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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May 01. 2020

부부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 사이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관계 처방전

사람의 마음. 그것만큼 어려운 게 있을까. 눈 앞에 있어도 그 사람의 생각은 알 수가 없다. 생각을 알 수 없는데, 생각을 살 수나 있을까. 나를 떠올리게 하고 그 일상 속에 파고들어 나의 지분을 늘릴 수 있을까. 그래서 마주치는 모든 날들을 나의 날로 만들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까.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고 나면 이런 질문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한때 사랑했다 한 사람들도 이렇게 전쟁을 치른다. 상대를 증오하고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오점으로 취급한다. 사랑을 키우고 나누고 그리고 그 사랑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꿈이라면 이 드라마는 그 꿈을 완전히 박살 낸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지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관계가 지옥이라는 증거는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차고 넘친다. 짧은 애정의 시기를 지나 길고 긴 권태의 동굴을 증언하는 사람이 많다. 책임과 구속의 관계를 시간 낭비 감정 낭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부부의 세계를 보면, 여러 부부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믿음이 어긋나며 그동안의 모든 시간들, 그 마음을 부정당하는 - 고통과 혼란, 슬픔과 허탈함을 이야기한다. 그건 확실히 드라마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며 우리, 우리 사랑에 매우 가까운 이야기다. 마치 현실 고증을 한 듯이.


부부가 된다는 건 하나의 강한 약속이다. 서로에 대한 집중, 감정에 대한 세심한 시선, 마음을 내놓은 정직함과 믿음을 지탱할 수 있는 말과 행동들 말이다. 일일이 계약서를 쓰면서 명시하지 않아도 평생을 같이 하자고 부부가 된다는 의미에는 위와 같은 기대가 같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부부가 시간을 보내며 이런 기대보다 실망과 포기가 많아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상대방에 투사했던 어떤 그림이 어긋나는 과정이 부부 생활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부분이 나오는 것.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그 결과 권태와 외도로 이어지고, 현실 부부의 세계에서는 서로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는 서글픈 상황이 연출된다.


부부가 세운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왜 이 사람을 선택했을까 라는 생각과 포기하고 방임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에 대해 나태해지는 과정이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부 사이, 아니 누군가와 긴밀히 맷는 관계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불행이다. 부부는 서로의 기대를 채워주는 관계가 아니다. 부부는 그저 계약에 붙어있는 관계일 뿐 엄밀이 말하면 완전한 타인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타인인데 부부 사이에서는 배우자가 타인임을 잊기 쉽다. 그저 내 안에 소속된, 그래서 완전히 내 세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정도 안에서 상대방을 인식한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보자. 그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낯설고 그래서 궁금한 사람이었다. 서서히 알게 되면서 그 사람은 어느새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된다. 궁금함과 낯섬은 끝을 맺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다음으로 단정이 일어난다. 상대에 대해 이미 만들어둔 내 선입견과 편견으로 이뤄진 세계에 상대를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다시 재단한다. 상대의 말과 행동은 그때부터 내 의식 속에서 정의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그 사람의 실제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상대의 마음’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은 너무나 교묘하게 이뤄져서 전혀 문제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상대의 문제로 전가하기도 한다. 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소통할 수 없다. 소통하지 않으니 관계에 권태가 심화되고 경직되기 시작한다.


관계를 위해 우리는 상대를 내 안의 존재, 내 삶의 일부-사랑 고백에 이런 표현이 주로 쓰이지만-로 여기지 않고 내 세계관 바깥에 엄연히 존재하는 그 사람의 존재 그대로와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느끼는데 애써야 한다. 끊임없이 낯설게 느껴야 하고 새롭게 보고 단정 짓지 않는 마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의 삶과, 그의 마음과, 그의 고민과, 그의 슬픔, 고통, 그리고 걸어왔던 길들, 가치관이 생성되어 왔던 과정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민감하게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라도 어제와 오늘 새롭게 업데이트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사랑하고 연결되어 있으니 - 내가 기대하고 단정한 - 어떤 그림에 맞춰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현실판 부부의 세계를 만든다.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 보게 되는 배우자가 항상 낯설어야 한다. 익숙해지는 순간 권태가 시작되고, 관계의 방치가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 사람 그 사람이 나의 연인이고 배우자이어야 한다. 호르몬에만 의지했던 연애 초반을 넘어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 그저 사랑이라 하는 것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관계의 기술이며, 그것만이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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