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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스키 Sep 30. 2015

레이캬비크의 100kr 코인 초콜릿

결국은 사람이다

"탁, 탁"


2월,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땅 위에서 금세 흩어지는 눈발로 밤의 여행자들을 맞았습니다.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레이캬비크의 케플라비크 국제공항. 이 작은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 회사는 달랑 두 군데 있었고, 소박한 안내문 외에는 아무도 제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았습니다. 이렇게 흥분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호객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심지어 여행자들을 맞이하는 이들조차 심드렁한 느낌. 나 좀 봐달라고, 나 이래 봬도 여행자들이 꿈꾸는 섬나라 아이슬란드 여행 온 사람이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 여행자의 흥분에 비해 너무나 침착한 풍경. 아이슬란드의 첫인상이었습니다. 


도심 입구에 있는 큰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옷 가게 ‘66도’의 커다란 광고판. 100여 년 전부터 아이슬란드를 따뜻하게 해왔다는 말을 보고서야 그 브랜드가 무슨 뜻인지 깨달았습니다. 아 북위 66도 말하는 거구나. 이 나라 수도 레이캬비크의 위도는 64도이고, 전 세계 수도 중에서 가장 위도가 높은 수도이지만 아이슬란드에서는 남서쪽 구석에 있는 도시죠.

레이캬비크의 정돈된 밤 거리


레이캬비크는 생각보다 더 작은 도시였습니다. 아이슬란드 인구의 대부분이 모여 산다지만 인구는 12만 정도. 새벽 한 시에 도착한 이 도시가 너무 작아서, 오히려 길을 잃었습니다. 도심이 작을 줄 모르고, 지도를  과대평가하다가 한참을 헤맸습니다. 

새벽 한 시에, 처량한 배낭여행자 차림으로, 북유럽 가이드북에서 아이슬란드 편만 북북 찢어온 지도를 보고 헤매노라니, 친절한 아이슬란드 여인이 도와주려고 말을 걸어줍니다. 호스텔 이름을 듣더니 아마 저쪽일 거라며 어둑하지만 은은한 가로등이 포근한 거리를 가리키는 친절한 북유럽 아가씨. 아까 갔던 길이긴 한데, 다시 가보기로 하면서, 인사했습니다.

 “아이슬란드어로 고맙다는 말을 뭐라고 하죠?”

“탁(Takk)" 

"응?” 

“탁”

 “땡스, 탁, 탁”

따뜻한 미소를 나누며 그녀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는데도, 다시 빙 둘러갔지만, 따뜻해진 마음 덕분에 버티기 충분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를 만났던 사거리 맞은편에 간판을 수줍게 가리고 있던 호스텔.  

낯선 거리를 거니는 일


여행자의 늦잠이란 참을 수 없는 행복! 8인 혼성 호스텔 방에서 두 번째로 늦게, 게으르게 일어나서는 짐을 가볍게 챙겼습니다. 아이슬란드로 오는 비행기에서 조금 공부하긴 했지만 당장 갈 곳을 몰라 호스텔 리셉션에 브런치 먹을 만한 곳을 묻고, 숙제하듯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온천, 블루라군으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습니다. 그리곤 거리로 뛰쳐나옵니다. 아침  열한 시. 새벽에 만난 지나치게 정돈된 거리보다는 북적였지만, 그래도 수도라기엔 너무나 한산한 도시 풍경.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나라답게.

 


낯선 거리를 무작정 거니는 건 일종의 '여행 의식'입니다. 어쩌면 실상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여행의 현실을 환상과의 어마어마한 괴리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한 수작. 하염없이 낯선 거리를 산책하면서 호스텔에서 추천해준 올드 하버를 거닐다가,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하고, 저보다 게으르게 늦게 일어난 같은 방 여행자가 ‘이 섬에서 가장 맛있는 핫도그’라며 추천한 핫도그 노점도 찾았습니다. 워낙 극악무도한 물가이기에 길거리 음식임에도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간식거리로는 최강이었습니다. 빌 클린턴도 와서 맛있게 먹었다는 그 집. 





랍스터 수프가 유명한 ‘씨바론(Sea Baron)’은 그 핫도그 집보다 유명한 맛집입니다. 발음이 찰지지 않게 주의해야 하지만 입에 착착 달라붙는 이 집은 과연 보기보다 기막히게 비싼 만큼 기가 막히는 맛. 제 입맛에도 잘 맞아서 하루에 두 번씩 찾았습니다. 혼자 온 배낭 여행자로 도저히 다른 레스토랑에 갈 수 없던 탓에 쫄쫄 굶으면서요.

낯선 거리를 거니는 일 자체도 좋지만, 낯선 거리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도 정말 멋진 일입니다. 요르단에서 사막 극한 마라톤 '사하라 레이스'를  마치고 갔던 여행이어서 사막 마라톤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태극기 마크와 주최 측인 Racing The Planet의 '4 desert(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남극) ' 마크를 단 촌스런 옷. 다른 옷을 별로 안 챙겨 떠나오기도 했지만, 극한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게 자랑스러웠던 중이어서, 이 옷을 입고 다니면 호기롭게도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느낌이었죠.

레이캬비크의 게으른 어느 아침, 여느 때처럼 씨바론, 아 'Sea Baron'에서 또 랍스터 수프를 먹고 있는데, 웬 대만 아저씨가 말을 겁니다. 나도 이 사막 마라톤 대회 나갔었다면서요. 우리는 그때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극한 마라톤에서는 참가자 서로를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워하는데, 서로 얼마나 미친 사람들인지, 좋게 말하면 얘가 얼마나 순수한 앤지 알아본 거죠. 알고 보니 이 분은 이 극한 마라톤 계에서 유명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이 아이슬란드에 가족과 함께 결혼 여행을 왔다고 하면서, 모든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나도 그 행복한 영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게 되려 행복했던, 어느 여행의 멋진 순간.


지구 같지 않은 풍경과 지구 같지 않은 물가

아이슬란드 노천 스파, 블루 라군 (Blue Lagoon)


도심보다 공항에 더 가까운, 노천 스파 블루라군은 레이캬비크 투어에서 빠지지 않는 곳입니다. 40도가 넘어가는 온천인데, 물 밖은 한겨울. 자연적인 온천은 아니고 주변의 지열 발전소에 사용된 물을 온천수로 활용한 인공 온천이라고 하는데,  화산암과 하얀 모래가 지상에 있는 것 같지 않은 풍경. 사람이 만든 곳이지만, 아이슬란드에서 흔한 풍경들이 지구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오히려 이 인공 온천이 자연적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블루라군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지구 같지 않은 풍경과 지구 같지 않은 물가 속에서 허락된 여유는 별로 없었습니다. 작은 페트병 속에 든 물 한 병도 3,000원이 넘어가니, 물병을 향해 가는 것조차 꾹 참아버린 손. 아이슬란드에 머물렀던 며칠 동안 언젠가 돈 많이 벌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와서,  돈 펑펑 쓰고 말리라며 다짐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펑펑 쓰는 것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답게 다니리라.


100kr 코인 초콜릿



지구 같지 않은 곳에서 혼자 다닌 여행이었지만,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사람입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샀던 기념품은 여행 갈 때마다 사 모으는 마그넷, 너무 추워서 샀던 털모자와 버프, 온천에서 써보고 사지 않을 수 없었던 블루라군 머드팩 정도인데, 시간이 지나 제일 가치 있어 보이는 건 차마 먹을 수 없었던, 100kr 코인 초콜릿입니다. 

아이슬란드에선 천 원 남짓한 돈으로는 뭘 살 수가 없는데 이 가짜 동전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레이캬비크의 작은 기념품점에서  계산하던 아저씨 덕분입니다. "이 100kr 짜리만 더 사면, 4,000kr이 되어서 공항에서 Tax refund을 받을 수 있으니 훨씬 이익이야"라며 챙겨주던 더듬거리는 말투. 그리고 초콜릿을 굳이 멀리서까지 찾아오는 동작을 보아 몸이 불편하신 분이었는데, 어쩐지 그곳만 사람이 북적였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공간을 채운 덕분이었는지. 그분께는 익숙할지 모르는 작은 센스와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레이캬비크를 그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엄청 경이로운데 너무 조용한, 그리고 따뜻한 마음이 있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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