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 미학
고속버스로 3년 동안 출퇴근을 하다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기사의 오늘 컨디션과 같이 동승하는 무리의 얼굴들, 그리고 어디에 앉아야 가장 편할지와 내 의자를 몇 도 가량 뒤로 젖힐 수 있는지 따위들 말이다.
그 중에서도 하루의 두 번,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들 속에 두드러지는건 옆자리의 장면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등을 제외하고 모든 버스는 두명이 '함께' 앉도록 설계됐다. 여유있는 주말에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두명이 아니라면, 통근하는 모든 직장인과 통학하는 모든 대학생은 낯선 누군가의 옆에 앉아 1시간, 왕복 2시간을 보낸다.
그건 마치 제비뽑기 같은 것이다. 내가 17번을 골랐을 때 어떤 누군가가 18번을 뽑는다면 나와 같이 앉는 것이다. 번호를 고를 때는 누가 앉을지 전혀 알 수 없다.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작위의 어떤 사람이.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는 이것은 사실 보통의 일상 속에서 겪기 힘든 무척이나 묘한 경험이다.
최근에는 이 경험을 극대화시키는 시스템을 고속버스가 만들었다. 승객 승차조회를 모두 디지털로 바꾸면서 모바일 표를 버스 입구에 설치된 키오스크에 인식시키면
"16번 좌석입니다"
라는 기계음이 들린다. 그럼 나는 15번 좌석에 앉아 16번이 누구인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가방은 어떤 것을 매었는지, 덩치가 큰지 작은지. 아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좌석에 앉아 재빨리 잠을 청하거나 스마트폰 삼매경을 하고 있겠지만. 어쨋든 나에게는 1시간 동안의 인연인 것이다.
오늘 나의 자리 번호는 14번이다. 통로 쪽이고, 앞 바퀴와 뒷 바퀴의 진동이 최소가 되는 중간 좌석. 13번은 수트를 입은 회사원이다. 외모만 봐서는 은행원 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펀드 매니저. 끊임없이 노트북으로 차트를 보고 있다. 통로 건너편의 옆자리인 15번은 50대 아저씨다. 투명 가방 안에 자전거 헬멧이 보인다. 그 앞자리에는 웹툰을 보고 있는 여자가, 그 옆에는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근육질인 남자가 앉았다. 창 밖의 어둠이 내리고, 달리는 버스 안에 '오늘 처음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이 가까이에 앉아있다.
한때는 버스가 수면 가스를 내뿜는다고 생각했다. 이들과 인사하기 전에, 그 누구도 옆 사람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도록 에어콘 바람에 수면 가스를 섞어 내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좀비처럼 승객들이 잠드는 것이 - 한시간 짜리 수면을 취하는 것이 버스 내의 친목을 다지는 모양보다 버스 기사의 입장에서 매우 깔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수면가스가 없더라도, 모두가 잠드는 버스 안. 서울에서 평택으로 가는 버스. 내 옆자리에 또 하나의 인생이 있다. 내가 살아온 그 시간과 고민 만큼의 우주가. 통성명하지 못한 낯선 우주들을 태우고 간다.
한 시간이 끝났다. 마치 놀이기구의 짧은 어트랙션 처럼. 모두들 서둘러 내린다. 13번의 은행원인지 펀드매니저인지 모르는 남자와 웹툰을 정주행하다 잠들었던 여자도, 마동석 같던 남자도, 자전거 동호회를 즐길 줄 아는 아저씨도.
각자의 자리로.
마치 없던 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