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방글라데시에서의 Unforgettable Memory
Unforgettable Memory
스물여섯의 뜨거운 여름, 'LS전선과 굿네이버스와 함께하는 방글라데시 대학생 봉사단'에 선발되어 스무 명의 대학생, 다섯 명의 인솔자와 함께 평생 잊지 않을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 뒤, 마음을 담아 쓴 후기입니다. 오글거리는 감정 과잉도 보이지만, 10년이 다 되어가도 너무나 생생한 추억.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인연은 바람이다
인연은 바람이다. 모두 다 지나간 뒤에 느껴진다. 생에 가장 뜨거웠던 여름, 방글라데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꿈처럼 지나갔다. 그 인연도 이제 점점 더 그리워져 간다.
방글라데시로 가기 전의 준비기간 동안 수많은 회의에 쏟은 열정과 길 위에 뿌려진 우리의 땀. 그것들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 알 수 없는 환경과 아이들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다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었다. 지난 열흘은 그렇게 우리가 함께 준비하고 기대하고 두려워했던 것만큼 역동적이었다. 우리 정말 멋있었다. 너무 수고했다.
한국에서 방글라데시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홍콩을 거쳐야 하는데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막내 여권 분실사건.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 안에서 여권을 구출해내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는데, 돌아보면 우리 모두를 각성시키고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다카는 서울과 시차 3시간 차이나는 방글라데시의 수도이다. 공항에 내리자 지부장님과 함께 우리를 맞이한 예상보다 더한 습도. 후덥지근한 날씨가 쉽지 않은 열흘을 예고했다. 첫 숙소는 지부장님 말씀대로 방글라데시에서는 굉장히 좋은 호텔이었고, 식사도 수준급이었다. 지부장님은 계속 강조하셨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있게 될 가타일에서는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정말 그러리라 믿으셨던 것일까, 아니면 겁주시려고 그러셨던 것일까. 결론은, 처음 묵었던 그 숙소과 식사가 멋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옥이라 했던 가타일 초등학교의 그것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는 것.
다카의 굿네이버스 밀뿔 학교, Mother&Baby care center, 바타라 학교와 헤드오피스를 방문하여 너무 어여쁜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와 선생님들의 극진한 환영을 받고 방글라데시에서의 굿네이버스의 활약을 확인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드디어 가타일로 이동했다. 서른여섯 개의 박스를 들고 학교와 운동장을 사이에 둔 우리의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선생님들께서 예쁜 꽃을 하나씩 손에 쥐어 주셨다. 짐을 다 풀 시간도 없이 수업을 시작해야 했다. 검고 커다란 두 눈을 가진 아이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통역 선생님과 함께 우리가 준비했던 것들을 모두 힘들 사이도 없이 쏟아내고서, 저녁까지 손으로 먹는 현지식에 익숙해지고, 짐을 풀고 하루를 정리하다 보니 금방 하루가 지났다. 과연 저녁노을은 아름다웠다.
적응기간은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가타일 생활 이틀째부터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이들, 동네 청년과 어르신들과의 손짓 발짓과 영어, 어설픈 방글라로 대화를 하는 시간이 늘어갔고 수업은 조금 더 여유 있게 즐기면서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가 준비해갔던 시간이 오히려 적어서 아쉬울 만큼 우리 눈엔 별 것 아닌 실전화기, 종이컵 인형, 인디언 치마, 동물 가면, 크레파스, 물감, 실로폰, 멜로디언 이런 것들을 너무 좋아하고 자신이 만든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아이들 앞에서 어느 것도 대충 진행할 수 없었다. 기대보다 폭발적인 반응이었고 우리는 현지에서 더 생산적이 되었다.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우리에게 노력봉사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건물과 책상 페인트 칠, 아이들 등굣길 벽돌 설치 공사는 이런 일들에 목말랐던 예비군들은 물론, 어디서나 즐거운 우리들에게는 행복한 일거리였다. 쉬는 시간 현지 선생님들께서 준비해주신 대접에 담긴 망고와 파인애플, 밀크티-두짜의 맛은 이구동성으로, 다신 없을 거라 했다. LS전선, 굿네이버스 마음 3기 도안을 포함한 페인트칠이 마무리되고 벽돌공사가 끝난 결과물을 보고 있으니 해놓은 것보다, 아직 미처 하지 못한 것들이 눈에 밟혔다. 아이들이 발에 젖을 길이 더 많은데. 아이들 교실 더 예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주일은 너무 짧았다.
매일 아침 6시 즐거운 아침체조와 함께 시작하는 상쾌한 하루, 토스트와 함께하는 아침식사, 일과시간 틈틈이 우리를 찾아오는 아이들과 선생님, 동네 청년들의 관심, 수업에서의 아이들과의 교감, 점점 맛있어지는 현지식 점심, 간부식당 취사병 출신 친구가 선사했던 최고의 저녁식사, 열띤 일일평가회와 다음 수업 준비, 새롭기만 했던 인력거 택시인 뱅가리 가타일 투어와 따뜻한 감동의 홈스테이를 지나니 믿을 수 없게도 봉사일정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과에 주어진 나흘 열두 시간의 수업과 여섯 번의 반나절 노력봉사를 마치고 마지막 이틀 전에는 다음 날 예정된 아이들 발표회 준비와 민속놀이가 있었다. 투호와 물풍선, 딱지치기, 기마전, 제기차기 등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들 기조, 그리 기조, 체육조, 음악조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시간들이 풍성하게 채워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 일일 평가회에는 늦은 밤까지 발표회 무대 리허설과 야심 찬 체육대회 회의가 열렸다. 그 밤 즈음엔 이미 모기도, 정전도, 어둠도 모두 너무 익숙한 친구였다.
체육대회 당일, 무시무시한 역경이 찾아왔다. 간밤에 내린 비로 메인스타디움 운동장에 홍수가 나버린 것. 아침부터 모두 삽을 들고 물을 퍼냈지만 물이 빠질 기세도, 비가 그칠 기운도 보이질 않았다. 아침부터 씻지도, 먹지도 못한 우리는 난상토론 끝에 실내 조별 체육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모두의 순발력은 체육대회에서 절정을 달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러기로 되어있던 것처럼 체육대회는 청팀과 백팀의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투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프로그램이 모두 마무리될 때쯤 기적같이 운동장의 물도 빠지고 비도 그쳤다. 운동장에서 하이라이트였던 이어달리기로 체육대회가 마무리되는 동안, 아침부터 하늘 가득 매달려있던 만국기는 신나게 펄럭였다. 체육대회의 성공을 자축할 새도 없이 발표회 준비를 해야 했고, 완벽한 리허설을 해보지 못했음에도 음향과 연출, 우리들과 아이들의 공연 수준 모두 최고여서, 우리가 가르친 아이들과, 선생님, 몰려든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특히 아이들이 인디언치마를 입고, 깡깡총을 추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부채춤을 추고 아리랑을 부를 때는 가슴이 뭉클해짐도 느꼈다. 그 뭉클함은 아이들과 작별할 때 느낀 울컥함과 함께 가슴에 남아 진한 여운이 되어버렸다.
열흘 내내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을 찍다 보면 내가 사진을 남는 것인지 사진이 추억 속의 나를 남기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 모든 활동이 기록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남겨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의 갈등은 굉장히 뜨겁다. 나는 적절한 타협을 선택하여 미지근한 결과물을 내고 말았지만, 그런 아쉬움은 봉사단 전체에겐 죄가 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에게 큰 선물을 내린 것 같다. 아이들과, 아이들을 위해 썼던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간대도, 죄송하지만, 나는 셔터 누르는 시간 한 번 아껴 아이들과 악수 한 번 더할 것이다.
사실 서로의 기억에 남는 건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나중에 잊게 되더라도, 서로 잊히더라도 우리와 함께했던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다는 것, 우리가 손을 뜨겁게 잡고 눈빛을 나누었다는 것.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굳이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이미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시간들이었다.
열흘간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동지들과 해산할 때는 물론, 맑은 눈으로 영문도 모르는 헤어짐을 겪은 아이와 작별할 때도 나는 절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먼 훗날 언젠가 더 멋있어져서 다시 만날 그 날이 즐겁다. 내게 주어진 숙제는 마음 3기의, 방글라데시의 멋진 친구가 되기 위해, 시도 때도 없는 정전과 모기와 싸우며 촛불 켜고 밤새 공부하던 학생들, 이 덥고 습한 곳에서 각자의 길을 열심히 가던 사람들, 그들만큼이나 치열하게 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 인연은 바람이어서, 이어져 있는 이 먼 길로부터 언젠가 어디선가 꼭 다시 불게 될 것을 믿는다.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08 행복은 언젠가 어디선가 꼭 다시 불게 될 바람을 지금 먼저 느끼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