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지리산!
흔한 지리산 종주기
2008년 8월 19~21일 메모
버릴 것을 다 버리지 못하고 준비할 것을 미처 다 준비하지 못한 불완전한 출발. 하지만 부족한대로, 없는 대로 멋진 영화가 될 것이다. 출발은 늦고 더디지만 언제나, 다시 앞서 갈 자신이 있었다. 돌아오면 대학원 생활 시작이다. 지난 게으름으로 흘려버린 시간 반성은 하되 아쉬워 말고 가기로 했다. 아쉬울 시간에 한걸음 더 걷겠다.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주저 없이 해야 한다. 그때 아니면 못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1박 3일의 짧은 일정. 병규와 함께한다. 구례구역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타기 전에 용산역의 큰 마트에서 먹거리와 등산 장비들을 구입하면서부터 즐거웠다. 출발 전의 설렘은 여행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 지리산. 세 번째 종주. 이제는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나에 대한, 같이 가는 사람에 대한, 이 길에 대한. 또 이 길을 걸을 사람에 대한. 지리산에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이 있다. 그러기에 길이 된 신기한 신비로운 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 걸은 이 길을 나도 걷는다는 것이 그 누군가와 나를 이어주는 느낌이다. 아주 오래전 이 1700m가 넘는 고지에서 장터가 섰다는 그 시절 이전부터.
노고단에서 출발한 지난 두 번의 종주에서는 벽소령까지 가서 잤는데 이번에는 연하천 대피소 코펠 커피 화상 사건이 있었는데도 6.3km 더 걸어 세석에서 묵었다. 그 길이 가장 큰 고비였다. 체력은 떨어지고 남은 것은 잠자리와 저녁식사에 대한 기대뿐이었다. 살아내기 위해 묵묵히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시작과 끝은 같다. 산밖에는 산이 있다. 내가 오르는 이 산의 정상에 서야 산 밖의 산이 비로소 보인다.
세석에서의 저녁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호식했는데, 내내 일행이 된 보험일 하시는 형님과 그의 또 다른 일행 분들 덕분이었다. 산에서는 모두가 친구다. 모든 사람이 알고 보면 그렇듯 나쁜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산에 모여드는 것도 신기하다. 예전 설악산의 여름에 만난 어느 형님과 같이 산행하고 대청봉에서 비바람 속에서 인사하고, 연말에 따뜻한 안부 문자 주고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어렸던 나는 도움을 받기만 해 감사한 기억밖에 없다.
지리산의 밤하늘은 너무도 멋있었다. 별이 쏟아져 내린 것을 본적이 언제던가. 십여 년 만에 은하수를 만났다. 하늘과 가까운 세석 대피소에서 본 하늘에서 내리는 별들을 보다 괜스레 눈물을 쏟을 뻔했다. 20km를 걸은 강행군과 대피소 소등시간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하늘에는, 내 옆에는 언제나 별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1915m 천왕봉, 신비롭고 영험한 공간에서 스스로도 놀라운 시간에는 위대한 것, 내 꿈과 관련된 것들을 생각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지나간 후회와 아쉬움, 사소한 것들이 더 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산은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워버리라고 말이다. 내가 다 씻어 줄 테니. 이 구름으로 씻어 줄 테니 너는 내가 그려놓은 이 풍경 같은 꿈을 꾸고 그런 생각을 담아내라고. 온갖 옳은 것들이, 좋은 것들이 좋은 것들이 그제야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구름이 나를 휘감고 지나갔던 구름이 조심스럽고 신비스러워 그 마음을 씻어주고 깨끗이 만들어 줄 것 같다. 내가 만든 모든 상처도, 내 안의 상처도.
산은 내게 옳은 것, 바른 것을 말해준다. 말없이 진짜 중요한 것,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을 지켜내야 한다고 한다. 지나간 것들과 진로에 대한 고민, 쓸데없는 미련, 눈앞의 사소한 격정과 좌절들을 이야기하면 산은 말없이 그것을 끌어안는다. 고맙게도 왜 그랬냐고 그게 뭐냐고 하지 않는다. 산이 말한 대로 실제로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감사하게 됐다. 내게 이런 몸이 있다는 것과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지나는 길목 길목이, 땀 흘리는 모든 순간이 큰 선물이었다.
어깨가 저리고 발목이 힘겨워하는 순간에도 정신은 맑다. 나무의 향기도 구름을 맞는 느낌도 그대로 선물이다. 익숙한 햇살이 산 위에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덥고 뜨거운 열기구가 아니라 태양마저 자연의 일부로 느껴진다. 산의 구성품인 것이다. 내가.
잊기 전에 써놓아야 할 산행 준비물은 코펠, 버너, 헤드랜턴, 챙 넓은 모자, 긴팔 옷(점퍼), 일정보다 하나 둘 더 여유 있는 양말, 속옷, 티, 바지, 물티슈, 커피, 오이, 초코바, 비닐봉투, 스팸, 라면, 소주 작은 것, 카메라, 충전지, 충전기, 장갑, 비상약, 진통 소염제, 물통, 수건. 산에서는 언제나 간소하게 없는 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앞서고 뒤서는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이 지리산을 잘 느끼고, 돌아와서 잘 사느냐가 관건이다. 산에서 중요한 교훈 하나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부지런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고 걷는 그런 태도 자체도 성공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목표가 있다면 자신의 페이스를 믿고 가면 된다. 그 길에서 행복함을 느끼고, 즐길 수 있으면 된 것. 순서가 엇갈리거나 남들과 다르다는 조바심도 적당히 해야 한다. 멀리 그리고 길게 보면 보잘 것 없을 순간의 동요가 일을 그르치기도 하니까.
이번 산행은 굉장한 성공이었다. 병규가 초행길인데도 스님 모드로 온산을 휘젓고 다녀서 표준 예상시간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코스를 돌 수 있었다. 어떤 길이든, 함께 걷는 누군가가 중요하다. 서로 산길 가는 법, 짐 챙기는 방식 모두 조금씩 달랐지만 조화는 완벽했고 사실 그런 사소한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전혀.
무사히 하산했다. 걷는 일이 조금 뻐근해 힘들다. 산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걷는 건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오만한 생각 때문인지 급격하게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산청, 중산리에서 진주를 통해 서울로 올라왔다. 아무리 산의 영험함과 정기를 받고 와도, 오는 길 휴게소 패스트푸드점에서 양념 감자를 팔지 않아 실망하는 나다. 다음에는 꼭 먹고 말테다.
산은 아등바등 살기에는 아까운 시간이 존재하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산길을 벗어나 기계가 놓은 아스팔트길을 밟는 순간 더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 것을 주문한다. 산은 신기한 곳이다. 올라가면, 정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돌아가기 아까우니까. 목표 하나만 보고 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하다. 지리산의 향기는 아마 거기 있지 않을까. 때가 되면 분명 지리산은 나를 부를 것이다. 그때 또 무릎이 가출 안 하게 정신없이 인생 또 살아 놓아야겠다.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10 아등바등 살기에는 아까운 시간도 있고, 아등바등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시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