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한 순간들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내 인생 참 멋지다'
서른 즈음에서야 유럽을 만났습니다. 이십 대에 망령처럼 따라붙은 '유럽 배낭여행 한번 못해본 청춘이라니'라며 속삭이는 정체불명의 귀신을 떼어내고 싶었거든요. 배낭여행 안 해도 충분히 행복했고, 남들이 뭐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디서 나타난 귀신인지 참 지독한 녀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파리, 에펠탑.
어떤 곳인지, 왜 유명한지,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여행이라는 이미지가 바로 거기 거기 있었으니까요. 누가 만든 판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건 꼭 이루어야 하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에펠탑 앞에 막상 가서는, '인생 참 멋지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것도 보고. 그건 에펠탑이 격하게 아름다워서 황홀한 감동을 느껴서였기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걸 본다고해서 인생이 달라진다거나 붓다처럼 어떤 공간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이루고 싶었던, 여행하면 꼭 생각나는 판타지를 이루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불이 들어오는 에펠탑 아래를 거니는, 나와 같은 판타지를 가졌을지 모를, 행복한 사람들. 그들 사이에 있는 것도 행복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예쁜 건축물인지 모르겠지만, 가보지 않았다면 꼭 가보고 싶었을 것 같은 곳. 여기, 에펠탑 아래 벤치에 10분 앉아 있다 왔으면서도요.
붉은 광장!
러시아 모스크바(Moscow)의 랜드마크 붉은 광장 (Red Square)는 원래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어로 아름다운을 뜻하는 '끄라시비'와 '붉다'를 뜻하는 '끄라스니'가 비슷해서 붙은 별칭인데요, 가기 전엔 저도, 광장 바닥이 붉은가? 공산주의 국가였으니 빨간색으로 치장해 놓았나? 하는 상상을 했었을 만큼 붉은 광장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하지만 꼭 가보고 싶었어요. 붉은 광장!
모스크바 붉은 광장은, 막상 가보면 누군가는 실망할 수도 있는 그저 평범한 광장일 수도 있습니다. 좀 특이하고 아름다운 성당과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둘러싸이긴 했지만, 광장 자체가 대단한 볼거리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러시아 유학까지 고민해보았을 만큼 우주를 꿈꾸던 저에겐, 우주와 가장 가까운 나라 러시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붉은 광장에 발을 들여놓기만 한다면, 우주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 꿈에 가까워진 것만 같은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붉은 광장에 갔을 때, 마침, 일 년에 한 주 있다는 군악 축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붉은 광장에 이렇게 축제가 벌어지는 것도 어마어마한 일인데, 바실리 성당 레이저쇼와 불꽃쇼를 곁들인 축제라니요! 군악대 출신인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너무나 멋진 축제였습니다.
공연 막판에 이 영상을 찍었는데, 돌이켜 보니 이 멋진 순간에 저는 눈으로 이 광경을 본 게 아니라 화질도 별로 좋지 않은 핸드폰 화면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걸 볼 때마다 카메라를 좀 내려놓고 넋 놓고 볼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판타지가 폭죽처럼 터지는 인생의 어떤 멋진 순간에 너무 작은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던 게 아쉬워서요.
꿈에 그리던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천왕봉을 거쳐 대원사에 이르는 43km를 하루 만에 달리는 지리산 화대 종주.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정에서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천왕봉, 1915m 정상에 오르는 순간입니다. 며칠씩 걸려서 지리산을 종주하는 일정이라면 그 의미가 더 하겠죠. 그런데, 충격적인 건 이 정상에서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는 사실.
저는 천왕봉에서 줄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심한 인증샷만 남기고 하산을 시작했는데, '천왕봉' 비석 옆에서 의기양양하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실제로 정상에서 보내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겁니다. 가만있으면 추워지고, 근육도 굳어버리고, 또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위험하거든요. 그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도, 아무리 꿈에 그리던 곳에 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두 팔 벌려 온 몸으로, 조금 더 그 순간을 느꼈으면 좋았겠다는 기억, 돌이켜 보면 너무 많습니다. 꿈에 그리던 시간은 생각보다 짧으니까요.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07 카메라 내려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