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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Jun 20. 2024

나는 너의 퇴사를 바란다

NSFW - 안놀면 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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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옥상에는 

‘하늘 정원’이라고 불리는 작은 뜰이 있었다. 그곳은 사립학교였는데 인근 공립보다 대입 실적이 좋지 않았다. 그게 콤플렉스였는지 아이들을 쥐 잡듯 잡았다. 복도에는 전교 1등부터 100등까지의 모의고사 점수가 걸려있었다. 전교생은 500명이었다. 3년 동안 우리는 오징어 게임을 했다. 나는 아파하는 친구를 양호실에 데려다주는 시간이 아까웠다. 혼자 걸을 수 있잖아?

하늘 정원의 꽃들은 가꿔지지는 않았고,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일 때쯤 새로운 꽃이 심겨 있었다. 학교는 학생을 대하길 꽃과 같이 했다. 무정한 곳이었다.


목표로 하던 대학에 합격하고 하늘 정원에 올랐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고, 남들은 내 인생이 성공한 것을 축하해 줬다. 합격 발표 이후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에는 부러움, 시기, 질투 같은 것들이 지나갔다. 감정이 없는 쪽은 나였다. 이상하네. 아드레날린이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라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안도감 같은 거라도 스쳐 지나야 하지 않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게 허무()일까?


허전함 뿐이었다면 '승자의 여유'쯤에서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생 처음 느껴보는 끝없는 막막함에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옥상에 서서 저 멀리 뿌연 비닐하우스들을 보며 생각했다. 앞만 보고 달리도록 조련한 경주마를 망망대해 한가운데 떨어뜨리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학창 시절 내내 나를 짓눌렀던 ‘좋은 대학’에 대한 압박이 사라졌는데,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환희가 아니었다. 허무함. 막막함. 그때 그 옥상에서 시작한 방황을 나는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대학에서 배운 경영학과 전공 수업 중에 

‘기업 턴어라운드’에 대한 수업이 있었다. 당근에서 싸게 산 낡은 자전거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서 비싸게 재당근하는 것처럼, 망해가는 기업을 사서 '턴어라운드' 시켜 비싸게 되파는 방법을 배웠다. 어느 날 교수님이 대뜸 ‘카탈로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카탈로그? 팜플렛 종이 쪼가리? 학생들이 어버버 거리자 교수님은 '선택지를 제한해서 수요를 수렴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18세기 산업 혁명과 대량 생산이라는 축복, 그 눈부심 아래에서 '내 몸에 꼭 맞는 기성복'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 집에서 기운 누더기보다 더 저렴하고 더 때깔 좋은 레디메이드의 세례. 그러니까 내가 제시하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끝없이 펼쳐진 마트 선반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라면 봉다리. 그 수십, 수백 개의 선택지 중에 나를 위한 것, 내가 원하는 건 없을지 모른다.




일하기 싫어. 

서른 중반의 직장인이라면 아마 천만번쯤 뱉었을 말이다. 일하기 싫어. 회사 가기 싫어. 퇴근 퇴사 퇴근 퇴사 염불을 왼다.

왜 일하기가 싫은가?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내거나 일을 맛있게 먹기 위해 끼얹는 별첨 스프로 보낸다. 일하기 싫다는 말은 깨어있기 싫다는 말인가? 


주어진 길 안에서 고르다 보니 나라는 사람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 같지만, 

운명의 여신이 점지해 준 찬란한 길을 사박사박 즈려밟는 것 같지만, 사실은 괴롭기 그지없는 수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지난하고 둔탁하고 느릿느릿한 변화였다. 깨달음은 먼 길을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의 옷을 직접 지어 입는 것이 두렵다. 나는 성취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성취라는 것에는 사회적 선망이 짙게 배어있기 때문에,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일에 진심을 쏟는다는 것이, 광택이 흐르는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얼기설기 손수 기운 옷을 걸친다는 것이 외롭고 무섭다.



그래서 나는 너의 퇴사를 바란다 

NFA. 가치라는 건 주변 사람들이 인정 속에서만 태어나기 때문에. (아니라고 우겨도 봤지만 우울해질 뿐이었다)

나를 위한 맞춤복이라고 생각했던 '테크'와 '스타트업'은 새로 나온 기성품이었을 뿐, 자고로 '프레스티지' 한복판에 있는 곳이었다. 프리랜서와 1인 기업 CEO는 무엇이 다른가? 말장난일 뿐이다. 하지만 스타트업 커뮤니티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 한 몸 먹고사니즘 해결하기는 만으로는 안되며, 최대한 많은 돈을 끌어다가 최대한 사세를 키워, J 커브도 그리고 MOU도 맺고 대표님 소리도 듣고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같이 옷 지어 입을 사람들을 찾고 있다.



일이란 무엇인가?

친구 집에 얹혀사는, 수입이 끊긴 지 오래인 백수 주제에, 귀를 즐겁게 하는 재즈가 나오는 카페를 찾아와 가장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차지하고 타닥타닥 글을 짓는다.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길에 나를 만나러 와주는 쩐주 애인에게 '나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일이란 무엇인가? 나에겐 종합 선물 세트와 같아서, 기쁨, 재미, 보람, 성취감, 신뢰 관계 등등 인생의 의미를 일에서 찾고 있다. 물론 돈벌이도 돼야 한다! 

백화점 카탈로그에 나를 위한 일이 있을 리가.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따먹은 선악과는

사실 ‘시간 사과’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미래를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래의 뒷면인 '불확실성'을 마주한 순간, 우리 안의 불안함이 길길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이 사나운 괴수를 제압하기 위해 치르지 못할 대가는 없다. 나의 천부적 자유를 팔아넘기고, 대부분의 시간을 콘크리트 상자 안에서 잠든 듯 지내기로 한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나는 너무 원하지만 할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는 것. 이생망 자유를 팔아넘긴 지 오래고 이를 되찾아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뭐하지?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나에 대해 더 많이 안다는 것이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서워하는지, 뿌듯해하는지, 그래서 이제야 조금씩 '이제 뭐 하지?'라는 오랜 질문에 대답해 볼 수 있게 됐다. 


글 쓰고, 팟캐스트 하고, ????? 해서 돈 벌고, 그리고...


안놀면 뭐하니?


2010년 3월의 하늘 정원 뷰. 카카오맵 로드뷰 아카이브
최근 모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발렸다. 네이버맵 로드뷰




쿠키 문장: 팟캐스트 관심 있으신 분, ????? 에 뭐가 들어가면 좋을지 추천해주실 분 찾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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