 영업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봤는데, 당신은 항상 10을 다 주려고 했다고 답변하셨다. SC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 얼굴 비추면서 이것저것 해달라는 것만 많다고, 자신은 1도 요구하지 않고 점주님이 해달라는 10을 다 해줬다고. 그러고 나면 나중에 SC가 요구하지 않아도 점주는 이미 승낙이라고.

트럼프 vs 김정은 세기의 대결처럼, 협상이라는 게 일견 누가 100을 가져가고 누가 0을 가져가느냐 하는 싸움처럼 보이겠지만, 많은 경우 사실은 51:49의 싸움이라고 한다.

영업부가 와인 다음으로 '완구'에 꽂힌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완구 도입은 너무 어려웠다("그거 우리 점포에선 안돼." 근데 내가 봐도 안될 것 같았다). 팀 선배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다.

"디지털노마드씨"

"네"

"엄마 같은 점주 있죠"

"네"

"한 번만 살려달라고 하세요"

"네"


8. 머신 러닝

지난주 가진 게 사람밖에 없다는 그 선배를 만났다. 만나면 영업이 뭐냐고 물어보려 했건만 두시간 동안 머신 러닝 얘기만 하다 왔다. 주변 모든 게 디지털화되고, 인간은 감당할 수 없게 데이터가 쌓이면,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조차 AI 쓰앵님의 코디가 필수적이겠지. 사장님, AI를 회사로 들이셔야 합니다!  

얼마 전에도 아는 동생이 마케팅 쪽으로 대학원 간다고 해서 풉! 했는데 퀀트 마케팅이니까 웃지 말라고 해서 바로 사과했다(알립니다. 마케팅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 우리 둘의 관계가 본래 서로 무시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아서 사과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차피 주어진 데이터를 모두 고려한 의사 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관/추론(Heuristics)을 기르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라면, 앞으로는 퀀트 AI 봇이 영업과 마케팅과 직관을 맛있게 요리해 예쁘게 플레이팅해서 서빙해 줄 모양이다.


9. VOC, Voice of Customer

CU를 나오면서, 담당했던 점주님들을 한 분씩 인터뷰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회사 사람이 아니니, 솔직히 말해 달라고. 영업 사원에게 어떤 걸 기대하느냐고. 영업 사원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처음부터 궁금했다고(근데 그걸 왜 마지막에 가서 물었는지). 의외로 대답들이 수렴했다. 점포에 신선함을 불어 넣어 주는 사람. 자신은 온종일 점포에서 같은 일을 하니 외부 트렌드에 둔감해진다고, 우리 점포가 고인 물이 되지 않게 SC가 새로운 시도 많이 해 달라고. 혹은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 채널.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 제안해주기. 번외로 '유도리'와 '점주와 놀아주기'도 있었다.

평소 점주님들의 요구사항('내가 깜빡한 내 비밀번호 너가 뭔지 알아내주기' 가 문득 떠오른다)을 고려해봤을 때, 괴랄한 답변들 뿐일 것이라고 지레짐작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합당한 답변들이라니. 과연 나는 내 업무 시간의 몇 프로를 그들이 진정 원하는,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하며 보냈을까? 본사 영업 사원은 최종소비자, 즉 편의점 손님의 목소리를 점포에 반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첫 번째 손님인 점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나 보다.


10. 무자본 창업

요즘 주변 친구들에게 바람을 훅훅 넣고 있다. 돈 좀 모아 보자고 같이 뭐 하나 해보자고. 매장 관리 하나는 내가 기깔나게 해 주겠다고. 그런데 정작 내가 돈이 없어 무자본 창업을 고민 중이다.

그래서 찾은 것이 1) 1달에 글 한 편 쓰기, 2) 2주에 한 번 유튜브 올리기. 수익화의 행방은 묘연하다. 게다가 글은 지금처럼 근본 없이 써나간다 해도 유튜브는 좀 더 뾰족해야 할 텐데, 내가 낸 아이디어에 대한 피드백은 죄다 '핵노잼'. 좋은 생각 있으면 소개시켜줘.

일단은 '눈높이 교육' 컨셉으로 주변 공대 대학원생들로부터 전공 필수 수업을 5분 컷으로 줄인 강의를 시리즈로 짜낼 예정이다. 얼마 전에 딥러닝 석박사생과 맥주를 마시다 냅킨을 칠판 삼아 ‘자 내가 한 학기 강의를 5분만에 끝내줄께’를 들었는데, 그대로 녹화해 올려도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 이게 그 핵노잼 아이디어다. 피벗이 시급한데, 좋은 생각 있으면 소개시켜줘.


아무튼 그래서 한 달이 너무 빨리 지나갔고, 블록체인은 준비가 안 되어, 이렇게 쉽게 쓴 글을 게시한다. 대학 시절 마지막 글쓰기 교수님께서는 내게 '꾹꾹 눌러 담아 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진눈깨비도 아니고 글이 이렇게 흩날려서야.


번외) 여담을 빼는 게 제일 어렵다2

CU를 그만두고 한 인테리어 스타트업(먹방은 질리니까 조만간 인테리어로 넘어가겠지, 의식주 순서겠지 했는데 아직도 먹방이 한창이다)의 '커피 면접'에 갔었다. 서로 잘 아는 척하지 말고 가볍게 커피 한잔해요~ 라는 말에 끌렸다. 무소속의 자연인답게 아무 가면도 쓰지 않고 털레털레 갔더니, 그 성격에 영업 어떻게 했냐고 질문이 들어왔다. 당연히 지금과는 다른 표정과 말투와 억양과 목소리 톤으로 했다고 했더니 화들짝 놀라며 왜 지금은 그렇게 안 하냐고 다시 질문이 들어왔다. "당신은 제 고객이 아니니까요" 라고 답변..하진 않았다.

돌이켜보면, 점포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항상 안면 근육 스트레칭을 먼저 했다. 영업용 미소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하긴 꼭 손님이 아니더라도 누가 찌푸린 얼굴을 좋아하겠는가? 앞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방긋방긋 웃어줘야겠다. 특히 그 퀀트 마케팅 후배에게.


번외+a) 여담을 빼는 게 제일 어렵다22

영업직 신입 사원 면접에 우수수 떨어지며, 사이사이 시중에 나온 영업 관련 서적은 다 읽어본 것 같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거울을 보니 내가 봐도 좀 영업 못 하게 생기긴 했다) 내 머리가 휘발성 강한 메모리(껐다 켜면/자다 깨면 다 날아간다. RAM이 따로 없다)라서 그런지, 기억 나는 내용이 없다.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말고 시스템으로, 숫자로 승부하라는 게 주요 골자였던 것 같다. 웰컴 투 퀀트 영업.



인포그래픽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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