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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Aug 13. 2024

관계의 공식

이혼결투 소셜클럽

“이게 뭐죠?”

서류를 살펴보는 하나 대신 대준이 묻는다. 그레이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통창 앞에 선다. 역광이라 그런지 그레이스의 얼굴이 어둡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혼이 정말 어려웠어요. 교회의 힘이 커질 대로 커진 시기라 남녀의 이혼도 신의 권위를 거스르는 거라고 했죠. 그래서 이혼하려는 부부들은 성직자에게 뭔가를 계속 증명해야 했어요. 이혼의 당위성 말이에요.“


그레이스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살펴보던 하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런 하나의 표정을 대준이 힐끔 바라본다. 그레이스가 이어 말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치는 거죠. 그러면 상대를 죽여도 상관 없었으니까.“

그레이스가 하나와 대준 앞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는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이 길었네요. 제 말은 어떻게든,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다는 거예요. 매일 아침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역겨웠을 거니까. 그래서 성직자 한 명이 시작했어요. 비밀 이혼결투 소셜클럽이란 거.”


그레이스의 말을 사실이었다. 중세는 쓸데없이 이혼이 어려웠다. 특히 여성의 권리가 바닥에 있던 시절이라 결혼 제도는 여성에게 무척이나 불리했다.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결혼생활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이혼은 사회 분위기가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이혼을 시도할 수는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지만, 그런 건 이혼 사유에 들지도 못했다. 이혼의 사유로 고려되었던 것은 남편이 고자이거나 부부가 친척 사이인 것 따위였다. 그 외에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도 관계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 버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이중에서는 비교적 수도원 옵션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도망치듯 수도사가 되거나 수녀가 된 젊은 남녀가 많았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이 좋아서 금욕을 택한 건 아니었으므로 혈기왕성한 시절 금기된 연애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 금발에 검은 눈을 가진 남자가 영국의 수도원에 들어왔다가 여러 명의 젊은 수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서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수도원은 근엄하며 정적이며 정적이 잦고 마음이 움직일 일이 많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루틴에, 항상 같은 곳에 있는 신을 향해 경배하는 곳이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색이 모두 빠져나간 흑백과도 같았다. 그렇게 고요한 수면이었으나,


그 검은 눈 수도사의 미모가,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해도 수도원이 가진 수면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스스로는 원한 적 없지만 그리 되었고, 본 투비 유죄 인간이 되었다. 수녀들은 그를 훔쳐보느라 신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그가 한번 웃어준 날에는 신도든, 수녀든 상관없이 한껏 정신을 놓았다. 그가 가진 미모의 매력은 성별도 뛰어넘었는데 그를 처음 본 성직자는 이렇게 소리 질렀다.

”오, 마이 갓“


그것은 진정 신에게 외치는 소리였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겼는지 바티칸에서도 예의주시한 사건이 되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징계를 받았다. 사람과 일절 접촉하지 않아야 하는 징계였다. 그렇게 검은 눈 수도사는 외딴 숲 속의 종탑 꼭대기 층에 3년 간 갇혀 살게 됐다.


3년이 지났고, 검은 눈 수도사가 우거진 숲 속 종탑 꼭대기층 감옥에서 내려왔다. 계단도 없는 탑이라 벽에 기댄 사다리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바티칸은 그 정도 시간이면 여인들을 희롱할 미모가 약해질 거라 판단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분명 행색은 거지 꼴이었지만, 안광이 남달랐다. 오히려 그 시간은 신앙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그는 차가워졌으나 뜨거워졌고 옳고 그름과 바르고 악함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얻었다. 소위 수많은 구루들이 경험했다는 깨달음의 근처까지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다다르지 않고 그즈음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윗사람들은 그런 그가 달갑지 않았고, 궁여지책이라도 얼굴 전체를 천으로 가리도록 명령했다. 그에게 주여진 일은 오로지 하나, 누구도 대면할 필요 없는 고백성사 성직이었다.


검은 눈의 수도사는 불평하지 않았다. 0.1평의 고해소 안에 종일 머물면서 묵묵히 신도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씻어줬다. 신도들이 털어놓는 고해 종류는 다양했다. 그중의 8할은 가까운 사람으로 인한 고통과 죄였다. 그리고 그중의 9할은 배우자에 대한 고통이었다.


저번주에 신의 이름으로 맺어준 남녀가 번갈아가며 찾아와 상대를 죽이고 싶다며 마음의 죄를 씻어달라고 고해성사를 하기도 했다. 가문의 정략결혼이어서 5년은 참고 살았지만 얼굴이 못생긴 건 참을 수 없다며 아침마다 몰래 헛구역질을 하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여인도 있었다. 매일 저녁 남편의 손찌검을 당하는 가엾은 여인은 매일 아침마다 찾아와 “제발 그 사람을 안 보게 해 주세요. 제발 그 사람을 안 보게 해 주세요.”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돌아갔다. 끝이 없었고 끝도 없었다. 매일 매시간 죄는 수도사에게 쏟아졌고 그칠 기새가 없었다. 한참을 울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술 취한 것처럼 죄를 털어놓고 허겁지겁 떠난 어떤 남자의 고해성사 후, 잔뜩 건조해진 고해소 안에서 수도사는 생각했다.


<금기를 깨면서까지 사랑을 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던 인간이 왜 서로를 멸시하게 되는 걸까>


남녀 교제를 해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완전히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검은 눈 수도사는 신이 빚은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이 품을 수밖에 없는 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수도사는 노트를 꺼내 자신의 생각을 옮겨 적었다. 우선 모든 사람은 각자의 모양대로 가지각색의 삶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결혼은 무엇일까? 다른 모양의 삶과 죄가 부딪히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괴로운 이유를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 부딪힘 때문이다. 수도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를 수학적 공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부부 각 개인과 그들의 삶, 그들의 죄,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을 변수로 설정했다. 개인의 제각각인 삶의 모양과 죄의 모양을 가지고 괴로움의 크기를 쟀다. 어느새 낡은 공책에는 단순한 수식이 완성되어 있었다.


A와 B 사이의 괴로움 D =

f(A와 B가 가진 삶 L의 모양 차이, A와 B가 가진 죄 S의 모양 차이)


당최 큰 소리를 낸 적 없던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어 검은 눈의 수도사 본인까지 고통스러웠던 그에게 유레카 같은 순간이었다. 고해소 밖에 다른 수도사들은 매일 같이 고통을 자기 걸로 만들다 드디어 미쳤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수식에는 힘이 있었다. 단순했지만 명료했다. 괴로움 D를 줄이면 되는 거다. 수식에 의하면 D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 삶의 모양 차이를 줄인다. A와 B가 서로의 삶의 방식을 조율하며 이해와 타협을 통해 삶의 목표와 방향을 유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죄의 차이를 줄인다. A와 B가 각자의 잘못을 줄이거나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노력을 통해 차이를 줄여나간다.


셋째. 부딪힘의 민감도를 줄인다. f함수의 민감도를 줄이자는 의미이다. 같은 차이지만 큰 관용을 가지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괴로움을 덜 느끼도록 할 수 있다.


“제가 발표했던 이끌림의 법칙도 따지고 보면 그분의 영향이 있었죠. 아니, 받았어요. 부인은 못하죠. 관계학의 창시자 같은 분이니까.”

수도사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그레이스는 빙긋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이론이 현실이 적용이 되나요. 아무리 고해소에 찾아온 이들에게 좋은 방향을 설파해 봤자, 이미 괴로움에 젖은 이들을 구제할 수 없었어요. 제 솔루션도 비슷한 맥락인 거고요. 삶은 계란을 냉장고에 넣은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거죠.”

그레이스의 말에 대준은 자기를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움찔했다. 변하고 싶지만, 이미 변할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르렀음을 알기에 아무리 깨달은 구루가 수식이고 나발이고 들이밀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괴로움 D가 이미 적정치를 넘어 빨간 불을 울리고 있었음을. 그 사이에 하나는 여전히 그레이스가 내민 서류를 살펴보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처음에는 반포기였다고 해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론을 계속 다듬어갔죠. 참 매력적인 사람이죠? 지금 시대 사람이었다면, 내가 비혼일 일은 없었을텐데.“

그레이스가 웃으며 말한다.

”농담이에요. 그분 행적은 자세히 나와있지 않아요. 이름도 모르는걸요. 저희가 아는 건 그가 다음 해에 이 클럽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거예요.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러니까 열렬히 신도의 고통에 공감하던 그가 서로를 죽이도록 등을 떠미는 결투클럽을 열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 클럽이 첫 해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거죠. 대단했다고 해요. 그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고, 지금.“

그레이스가 하나와 대준에게 손을 펼치며 말한다.

”여러분에게까지 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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