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하나, Northern Lights
64°08′
라틴어로 '새벽'이라는 뜻을 가진 오로라(Aurora), 위도 60도 이상에서 나타나는 북극광(Norther Light). 태양 플라스마와 지구 자기장, 대기가 만들어내는 이 환상적인 풍경은 '누군가에게는 꿈'입니다. 오로라를 보는 게 오래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제게 그랬듯이.
캐나다 옐로나이프는 오로라 보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오로라 수도'라고 불리고, 북극권에 있는 노르웨이 트롬쇠, 핀란드 이발로 등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북극권 나라들 중 아이슬란드의 진짜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ik)는 무려 북위 64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도의 수도여서, 도시에서도 오로라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얘기. 끝내주죠.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어왔든 이곳에 온 여행자들은 '오로라'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아이슬란드까지 날아갔던 단 하나의 이유도 오로라였습니다. 런던을 여행하던 겨울, 레이캬비크를 오가는 왕복 티켓을 손에 든 순간부터, 초록색 카펫들이 가슴에서 펄럭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환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밤이 되기도 전에 알았습니다. 레이캬비크의 첫날, 자신이 어젯밤 다녀온 오로라 투어 이야기를 꺼내며, 오로라를 직접 보면 사진과는 다르다고 굳이 설명해 주는 여행자 친구. 호스텔 같은 방에 묵었을 뿐,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보았던 사진들은 노출 시간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펄럭이는 형광색 커튼으로 보이는 거라고. 실제로는 흐린 초록색이 지나간다고.
환상은 조금 깨졌지만, 박살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천체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의 절망감이란. 너무 아름다운 알록달록한 천체 사진들이 실은 색온도 등을 고려한 보정된 작품이고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니.. 그만큼의 절망감이라 할지라도 괜찮았을 겁니다. 오로라 보는 건 꼭 지우고 싶은 버킷리스트였으니까요.
오로라 본 무용담에 신났던 그 친구는,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의 오로라 사진을 보여줍니다. 처음 갔을 땐 못 보고 돌아오고, 두 번째 갔을 때 만났다는 오로라. 책에서만 보던 그 오로라를 폰 화면에서 보노라니, 오로라를 본 다는 일이, 자랑하기 위함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게나, 나에게나. ‘내가 직접, 진짜 오로라를 보았다’는 사실을 간직하기 위해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살아가는 지도 모르니까. 어떤 목적이든, 가슴에 품었던 꿈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찾아가는 길은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길에선 내밀한 기쁨도, 진기한 풍경도 스쳐가기도 하고..
부서져버린 환상이야 어찌됐든, 드디어 내가 오로라를 보러 간다는 느낌, 그것만으로 행복했습니다. 호스텔을 통해 'Northern Light Tour’를 신청한 다음 날 바로, 저녁 8시에 호스텔 입구에 투어 픽업 봉고차가 왔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 투어를 다니다 보니 이런 투어버스 타는 일도 익숙해지던 참. 작은 미니버스에 오른 열댓 명의 오로라 투어단.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다가,
기대하지 않았을 때 찾아오고,
오는가 하면 금세 가버리고.."
레이캬비크 시내에서도 오로라를 만날 수 있다고 하지만, 더 좋은 포인트를 찾기 위해, 조용하고 어두운 시골길에 들어섰습니다. 투어 경력이 좀 되시는 듯, 정말 오로라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초보 오로라 관찰자들에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작은 미니밴 기사 아저씨. 도시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점점 들어가면서 '오로라는 낚시나 사냥과 같다'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다가, 기대하지 않았을 때 찾아오고, 오는가 하면 금세 가버린다"고요. 왠지 문학적인 기사 아저씨, 문득 무려 피천득 선생님의 문장이 생각났습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인연』
오로라 찾기 장인이 이끈 알 수 없는 어떤 어두 컴컴한 벌판에 멈춘 버스. "저기서 온다"는 말에 사람들이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늘에 휩싸인 사람들과 함께 멍하니 바라보는 하늘. 처음 오로라를 만나는 느낌은, 뭐랄까 호들갑 없이 진지하게, 놓치지 않고 싶은 감사한 순간을 온 온 우주가 함께하고 있는 느낌, 이걸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만나서 너무 고맙다 하는 생각.
오로라는 구름이 흐르듯 지나갑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타났다가, 눈앞에서 흐르는가 하더니 어느 샌가 흩어져버리는 어떤 황홀. 펄럭이지도 않고, 반짝이지도 않으면서. 상상과 다르게 무심하게. 그렇게 꿈에 그리던 순간을 나는 아직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찾아오더니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광경을,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지역으로도 이동하면서 새벽 한 시까지 이어진 투어로 추위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 일생에 한 번뿐일지 모를 광경을 앞에 두고 작은 차 속에 들어앉아만 있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봤으니 됐고 춥고 피곤하니 오로라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로라만을 위해 여기 온 게 아니고 아이슬란드에 다른 여행할 거리도 많으니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라 했을 수도 있겠고요.
저 역시 아이슬란드의 겨울을 우습게 보고 입은 가벼운 점퍼로는 레이캬비크의 겨울 추위를 견뎌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생각보다도 더 추웠던 북위 64도의 겨울 밤. 조금만 더 따뜻한 옷을 입고, 하염없이 오로라를 기다릴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오로라 탐험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미니밴 아저씨가 종이컵에 타 주는 핫초코를 끝없이 들이켰고, 덜덜 떨면서도 여기 지금 건강하게 이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게, 그저 고마웠던 밤.
하늘이 열리는 일이 쉽지도 않다던데, 운이 좋아서 날씨도 맑아서 가는 곳마다, 세 번이나 초록색 오로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아사코를 세 번 만나고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다고 했지만 오로라는 정말이지 세 번 만나도 좋았습니다.
신비롭기로 오로라 못지 않은 아이슬란드 출신 뮤지션 Björk(비요크)의 'Aurora'.
일생에 한 번은, 오로라!
중요한 순간들은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을 때 찾아왔다 가버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완벽한 추억이었습니다. 오로라가 그랬던 것처럼!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일상의 행복 #02 일생에 한 번은 할 일들! 버킷리스트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