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플렉이 조커가 된 이유

영화 조커 리뷰

by ASTR

1. 조커를 봤다. #스포포함

2. 처음 접한 것은 티저. 프로젝터가 아서 플렉의 얼굴 위를 서서히 조커로 바꾸는 장면. 티저를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서 플렉의 첫 느낌은 우리가 알던 조커와의 큰 갭이 있다는 것이었다.

3. 예고편이 나왔을 때는 약간 심드렁했다. 이건 무슨 영화지.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탔다고 하니 더 갸우뚱했다. 보통 작품성이 있다고 호평받는 데는 어려운 해석들과 더불어 지루함 몇 스푼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조커도 그런 영화일까.

4. 그럼에도 개봉하자마자 극장으로 갔다. 마블이 아무리 호평받아도 블랙팬서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이 한계였다. DC가 그것을 어떻게 깨부수었는지 궁금했다.

5.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 맞았다. 온통 흔들어놨다.

6. 희대의 명배우들이 조커를 연기했었고 히스 레저의 조커가 최고로 꼽혔지만 이제는 호아킨 피닉스라고 단연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다크나이트를 현실의 이데올로기와 철학을 히어로물 영상물로 잘 녹여낸 사례로 꼽았지만 이제는 조커라고 이야기할 듯하다. 조커에 비하면 다크나이트는 정말 10대 만화다.

7. 가장 먼저 조커의 웃음. 첫 장면에서 아서 플렉은 광대 분장을 하고 웃어보려고 하지만 웃지 못한다. 억지로 웃으려 손으로 입꼬리를 올리지만 이미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아서 플렉은 정말 많이 웃는다. 그동안의 조커가 나온 영화에서 그 특유의 미치광이 웃음의 기원을 다룬 적은 없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웃음 발작’으로 처리했다. 그 설명이 너무 찰떡같고 조커의 기괴한 웃음까지 이해되는 연출이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 웃기지 않는데 웃음이 터져 나오는 발작. 결국 아서 플렉은 영화 내내 웃지만 정작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 그 엄청난 모순.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별명 ‘해피’도 그 모순에 동참한다.

8. 안 그래도 현실 지옥인 고담시에 살아가면서 병까지 있는 아서 플렉은 정말 기댈 곳이 없다. 그가 제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는,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그래도 직장동료들과 함께 광대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형식적으로나마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심리 상담사와 시간을 보내고 약을 주기적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쇼 프로의 호스트를 롤모델로 삼으며 남들을 웃게 하는 코미디언을 꿈꾸는 것, 옆집 싱글맘과 애틋한 사랑을 꿈꾸는 것, 그리고 엄마와의 유대 관계가 이어지는 것. 그 끈들이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을 사회 안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한다. 안전망이라고 할까.

9. 하지만 영화는 잔인하다. 폭력의 수위도 수위지만 무엇보다 아서 플렉에게 잔인하다. 앞선 다섯 가지 지지대를 하나씩 빼낸다. 처음에는 믿었던 동료 직원의 배신으로 일터에서 쫓겨난다. 정부 지원은 끊기고 약도 없다. 롤모델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싱글맘과의 로맨스는 자신의 망상이었다. 엄마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이 너무나 뼈아프다. 지지대를 하나씩 뺄 때마다 흔들리는 아서 플렉의 영혼과 그의 발작적인 웃음이. 그 슬픔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어떤 할렘가의 비극적인 실업자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놨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

10. 아서 플렉이 지하철에서 금융맨 세명을 죽이고 나서부터 영화의 냄새가 달라진다. 끊임없이 아서 플렉을 조여오던 현실의 흐름을 바꾼다.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도 당황하여 도망치듯 화장실에 숨은 아서 플렉. 그 장면에서 뜬금없이 춤을 춘다. 너무 이질적이어서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춤이 정말 중요한 포인트였다. 춤은 아무 때나 추지 않는다. 아서 플렉의 영혼에서 조커가 얼굴을 들이밀 때 춤을 춘다. 그 화장실에서 아서 플렉은 자기 안의 조커를 처음 만난다. 그리고 자유를 느낀다.

11.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의 몸으로까지 그 아서 플렉의 괴기스러움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초반부에 분장실에서 낡은 구두를 고치려고 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마치 고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아서 플렉의 뒷모습을 롱테이크로 길게 잡는다. 그의 등은 기괴하게 접혀있고 몸이 너무너무 왜소하다. 정말 불쌍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데 춤을 추고 난 화장실 씬 다음 아파트 복도로 걸어가는 아서 플렉의 뒷모습을 기억하는가? 어깨가 넓고 몸이 크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12. 영화에서 처음 토마스 웨인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는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브루스 웨인. 조커는 배트맨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마치 흑과 백, 질서와 혼돈, 선과 악. 가면을 쓰고 액션을 하는 장면을 전혀 떠올릴 수 없는 이 영화에서 배트맨과의 연결고리는 현실과 공상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

13. 우리가 이제까지 아는 배트맨의 시작은 그의 부모가 불한당의 총을 맞아서 죽었다는 점. 그가 고아가 된 원인이고, 그가 악에 대해 원천적으로 대척점에 서게 된 원인이다. 그런데 부모가 죽었다는 점, 그리고 엄청난 부자라는 것은 수많은 배트맨 영화에서 반복해서 주지 시켰지만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준 적이 없다. 이번 영화에서 토마스 웨인이란 사람이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조커의 탄생에 일조한다.

14. 영화를 보면서 무릎을 탁 친 것은, 다름 아닌 고담시의 상황이었다. 악의 도시로 상징화된 그 이름 고담, 수많은 실업자들이 있고 수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사람들은 폭발 직전 단계. 그런데 이 악의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장 부유한 기업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웨인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비로소 시장에 출마해 - 고담을 구하겠다고 말하지만 -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의 부를 그대로 물려받아 영웅으로 거듭나는 브루스 웨인. 전혀 생각지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는, 악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 조금만 헛디디면 범죄자가 돼버릴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에서 가장 부유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 그것은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부와 계급, 돈과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15. 그래서 이 영화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스템을 부정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며 그것이 모두를 억누르는 이 자본 세계에 대한 자유이고 해방이라고, 조커의 시작은 넌지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억눌려 있는 자, 시스템에 불만이 있는 자, 소외당한 자, 배재당한 자, 무시당한 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모두 광대의 가면을 쓰고서 아서 플렉을 조커로서 추대하는 장면. 곧 우리 세계 어느 곳에 바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 세계는 영화 속 고담처럼 이미 화약고다. 이 영화가 그 화약고라는 것을 알리는 - 경각심을 주는 영화가 될지, 아니면 조커에 동조하여 화약고에 불을 댕기게 되는 영화가 될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 영화는 우리를 무척이나 흔들어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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