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에서 발견한 행복
지상에 없는 최고의 북카페!
적절한 조명이 있고, 핸드폰도 더 이상 울리지 않는 만 킬로미터 상공의 북카페. 옆자리 사람들은 밥 때가 되면 일어나 같이 밥을 먹으니 방해 요소도 없고, 쉬어가는 정류장도 없어 부드럽게 이어지는 적절한 흔들림도 주고요. 적당한 소음과 흔들림이 있어 책 읽기 좋다는 지하철. '지하철 독서 모임'이란 것도 있다는데요, 책 읽는 환경으로 치자면 하늘 위가 최적입니다. 적절한 긴장과 적당한 소음이 있는 공간. 무료 커피와 땅콩이 계속 제공되는 비행기라면, 이보다 공부하기 좋은 카페는 지상에 없죠.
저는 비행기를 타고 긴 시간을 비행하게 되는 날이면 여행 짐을 싸면서 꼭 비행 시간을 알차게 보낼 만반의 준비도 같이 하곤 합니다. 책과 메모장을 꼭 챙겨놓고, 노트북도 충전시켜 놓고요. 비행기 영화는 보통 화질이 좋지 않거나 안내방송이 나오기라도 하면 몰입이 방해되는 탓에 저는 비행기에서 주로 책을 읽는 편입니다.
비행기에서 볼 책은 꼭 전자책이 아닌 종이책으로 챙깁니다. 아직 전자책이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자책 시장이 크지 않아서인지 이북으로는 보고 싶은 책이 아직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책은 넘기는 맛이죠. 만 킬로미터 상공에서, 불이 꺼진 주변에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고, 독서실 같은 조명과 적당한 흔들림 속에 커피 한 잔과 함께 책 읽는 순간, 이건 제가 여행에서 만드는 아주 중요한 행복의 순간입니다.
여행의 기술이란 게 있기는 한 건가?
얼마 전 미국으로 가는 11시간 비행 중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었습니다. 네 번 읽었을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여행에 도움될 만한 기술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에 대한 통찰을 그 다운 언어로 매혹적으로 그려내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책이죠.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어 줄 치면서 보게 되는데, 이번에는 여행이 행복의 힌트가 될 수 있겠다는, 아주 기막힌 힌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을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 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인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알랭 드 보통,『여행의 기술』
정말 여행의 기술이란 게 있다면, 행복에 이르는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여행의 기술을 한 번 찾아가다 보면, 행복을 이루는 몇 가지 조건들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보통은 '여행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진에 이끌려 한 섬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여행에서 기대와는 다른 섬의 모습과 그곳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이 특별한 것만은 아님을,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옵니다. 그리고는 '실망스럽다'기보다는 현실이 기대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미 익숙하니까요.
안내책자가 어느 유적지를 찬양한다는 것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 있는 평가에 부응할 만한 태도를 보이라고 압력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내책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 곳에서는 기쁨이나 흥미가 보장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별 3개짜리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에 들어가기 오래전부터 나의 반응이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평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 벽화로 장식된 웅장한 계단은 위층 수도원 회랑으로 통하는데, 이곳의 예배당들은 뒤로 갈수록 화려해진다." 그 다음에는 이런 구절이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여행자는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가이드북을 보고 따라가는 여행, 알랭 드 보통도 보통 사람들처럼 그랬었나 봅니다. 가이드북에 흔히 매겨진 별점. 맞고 틀린 것은 애초에 없는 데다 이미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에 따르면 그 평가가 특별히 불만 제기할 만큼 잘못되지는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뭔가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느낌, 상상력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자진해서 박탈해가며 여행하는 기분이랄까요. 그리고 알면서 당하는 느낌, 흥미를 강요당하며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느낌이랄까요. 시간 쪼개 여행하는 여행자는 탐험가가 될 수 없고, 여행하며 자아를 형성해 가기에는 갈 길이 바쁘니까 하릴없이 가이드북을 펼치게 되기는 합니다.
가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보지 않았던 곳 또는 무관심하게 지나친 곳들 가운데 어떤 곳들이 가끔 눈에 번쩍 띄면서 우리를 압도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곳들은 서툴게나마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질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곳은 예쁘지도 않고, 안내 책자에서 아름다운 곳을 설명할 때 흔히 꼽는 분명한 특징 같은 것도 없다. 우리가 여기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장소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여행하다 보면, 가이드북에는 나오지 않은 어떤 풍경이 눈길을 사로 잡는 때가 있습니다. 어딘가에 꽂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데, 여행자는 때로 정해진 감동을 강요당합니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이 '위험'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요한' 스팟을 놓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이죠.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실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그런데, 여행 하려는 곳에 대해 지적 호기심을 갖는다면, 한 도시만 해도 공부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역사, 문화, 지리, 사회.. 하지만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특별한 관심에 의해 주제를 가지고 여행을 하기에는 여행지의 지리적인 요소나 이동 수단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행을 위한 호기심의 지평은 애초에 숙소에서 발걸음이 하루만큼 닿는 정도여야만 하니까요.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서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이것은 대학 강좌에서 주제가 아닌 크기에 따라서 책을 권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여행의 기술』에서 알랭 드 보통이 여행에 대해 말하는 것은 '행복'이나 '여유'가 아니라, 도무지 혼란스럽고, 왜 해야 하는 지 모르는 행위 같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독자는 여행의 기술을 깨닫기는커녕 여행을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여행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구구절절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는 내용들이지만요.
자투리 시간에 행복하기
『여행의 기술』의 관심은 결국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세계 여행이 아니라, 무려 『내 방 여행』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드 메스트르의 생각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 달 반 동안 가택 연금이라는 형벌을 받았던 이 철학자는 자기 방을 여행하고, 기행문을 씁니다. 여기에 자극 받은 알랭 드 보통이 후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의 생각과 생활을 기록한『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를 쓰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생각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내 방'에서 조금 나가 '동네 여행'을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결국, '내 방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대해 주목해 보라고 합니다. 사막을 건너고, 빙산 위를 떠다니고, 밀림을 가로 지르더라도 영혼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흔한 옷차림으로 방 안에만 있어도 여행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행의 심리를 우리 자신이 사는 곳에 적용할 수 있다면, 이런 곳들도 훔볼트가 찾아갔던 남아메리카의 높은 산 고개나 나비가 가득한 밀림만큼이나 흥미로운 곳이 될 수 있다.
(중략)
나는 이제 드 메스트르를 좇아 습관화의 과정을 역전시켜, 내가 그동안 발견했던 용도에서 주위 환경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나는 억지로 이상한 종류의 정신적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서서히 여행의 보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략)
나의 관심이 새로 깨어나면서 동네에 사람들이 생겨나고 건물들이 재규정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관한 생각들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지역에 퍼져나가는 새로운 부(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철도 아치가 왜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지, 스카이라인을 가로지르는 고속 도로가 왜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지도 생각해보려고 했다.
물론 세계 유람이든, 내 방 여행이든, 어느 것이 '낫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이야기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여행하는 심리에 좌우되는 것이며,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여행 자체가 아니라 행복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였던 겁니다.
여행을 하는 목적이 뭐지? 예를 들어 자네가 이집트로 여행을 갔네. 그때 자네는 되도록 효율적으로, 되도록 빨리 쿠푸 왕의 거대 피라미드에 도착했다가 그대로 최단거리로 돌아올 텐가? 그런 건 여행이라 부를 수 없지.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지. 물론 어떤 사정이 생겨 피라미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중략)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비행기에서 『여행의 기술』을 덮으며,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미움받을 용기』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행에 대한 통찰과 행복에 이르는 기술이 무척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새삼스레, 비행기에서 독서하기로한 '여행의 기술' 덕분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만드는 행복. 자투리 시간에 '무조건 내가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호기심을 가지고 '지금, 여기' 순간들을 즐기면서.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01 '지금, 여기' 자투리 시간에 행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