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스키 Oct 01. 2015

산에 오르는 이유 Part III

'새내기들에게 고함'


어떤 설악산 종주기


2009년 2월 7-8일, 교내 잡지 『어이 거기, 자네 이것 좀 주워주지』 ‘새내기 특집’에 기고하려다 일기가 되어버린 메모 


젊음이 젊음에게 하는 말은 대개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보잘 것 없는, 하지만 고생했던 이룸에 대한 치기 어린 자랑과 실패에 대한 가슴 저렸던 감상,  온몸으로 느꼈던 깨달음 같은 것들이다. 부끄럽게도 이 글도  그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젊음이 다 지나버린 것처럼 젊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나, 분명히 내게도 새내기 시절이 있었고, 방황하고 고민하고 비참하다가도 가슴 벅차고 설레며 눈부셨던 날들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볼 만한 일이지 않나 생각했다. 멋진 상상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대학생활에서 얻은 가르침 중 하나였기에, 이 글은 세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새내기들에게 고함>이라는 주제로 쓰는 글이지만 비록 학교에  9년째 적을 둔 가난한 대학원생이라 해도 감히 이래라 저래라 똑똑한 후배들에게 충고할 만큼 훌륭한 선배는 아니다. 다만 이런저런 넋두리 같은 잔소리나 늘어놓을 수 있을 뿐, 수많은 잔소리 중 하나 건져낸 것이 “새내기들이여, 산으로든 어디로든  떠나라.”이다. 굳이 올해 입학하지 않았더라도 새내기의 마음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모든 것엔 때가 있지만 설령 늦었다 생각되더라도 포기해선 안 된다. 그 반짝인다는 20대 흘러가다 보니까, 인생 짧은데 이건 더 짧다는 느낌이 든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 했고, 반짝이려면 더 반짝여야 했고, 그녀도 잡았어야 했다.  

 필자는 작년 가을 낙엽이 떨어지려 폼 잡을 때 7년 반 만에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내 몸에도 파란 피가 흐른다고 가끔 생각한다. 알게 모르게 세상 속에서 학교 이름을 많이 팔았는데 진정으로 이 학교에 걸맞은 인격이나 성격, 지적 능력, 얼굴 등을 가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죄스러운 마음에라도 더 열심히 살고 있다. 

 처음 큰 산에 올랐던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방위산업체 병역특례 회사원이었던 선배가 휴가를 내고 ‘지리산 특공대’를 모집하기에 왠지 모를 끌림에 따라갔다. 힘들었던 첫날 저녁, 지리산 세석 산장에서 물었다. “형, 회사생활이 힘들어요, 산행이 힘들어요?”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회사는..” 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바로 잠이 들었다. 적어도 사서 하는 고생은 괴롭지 않다는 뜻인가. 

 첫 지리산 종주 이후 산의 매력에 빠져, 지리산, 설악산 종주뿐 아니라 가까운 북한산을 종종 찾았다. 군대 정기외박 써서 오전엔 토익 시험 치르고 오후에 산에 오른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다. 높은 산을 오를 땐 분명히 후회한다. 내가 왜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지만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산이 나를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2009년 2월, 설악산은 세  번째 종주였다. 이번에도 등산을 결정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떠나는데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시기를 놓치고, 너무 많은 준비는 여행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버리지 못하면 얻지도 못한다는 철학이 있다.

 능선을 따라 길쭉하게 펼쳐진 지리산 종주 코스에 비해 설악산 종주 코스 거리는 짧지만, 오르막 코스가 많아 상대적으로 더 힘들게 느껴진다. 만약 새벽부터 일반적인 종주코스인 설악동-대청봉-오색, 한계령 16km 코스를 밟는다면 하루 만에 정복이 가능하지만 오후에 입산하기로, 대청봉 밑에서 소청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정하고 길을 나섰다. 우리의 깔끔한 계획은 이러했다. 첫째 날 아침 6:25 강변 버스 - 속초 버스 환승, 설악동 소공원 출발 - 소청 대피소 - 둘째 날 아침 대청봉, 오후 오색 버스 - 저녁 서울. 이번엔 병규뿐 아니라 테리와 함께다. 

 테리에겐 봉구가 동행을 제안했다. 이들도 처음 만난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인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인연이 되는 것은 함께한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 시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국제학사 근처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던 병규가 가위 바위 보에서 “보”를 영어로 뭐라 하는지 궁금해 지나가던 외국인에게 물어봤고, 그 외국인, 테리가 멋지게 “Paper”라고 대답한 것이 시작을 시작으로 결국 그와 내가 설악산에서 만나게 된 거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다니까.      

 목표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하나만 보고 분주히 준비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그 산에 어찌 향기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월의 설악산에는 눈이 가득하다. 오르는 길에 아이젠을 둘렀고, 눈 쌓인 깊이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길쭉한 미국인 테리는 ‘인간 체력’과 ‘짐승 체력’ 사이의 어느 쯤에 있는 ‘슈퍼맨 체력’을 보여주었다. 긴 다리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한참 앞서 나갔다. 그런 그도 후엔 힘들었었다고 하니, 인간적이긴 하다. 세 살 어린 그가 왠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일지도. 그런 책임들과 혼자 짊어진 삶의 무게를 누군가에 기대지 않으며 투덜대지 않고 묵묵히 감내해내는 것. 

 5시간여 만에 목적지인 소청산장에 당도했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 길마다 만나는 어르신들은 부지런히 가야 도착할 수 있겠다고 했었고, 눈 쌓인 산길에는 인정이라고는 없었다. 잠시 정신을 놓으면 날은 어두워질 것이었고,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 홀로 이 길을 열심히 걸어야 했다. 첫날 그 길의 끝에는 소청산장이 있었다. 작고 아담한 산장의 따뜻함에 대한 기대는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 눈 덮인 겨울 산에 하루 묵어갈 수 있는 따뜻한 쉼터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라면에 참치 캔을 뜯는 우리를 보며 옆에 계시던 어른들이 굽던 고기를 기꺼이 다 내주신다. 인삼주, 복분자주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좋은 것들을 흔쾌히 먹으라고 다 내어 주신다. “Where are you from?” 질문에 “미국에서 왔어요!”라며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테리 덕분에 즐거운 밤이었다. 어르신들은 잠드는 시간을 아껴 아낌없이 따뜻한 관심을 주신다. 산에 온 젊은이들 반갑다고 굽던 고기에 한 접시 더해 몽땅 주신 중년 부부, 소청의 맛을 한껏 살려주신 산악회 어르신들과 함께한 따뜻한 추억. 우리는 감동하며 먹고 마시고, 늦은 밤까지 이야기 나누며 따뜻해졌다. 산에서 인연은 이걸로 끝이지만,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실연당해서 산에 왔다고 했다가 양주병으로 맞을  뻔했다. 정말 그분들 말씀대로 스쳐가는 인연일 수 있다. 하지만 인연이란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가슴 깊이 새겨진 화석 같은 것. 

 하늘엔 별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밤. 설악산 소청봉 아래 조그만 소청산장의 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으나, 언어와는 상관없이 그제야 내게로 와서 아늑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눈을 뜨니 어젯밤 술과 음식과 인생을 나누던 분들의 자리는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느릿느릿 짐을 챙겨 문을 열고 나서니 미처 만나지 못했던 아침 겨울 산의 풍경이 그 자리에 있었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서두르지도, 게으르지도 않은 출발. 

 소청에서부터 맑은 바람을 따라 조금 더 걸으니, (산에서 ‘조금 더’라 함은 『드래곤볼』의 시간과 공간의 방과 같이 시공의 개념이 약간 다르다. 정상까지 “조금만 더 가면 된다”며 도망치듯 하산하는 아저씨의 말에서 증명된다.) 버드런트 러셀 말대로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함께 미치겠다.” 그 편이 역시 낫다고 눈길을 밟으며 생각했다. 내 기다림의 자세는 “진실은 언젠가 통한다”고 믿는 것이다. 열심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정상, 1707m 대청봉은 멋진 곳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는 다르다. 그립지 않으면 말하고 싶지도 않고 떠오르지도 않는다. 지나버린 시절의 나쁜 기억조차 담아두고 있는 것은 그리움이 남은 때문이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이 분명히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거친 숨소리를 내는 동안 많은 것들이 그리워지곤 했다.

 “이걸 보기 위해 왔다.”는 말은 상투적이지만, 딱히 더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이에 이미 더 많은 걸 얻었음을 알고 있었다. 멋진 경치에 넋을 놓고 있다가,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멋진 곳에서 소중한 사람에게 전화 한 통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나의 감동이지 그의 감동이 아니기에, 스스로가 아름답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 정상의 감동은 의외로 짧다. 정상에도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들지만 그곳이 좋아 집을 짓고 살지는 않는다. 곧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같은 풍경에서 사진을 찍고, 감상에 젖었다가 곧 내려가곤 한다. 곧 차가운 바람도 분다. 다시 갈 길도 멀다. 오래가는 완전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고 순간에 있었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같은 풍경, 그 자리에 있어주지만 나는 변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얼굴도, 생각도, 주변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게 지금이 있다는 것과 이런 기억이 있다는 것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 고마운 사람들과 눈빛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누구나 상처, 걱정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나만 그런 거 아니라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와 그들이 가진 희망과 가능성이 세상을 좀 더 살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보통 행운이 아니면 좋은 동행 꾸리기는 쉽지 않다. 테리가 가족들이 한국에 놀러 오면 이 산에 데려오고 싶다고 할 땐 뿌듯함도 느꼈다. 좋은 풍경과 인연들, 오래갈 기억의 장면들. 힘들었지만 함께여서 좋았다. 

 함께 떠났지만 선명하게 나타나는, 결국엔 나 혼자 남는다는 의식이 색다른 충격이었다. 너무 힘들 때 날 지킬 수 있는 건 결국엔 나라고. 어떤 기억을 지니든 말든, 모두 스스로 다 만든 것이다. 산에 만든 눈길 발자국도, 좋은 기억도 힘든 기억들도 모두.


 산이 말해주진 않았지만 더 부지런하자고 혼잣말로 다짐했다. 독한 다짐과 단내 났던 내 온몸에 부끄럽지 않도록 더 치열하라고. 지금을 즐기고,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며, 즐거운 일을 하고, 무엇이든 두려워말고 받아들이라고, 포기하면 딱 그만큼이라고. 가진 것도 대단한 것도 없는 내가 더 마음에 든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데 버릴 것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망가지면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힘들 때 웃고 강해지며 앞으로 나가는 놈이 진짜 단단한 놈이다. 좀 더 심하게 단단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11 10년 전의 일기도 들추어 보면,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많은 것들이 그리워지곤 했다.'라고 써있을 테니, '지금도 아름다운 시절일 것'임을 의심치 않기


매거진의 이전글 산에 오르는 이유 Part I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