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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스키 Sep 30. 2015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

영화는 영화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여행 세포를 마구 깨워주는 이 영화 같은 영화에 아이슬란드가 나오죠. 히말라야, 화산 폭발, 작은 그린란드 마을도 등장하지만 떠나고 싶다는 마음에 불을 지폈던 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아무도 없는 좁고 예쁜 길을 시원하게 달리는 월터 아니었을까요. 그 자유! 그 탁 트인 풍경.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오로라, 빙하, 온천, 쭉 뻗은 도로, 주기적으로 솟아오르는 신기한 간헐천, 아름다운 폭포, 아기자기한 마을이 있는 외딴 섬.  나라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설산. 모험, 레저, 휴양, 숨어들기. 버킷리스트를 채우는 데 그만인 나라. 그냥 가더라도 잊고 있던 ‘보고 싶던 것들’의 목록을 채워줄 수 있을 정도로요.

Ben Stiller on Iceland and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 YouTube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와이파이가 펑펑 터지는 버스에서 아이슬란드에 대해 찾아보고서야 깨달은 사실은, 아무리 봐도 아이슬란드의 사흘은 너무 짧다는 것.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지 않은 편이어서 인지 몰라도, 이 모든 여행을 위한 투어 프로그램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레이캬비크 여행자들이 떠나는 골든투어는, 6분마다 분출하는 간헐천 게이시르와 굴포스라는 멋진 폭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싱그베들리르 국립공원을 보고 돌아오는데, 다녀온 이들이 한 번쯤 가볼 만하다고 합니다. 아이슬란드에서 보내는 일정이 빠듯해 남들 다하니까 해야 하는 것 같은 투어보다 자유로운 곳에서 자유로움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골든투어' 대신 자전거를 빌렸습니다. 월터의 상상과 가깝게.

여행자 안내센터에서 빌린 자전거로  레이캬비크 시내를 휘젓는 동안, 시내 중심에 얼어있던 커다란 호수, 도심에 국내 공항이 있어서인지 높은 건물도 없는 레이캬비크 어디서나 보이는 가장 큰 교회 하들그림스키르캬, 신용카드만으로도 살 수 있어 환전하지 않았는데 현금만 받는 통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남근 박물관’도, 상쾌한 바람 따뜻한 햇살과 함께 상쾌하게 스쳐갑니다.


건물 숲 사이를 조금 벗어났을 때 저 건너편으로 설산이 병풍처럼 보이고, 설산이 다가오고, 때로는 귀여운 오솔길도 나타납니다. 행복하다는 말이 수없이 튀어나오는 길. 해안가를 달리다가 벤치가 보이면 앉아서 싸온 간식거리를 베어 물고, 지나가는 한가로운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자유는 정말이지 자전거 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하게 달렸지만, 사실 아쉽게도 월터와 같은 풍경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기대와 달랐던 풍경이 훌륭했던 덕분에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 좋았지만, 영화는 영화였을 뿐. 대신 실망도 상상했다면 덜 아쉬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판의 경계


하루는 북아메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의 경계, ‘실프라(Silfra)'에서 스노클링을 하기로 했습니다. 투어버스를 타고 가는 길, 사람들이 아이슬란드의 '흔한 풍경'에 넋을 잃고 셔터를 눌러댑니다. 모든 멋진 풍경을 남기려는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빠를 거라고, 지나가는 풍경이 말하는 듯, 어쩜 이런 곳이 있나요.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이 있었더라면 무조건 깊이 뛰어들었겠지만, 귀엽게 스노클링 밖에 할 수 없었던 처지. 그래도 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빠져든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북아메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라고 깊은 물 속 바위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나니, 물 속 발버둥이 왠지 더 품격 있는 느낌. 맑은 바닷물 속 두 판의 경계는 아찔했습니다. 너무 맑아서, 마실 수도 있는 물.

Silfra, Iceland ⓒDIVE.IS
Silfra, Iceland ⓒDIVE.IS


이 유럽 대륙에서 멀뚱히 떨어져있는 섬나라. ‘무작정’ 떠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외딴 곳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자유로움. 숨어들기에도, 그저 머물기에도 좋은 곳. 한적하고 모든 것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곳. ‘나라’보다, ‘섬’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리는 아이슬란드. 이 섬은, 그저 이 자리에 있었고 이곳에 떠나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말도 걸지 않았지만 그 멀뚱한 위치만큼이나 격리된 추억을 선사하는 곳이었습니다. 버킷리스트는 지워지고 또 다시 쓰였습니다. 열심히 살다가 꼭 다시 이곳에서 쉼표를 찍으리라고.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일상의 행복 #06 실망까지 상상하기
아이슬란드의 어스름한 저녁 풍경, 설산과 바다와 현대적인 건물들과 컨테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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