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렇게 어려웠니 - 영화 <사도>
사도를 봤다.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 사실 보고 싶진 않았다. 가뜩이나 여운이 깊게 짙게 남는 사람이라. 역시나 그랬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 아들래미의 비명이, 억울한 표정이 아른거렸다. 처음에는 영조가 왜 그랬냐, 사도가 왜 죽게 되었냐 같은 물음표로 가득했는데 -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하나만 남았다.
사랑을 갈구하는 한 사람.
그가 미쳐가는 장면들 속에서 그 굶주림이 잔뜩 느껴졌다.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불안했고 - 결국 정신적으로 붕괴될 때까지 사도는 '사랑 없는 자'의 위태로움을 보여준다. 아버지 영조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감정적인 연결 지점이 없었던 사도. 부인도, 신하도, 심지어 어머니까지. 그나마 감정적인 위안을 얻는 건 어릴 때 선물 받은 개뿐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바람 부는 어둠 속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안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안아줄 품이, 도망칠 곳이,
없다.
사랑의 종말.
사랑의 끝에 선 사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사람은 모두 사랑 주머니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모두의 다른 개성대로 그 사랑 주머니는 모양도 크기도 다르다. 그게 모두 다를지라도 본능은 하나다.
"주머니를 채워라" - 그 본능대로 재촉한다. 주머니 주인을. 그렇게 사람은 '사랑받는' 욕구에 충실한다. 그게 사람이다.
하지만 그 공통의 본능에도, 무심한 환경은 똑같은 대우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도세자처럼 가혹한 아버지에게선 사랑 한톨을 받을 기대를 할 순 없다. '나쁜 남자'를 만난 여자는 어느 순간 가득 채워졌다고 생각했던 주머니를 살펴보고 상심한다. 곁에 있어도 곁에 없다고 느낀 지점, 텅텅 비어 있는 사랑 주머니. 이럴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사랑에 굶주리기 때문에. 뒤주에서 아사한 사도처럼, 사랑이 죽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한번 죽어버린 사랑주머니를 어떻게 할까. 사도는 그 주머니를 잘라버렸다. 포기했다. 사랑받기를, 그 본능을. 그건 다른 말로 사랑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이 필요 없는 것이고, 또 사랑받을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자는 사랑의 종말을 택했다.
또 누군가는 그 쪼그라든 시체 같은 사랑주머니를 심폐 소생하기도 한다.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한번 상처받고 버려진 사람이 사랑을 다시 믿기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과 같다. 제 기능을 하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뿐이다. 그래, 자기 안의 뒤주에서 사랑을 꺼내는 건,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타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도에게는 아버지 영조이겠지.
영화의 하이라이트 '8일째', 사도는 이미 죽었고 영조는 죽어서야 그와 대화한다. 사도는 영조를 향해 나지막이 말한다. "... 내가 바란 건...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소"
사도가 그 마지막 끈을 끊어버린 것은, 영조가 칼자루를 쥐어줬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사랑의 종말은 도둑처럼 찾아온다. 누가 잘못했는지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단서를 제공한다. 경쟁하듯이. 자신의 빈 주머니를 상대에게 들이밀며 "넌 나에게 이것밖에 해주지 않았어, 내게 사랑을 달란 말이야"라고 재촉할 뿐 자신은 정작 아무 사랑을 주지 않는 - 돌아오지 못할 선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간다.
고속터미널, 백화점 화장실 앞, 지하철 개찰구 앞, 술집 앞. 그 지점의 남자와 여자를 많이 본다. 서로 아무 말없이 노려보며 어느새 분노로 변해버린 사랑이란 감정을 소비하는. 난 그들 뒤에, 그들이 걸어왔던 모든 과거를 덧붙여본다. 그들이 처음 만나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사랑을 속삭였던 모든 시간 - 그리고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현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살얼음을 걷는 듯, 자칫하면 발 한쪽 잘못 내딛으면 사랑은 붕괴된다. 흔히 사랑은 강하다고 한다. 절대. 사랑받는 사람이 강한 것이다. 사랑은 연약하다. 끊임없는 주고받음이 전제돼야 한다. 잠시라도 멈췄다간, 죽어가는 게 사랑이다. 사람이다.
뒤주 속에서 죽어간 사도의 울부짖음이 아직도 들린다. 사랑받지 못한 자의 슬픔. 어젯밤 꿈에는 사도가 나왔다. 죽어가며, 그 목타는 목소리로 무언가 속삭였다.
그건 나한테 말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