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부요한 여행

by 이지나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관광지나 고급스러운 번화가 바로 옆에는 그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이기도 하고, 섭리이기도 하겠지. 우리가 그늘에 가리어진 사람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래서 그를 대신해 그들에게 손 내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셋이서 마닐라에 다녀왔다. 얼이는 두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었고, 셋이서 처음으로 가는 휴양지였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로비와 레스토랑을 연결하는 우아한 계단이 있고, 선베드가 총총 늘어선 야외 수영장 너머로 바다를 따라 야자수와 초록빛 산책로가 이어지는 곳이었다. 아침에 조식을 먹을 때는 넓은 레스토랑의 테이블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신문을 가져다주고,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선베드에 누워 쉬고 있으면 귀여운 하늘색 카트가 돌아다니면서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수영을 하고, 쇼핑을 다녀오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주어진 모든 것을 만끽하며 휴가 기간 내내 호사를 누렸다.

그런데 마닐라 여행 중 남편이 가장 즐거워 보였던 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인트라무로스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던 순간이었다. 인트라무로스는 옛 스페인 정복자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과 여러 건축물들을 볼 수 있는 유명 관광지다. 우리는 인트라무로스 주변을 걸으며 둘러보다가 자연스레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햇살이 뜨거운 조용한 한 낮이었다. 가게 사이로 집들이 있고, 거리에 놓인 테이블에서는 어느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강아지가 어울려 놀고 있다가, 담벼락이며 거리 풍경을 찍는 남편을 보더니 하나둘씩 주위로 모여들었다.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남편이 너희도 찍어줄까 하고 말을 건넸더니, 골목에 흩어져있던 아이들이 신이 나서 달려 나와 남편을 둘러싸고 어깨동무를 했다. 조용하던 골목은 이내 유쾌하게 시끌벅적해졌다. 지금은 아직 얼이가 어려서 잠시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여행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머물던 호텔에서는 생일파티가 있다며 아이들이 드레스를 입고 로비를 거니는데, 우리가 있던 곳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면 신발도 신지 않은 아이들이 거리에서 잠을 잤다. 인도 뭄바이의 타지마할 호텔에 갔을 때는 화장실에서 단정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물을 틀어주고 손을 다 씻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곱게 접힌 새하얗고 보송한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호텔로 가는 길에는 얼이 보다 어린아이들이 씻지도 않은 채 새카만 옷을 입고 동전을 바라며 손을 내밀었다. 이집트 카이로에는 쓰레기가 쌓여 산을 이룬 곳에 사람들이 산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거리로 달려 나와 손을 흔드는 그 마을의 아이들 앞에서 나는 악취로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평화로운 나라 중 하나인 스위스에서도 내가 지내던 곳에서 차로 조금만 가면 난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따금 장난감을 준비해서 아이들과 놀아주다 왔지만, 그 아이들이 그곳에 오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만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대학교를 휴학하고 캐나다에서 3개월,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3개월을 보내고 돌아왔다. 꼭 그때여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삶을 본격적으로 책임지기 전에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캐나다는 여유가 넘치고 풍요로웠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마트에만 가도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넉넉하게 쌓여있었다. 심지어 그 모든 것들이 비싸지도 않았다. 그러다 아프리카에 갔다. 1 달러면 망고와 파인애플을 혼자서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식빵은 얇아서 접시가 비쳐 보였다. 저녁에는 종종 정전이 되었다. 만나는 아이들은 거의 맨발이거나 타이어 고무를 잘라 만든 신발을 신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리에서도 음악이 흘러나오면 춤을 추었다. 나는 그 열기에 매료되었다. 풀 한 포기 길러내지 못하는 메마른 곳이라고 생각했던 그 땅의 모든 생명력과 생동감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나의 시선과 생각은 달라졌다. 세계에서 가장 부요한 나라 중 하나와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에서 보낸 시간은 내 삶의 진폭을 엄청나게 넓혀주었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 살고 있던 나를 산봉우리로, 골짜기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행할 때는 근사한 호텔이나 편안한 리조트에 머물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맛과 분위기를 누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재래시장과 헌책방에 가고 동네에 있는 작은 식당과 거리에서 군것질을 하는 것도 좋다. 넓은 여행도 좋지만, 깊은 여행도 필요하다. 햇살과 음영을 고루 보고 싶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다양함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에서 온다고 믿는다.

나의 이상형은 오래전부터 차갑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사람. 담담하게 삶을 관조할 줄 알면서도, 온기가 있는 다정한 사람. 관대하고 검소한 사람. 침착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 높은 곳에서도 낮은 곳에서도 한결같은 사람. 부에도, 가난에도 처할 줄 알고, 누릴 줄도, 나눌 줄도 아는 사람. 균형 잡힌 사람.

나는 나의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명품 가방을 선물하는 것을 기뻐하는 남자인 것도 좋지만, 우리가 가진 것이 없을 때 차가운 내 손을 감싸 쥐고 핫초코 한잔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매너 있게 에스코트해주는 사람이면서, 호치민 어느 작은 골목의 허름한 좌판에 마주 앉아 쌀국수를 후루룩 들이킬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예상치 않았던 상여금이 나왔던 달에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항공권을 예매하고, 인도 어느 도시의 아이들에게 책상과 걸상을 선물할 비용을 보냈다.

우리 삶에도 언제까지고 평탄한 날들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곤고하고, 어떤 날은 부요하고, 어느 날은 맑았다가 이내 흐리고 어두워지겠지. 여름을 잊은 듯 가을이 오고, 겨울이 없었던 것처럼 봄이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듯 손을 잡고 계속해서 우직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어둡고 가파른 골짜기를 지날 때는 겸손하고, 눈부시게 높은 곳에 있을 때는 감사하면서, 그렇게 산마다 낮아지고 골짜기는 돋우워져서 우리의 삶과 마음이 완만하고 너그러운 길이 되기를 기도해본다.


이제 얼이가 조금 더 크면, 가방에 문구류와 의약품을 가득 채워서 우리가 후원하는 아이들을 만나러 가야지. 우리가 기부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친구들과 얼이가 만나서 함께 뛰어노는 상상도 해보곤 한다.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어야지.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숱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함께 여행할 생각이다. 같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고 싶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는 얼이도 우리도, 부(富) 앞에서 주눅 들거나 가난 앞에서 냉담하지 않은 어른으로, 부요하다고 우쭐하거나 가난하다고 절망과 분노를 내 것 삼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두루 살피고 그늘 아래 피어있는 연약한 풀 한 포기도 소중히 마음에 담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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