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둔 조각
나의 데뷔작인 ‘너를 위한 글자’가 세 번째 시즌 공연을 하게 됐다. 2017년에 쓰고, 2019년에 초연을 올리고, 2024년에 재연을 했고, 그리고 올해 삼연이다.
이 작품은 아주 작은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타자기는 눈이 멀어가는 누군가를 위해 발명됐다.‘ 어디선가 본 그 한 줄의 광고 카피가 마음에 남아 그때부터 정보를 찾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탈리아의 발명가 펠레그리노 투리가 눈이 멀어가던 캐롤리나를 위해 타자기를 발명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은 전화가 없고, 편지로 사적인 마음을 전하던 시대였다. 눈이 멀어가도 그녀가 계속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투리가 타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친구였는지,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는 투리의 그 마음을 사랑으로 담아 ‘너를 위한 글자’를 썼다. 그래서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있던 투리가 캐롤리나로 인해 바깥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고, 캐롤리나가 자신처럼 어둠 속에 혼자 갇혀있지 않도록 타자기를 발명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작품을 썼던 2017년, 뉴욕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정말 열심히 글을 썼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작고 사소하고 갈등이 적어서 상업성이 없단 말을 자주 들었다. 제작사 대표님들이 “우리 회사랑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넌 인생의 고통을 겪지 않아서 글의 깊이가 없다.” 넌 절대 안 된다.”라는 말들을 하셔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며 엉엉 울던 날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작사가 원하는 글이 아니라,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쓰기로 했다. 딱 10년만 그렇게 해보고 안되면 그만두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쓴 작품 중 하나가 ‘너를 위한 글자’이다.
그 작품을 쓰던 때, 나랑 이정윤 연출이 만든 작은 공연 하나가 뉴욕 La MaMa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뉴욕에 가게 되었고, 뉴욕으로 가던 비행기 안에서도 대본을 쓰고, 학교 다닐 때 언제나 과제를 하던 그 복도에 앉아 ‘너를 위한 글자’ 초고를 완성했다. 그 초고를 그때 멘토였던 김수로 대표님께 이메일로 보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다행히 대표님이 그 작은 글을 좋아해 주셨고, 그렇게 해서 2017년 20분 리딩, 2018년 전체 리딩을 거쳐 작품을 개발했고, 2019년에 마침내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나에게 첫사랑 같은 작품인 ‘너를 위한 글자’는 9년이 지난 지금도 공연을 볼 때마다 2017년의 내가 떠오르게 한다. 글 쓰는 것이 너무 좋았고, 기회를 간절히 바라던 반짝이던 그 시절의 나의 조각이 이 작품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마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 작품을 볼 때마다 그때의 나의 한 조각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프림이가 떠난 지 이제 한 달이 넘었다. 괜찮다가도 갑자기 울컥하고, 맛있는 것을 먹다가도 이 좋은 것들을 이제 프림이는 누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오는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시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고전 소설을 각색해 새로운 뮤지컬을 쓰고 있는데, 죽을 위기 속에서 살아남고, 다시 위기 속에서 자신과 친구들을 지키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이정현’이라고 지었다. 프림이가 이 작품 속에서는 영원히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
이제 막 쓰기 시작한 작품이라 언제 무대에 오르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녀의 한 조각을 이야기 속에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