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결투 소셜클럽
“서로를 죽이고 싶을 만큼?”
그레이스가 둘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충분히 내뱉을 만한 문장을 꺼냈다. <죽이고 싶다>와 <사랑한다>는 양 극단에 위치할 만큼 성립할 수 없는 표현인데, 이상하리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내 간이라도 빼줄 만큼 사랑하던 사람의 심장에 칼을 찌른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아이러니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레이스는 그렇게 물은 것이다.
대준은 생각했다. 하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언제였더라. 집은 항상 적막했다. 대준은 하나에게 필요한 말만 했다. 가령 관리비가 나왔다거나, 이번달에 휴가가 없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하나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표정으로 답했다. 가끔 재미없는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보다가 함께 실없는 웃음이 터질 때면, 그 웃음이 저문 이후 적막감이 더 심했다. 그러다가 항상 대준은 혼자 화장실을 가거나 폰 게임을 하는 식으로 하나를 피했다.
“사랑해.”
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언젠가 존재했던 감정으로부터 어디까지 멀리 왔을까. 둘 사이의 한번 어색해진 공기는 마치 삶은 달걀 같았다. 아무리 냉장고에 다시 넣는다고 해서 생달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시간 때문일까? 10년이라는 시간이 쌓이면서 멀어진 걸까? 10년 이상 오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걸까? 대준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래된 친구에게도 상담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야, 여자들은 다 그래. 남자들 위에 서려고 한다고. 그래야지 자기들이 편하니까.”
친구는 이미 ‘감정적 이혼’ 상태였다. 행복하지 않은데 왜 그렇게 사냐고 물었다.
“그냥 사는 거지. 인생 뭐 없어. 지지고 볶고. 그게 삶인 거야 임마.“
친구 놈은 술잔을 따르며 인생을 통달한 냥 충고한다. 역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준은 원체 감정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결혼 이후에 더 박했다. 하나가 보기엔 감정 없는 로봇처럼 보이기도 했다. “변했다”는 하나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대준은 사랑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랑했었을 그 당시를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함께 학식을 먹으며, 벚꽃 나들이를 가서 셀카를 찍으며,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첫 키스를 했던 그 순간들은 기억의 편린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 기억들, 그 냄새와 촉감, 그 간지럽히는 기분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대준은 분명 최근에 꺼내볼 수 있는 사랑이 한 조각도 없었다.
그저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마라탕후루를 췄던 그때처럼 매일 저녁 퇴근 후에 같이 한바탕 댄스를 추고 바닥에 누워 배를 잡고 웃고 싶었다. 댄스는커녕 그저 한 공간에 머무는 각자의 사람으로, 각자의 삶이 텅 빈 바다에 빙하처럼 표류하게 되었을 때 대준은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정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 사랑은 분명 깨졌다고 여겼다.
“그럼요. 하루에 밥 먹을 때마다 해요”
“저는 화장실 갈 때마다 생각합니다“
대결도 아닌데 죽이고 싶은 생각은 더 많이 한다며 하나와 대준은 나서서 말했다.
하나는 대준을 죽이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측은했다. 그녀는 대준이 이런 감정에 어수룩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좋았다. 자신과 반대였고, 반대여서 그레이스가 주창한 <이끌림의 법칙>대로 서로를 이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는 점점 닳았고, 소모됐다.
감정이란 하나 그 자체였다. 생물처럼 움직이는, 사랑하고 즐겁고 울고 슬프고 환호하고 우울하고 증오하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불꽃이었다. 하나는 그 불꽃이 싫지 않았다. 생동을 주었고, 흔들리면서 꺼지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과정이, 하나를 하나답게 했으니까.
하지만 하나의 불이 하나씩 꺼졌다. 하나의 불이, 감정의 파도가 대준의 인생과 맞닿았을 때 그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모조리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의 표정과 제스처, 말투와 그 주변의 온도까지 말이다. 하나의 육감은 더 나아가 대준의 생각까지 읽었다. 경멸하며 부정하는 아우라가 대준으로부터 뿜어 나와 하나를 마구 찔렀다.
한 번은 2세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설거지를 하며 소파에 앉아있던 대준에게 툭 던진 이야기였다.
”친구 아기 만나고 왔잖아. 엄청 귀엽더라.“
”그래? 아기 별로 안좋아했잖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대화가 끊겼다. 하나는 접시를 달그락 소리를 내며 건조대에 올려둔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오빠는 아기 생각 없어?“
“귀여운 걸로 아기 키우면 엄청 힘들걸. 그럼 처음부터 안 갖는 게 좋아.“
”오빠 생각을 물었잖아.“
”나는… 큰 생각 없어.“
접시가 달그락거리며 집에는 정적이 흐른다. 신혼이었고, 대준은 이후 속이 상한 하나를 밤새 달랬다. 하나의 꺼진 불을 다시 살리기엔 역부족이었지만.
하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대준의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마구 일렁이던 감정의 불은 이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분해졌고 차가워졌다. 그러자 오히려 하나는 자신을 책망했다. 하나가 친한 친구에게 보낸 문자에는,
“모르겠어. 오빠는 오빠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내가 내 눈높이대로 너무 다그치는 걸까? 무슨 이야기만 하면 싸움이 되니까 너무 지쳐. 내가 쌈닭이 된 것 같고. 그런 나를 보는 오빠 눈빛도 너무 싫고.”
라고 털어놨고 남편과 한 번도 싸운 적 없다는 평화주의자 친구는 대화를 좀 깊게 가져보라는 교과서적인 충고를 줬다. 물론 흐린 눈으로 봐도 대준 친구의 충고보다는 100배 나았다.
하나의 바람은 단순했다. 그 단순함이 대준에게는 일생일대의 난제였을지는 몰라도 하나는 그저 대준이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때 자신을 바라보며 한 자리에 우뚝 서있길 원했다. 파도에 어딘가로 떠내려가도 대준이 서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그레이스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제가 봤을 때 두 분은 아직 서로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아끼는 것 같고. 이혼은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관계는 장기전이거든요.“
그레이스가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하나는 반박할 새를 놓쳤다. <내가 이렇게 불행하다>라는 사실을 애써 증명해야 되는 것이, 힘들게 상담가를 찾아온 순간까지도 또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저희는 문제를 느끼고 있어요”
하나 대신 대준이 말했다. 보통 이런데 나서지 않는 대준이라 하나는 살짝 놀랬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그럼요.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그럼 제 생각을 이야기드릴게요. 티비에서 부부에게 솔루션을 준다고 상담해주고 하잖아요? 저는 사기라고 생각해요. 솔루션? 말도 안 됩니다. 두 분의 이야기를 제가 여기서 지금 20분 정도 들었죠. 그 정도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제가 독심술이 있다거나 인간관계를 통달한 마녀라면 딱 떨어지는 해법을 드릴 수 있어요. 아쉽게도 저는 박사학위 따위밖에 없는 베스트셀러 작가 교수랍니다.“
그레이스가 둘을 번갈아보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럼 아마 반문하시겠죠. 그럼 당신의 역할은 뭐냐 말이죠. 제 역할은 모더레이터입니다. 중재하는 거죠. 저는 해법을 알지 못해요. 솔루션은 두 분이 찾아가야 해요. 아니면…”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고.”
하나는 그레이스 이야기를 듣고 대준이 오래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마 결혼 직전이었을 것이다. 서로 애틋했을 때였고, 회사의 팀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대준을 하나가 위로하던 때였다.
”우리가 한 팀이다. 그치.“
대준이 커피를 마시다 뜬금없이 말한다.
”조별과제 할 때 팀 같은거?“
”뭐 비슷하지. 팀 만들 때 최대한 과제를 잘 완성할 수 있게 도와줄 팀원을 뽑잖아. 무임승차하지 않고 성실하게 잘해줄 팀원.“
”맞아. 팀원 고르기 정말 어려웠지. 스트레스도 많았고. 사람 관리가 제일 어려운 거 같아.“
대준은 그렇게 말한 하나를 바라보며 손을 잡는다.
”인생을 살면서 그 팀원을 한 명 뽑을 수 있다면 나는 너랑 같이 갈거야.“
”으… 또 플러팅?“
”플러팅 아니야. 그냥 든 생각이야. 아니 오래전부터 했던 생각이야. 내가 너한테, 네가 나에게 가장 합이 맞는 콤비니까. 그렇게 생각해서 그래. 우리 둘 다 팀장이고 팀원인 팀이야. 어때.“
”그럴듯하네. 팀장님.“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하나를 보면서 대준은 또 배를 잡고 웃었다. 여름이었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다.
“그래서 두 분에게 제안을 하나 드리려고 해요.”
서랍을 열쇠로 열더니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낸다. 봉투는 붉은 씰로 봉인되어 있다.
“두 분이 서로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제안입니다. 모더레이터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이에요.”
하나가 봉투를 받아 든다. 대준과 눈을 한번 마주친 다음, 씰을 제거한다. 봉투 안에는 작은 서류가 들어있다. 서류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이혼결투 소셜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