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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Aug 06. 2024

결투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혼결투 소셜클럽

“결투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나는 휴대전화 너머 건조하게 이야기하는 모더레이터의 얼굴을 상상한다. 무슨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전혀 신나지도, 전혀 슬프지도 않다. 하나도 물 먹은 종이처럼 적셔들어서 몸이 무겁다. 침대에 걸터앉아 무표정하게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레이스, 참으로 모순적인 이름이다. 하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준과 함께 상담을 갔을 때 명함을 받아 들고서 말이다. 은혜, 은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혼 상담사라니. 아니지. 이혼이야말로 은총일까. 그레이스를 다시 보자 성모 마리아처럼 웃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투명 링이 보이는 듯도 했다. 하나는 옆에 앉은 대준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좀처럼 알 수 없다. 대준이 명함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기어코 두 번 꾹꾹 접는다. 명함을 준 사람 앞에서 그러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 사람은 그냥 나를 긁고 싶어서 안달 난 거다. 하나는 눈을 찔끔 감았다. 만성 통증이 올라왔다. 몇 년 전부터 눈두덩이와 뒷목이 아팠다. 아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안마를 해봐도 낫질 않았다. 못 고치는 병인가 보다 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 씨의 몸은 스스로 관리할 수 있지만, 밖에서 오는 스트레스 자체를 관리할 수는 없어요. 유일한 방법은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 자체를 피하거나 없애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 있으신가요?”

그래, 예전에는 화병이란 게 있다고 했지. 천불이 올라서 안에서 부글부글 끓다가 결국 자신이 주전자 신세가 되어버린. 하나는 자신도 끓어버린 주전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안에 물이라도 있었지만 수증기로 다 날아가버려서 남아있는 건,


다 타버린 바닥뿐인 주전자.


대준은 주전자를 잘 쓰지 않았다. 물을 컵에 한 번에 담아두고 마시는 타입이었다. 주전자를 따르고, 냉장고를 열고 닫는데 불필요한 에너지가 쓰인다고 생각했다. 식탁 위 어느새 대준의 전용이 된 컵의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서 하나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문제가, 있다고. 대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둘의 문제가 있다면 둘이 풀어야지, 왜 제삼자에게 컨설팅을 받는 걸까. 컨설팅이라는 건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했다. 홍보 컨설팅을 하며 돈을 받는 대준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만큼 우리의 문제를 아는 사람이 없잖아,라고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한참을 잔소리 들을 것이 뻔했다. 관계 회복의 의지가 없다고 말할 것이 귀에 아른거린다. 대준이 뭐라고 말하든 하나는 반박할 것이다. 대준은 입을 닫았다. 말이 안 통한다고, 대준은 생각했다.


어느새 그레이스라는 이혼 상담사 앞에 앉아있는 대준은 옆에 앉은 하나를 힐끔 본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경청하고 있다. 크리스털을 넣은 것 마냥 눈이 반짝. 집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대준은 자기 이야기는 한 번도 저렇게 들어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잘 듣고 있구나. 잘 듣는 사람이었구나. 대단하다는 사람에게만 저런 눈빛을 주는 걸까. 나는 그럼… 그런 생각에 이르자 명함이 형태를 알 수 없게 찢어졌다. 이런. 비즈니스를 할 때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데. 대준은 슬그머니 명함을 손바닥에 숨겨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레이스가 못 봤기를 바라며.


“십 년이 넘은 사이시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하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레이스는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어색함을 봤다. 그 어색함이란, 십 년이 넘은 관계에서 오히려 나타나는 것. 그레이스는 이 어색함이 나타나는 전개 방식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론 학계는 어색했다. 관계를 수식으로 표현하는 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시도하는 거라고 여겼기에. 물론 그레이스는 틀을 깨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이런 부부가 반가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너무 내색하면 프로가 아니지.


그레이스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양과 음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파지티브와 네거티브. 베스트셀러 저서 제목도 “이끌림의 법칙”이다. 쉽게 설명하여 자석 같은 것이라고 그레이스는 설명했다. 이끌림의 법칙 챕터 3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사람의 정신에는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가 조화롭게 발산되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사람을 만날 때는 어떨까. 사람에게는 이 에너지가 다른 방향으로 표출된다. 에너지는 질량이 되며 질량은 중력이 된다.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무엇을 끌어당길까? 그게 바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자신에게 없는 에너지의 본체를 끌어당긴다. 양의 에너지는 음의 에너지를, 음의 에너지는 양의 에너지를 당긴다. 그것들은 선천적으로 끌리며 말로 설명하지 못한 이끌림에 휩싸인다. 우리가 흔히 ‘사랑에 빠진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레이스는 대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시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대준은 다 마신 커피잔을 빙빙 어루만지며 머뭇댄다. 하여간 익숙하지 않다. 회사에서는 나름대로 인정받는 팀장이지만, 진짜 자기 말은 아직도 입안에서만 맴돈다. 보다 못한 하나가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만났어요. 취업동아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친해졌죠. 자만추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복학생 대준은 신입생으로 일찍부터 취업 준비를 하겠다고 들어온 하나가 예뻐 보였다. 언젠가는 대준에게 “선배 마라탕 사주세요!”라고 묻다가 별안간 마라탕후루 노래를 부르며 챌린지 춤을 춰버리길래 대준은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웃었다. 웃긴 여자가 이상형이었다. 유쾌하고 잘 웃는 여자. 주변에서 4차원 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하나에게 대준은 말했다.

“넌 4차원 정도가 아니라 한 12차원 정도 되는 것 같아.”

“12차원은 처음 들어보네요. 왜요?”

“4차원처럼 엉뚱한데, 가만히 보면 진지한 면도 있고 또…”

“또요?”

“예쁘기도 해서. 그래서 4x3=12. 12차원.”

“이거 플러팅이에요?”

“플러팅이 뭐야?”

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되묻는 대준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크게 웃었다. 하나의 이상형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대준의 눈에 거짓말이 없었다. 하나는 그런 대준이 썩 맘에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하나가 말했다. 하나의 말대로라면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금세 후회했다고 했다. 냉장고에 넣지 않고 항상 식탁 위에 빼놓는 컵 안에 미지근해져 버린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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