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
지난주 남편의 사업장 정리가 완전히 끝났다.
장장 두 달 동안 둘이서 쓸고, 닦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물건 더미였던 창고를 다 비웠다. 무거운 물건들은 둘이서 어쩔 수 없어 걱정했지만 감사하게도 남편의 친구들이 매일 찾아와
조금씩이라도 같이 치워주었다.
마침내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기나긴 정리가 끝이 났다.
남편의 표정은 원래 무표정일 때가 많아서 기분을 잘 읽을 수 없지만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잘해보고 싶었던 자신의 일터를 자기 손으로 헐값에 정리하는 일이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나는 누구보다 그에게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줬어야 했는데
미안하게도 생각만큼 큰 위로를 주지 못 했다.
그저 회사를 정리할 때 옆에서 같이 돕고,
그의 허탈함과 고단함을 옆에서 들어주는 역할만을 해 줄 뿐이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불안했던 나는 그마저도 완벽하게 해 주지는 못했다.
오늘 아침, 내내 아무 말 없이 노트북 모니터 너머로 이것저것 체크하던 남편의
표정은 어제보다 더 어두웠다.
일 좀 잠깐 보러 온다고 나가더니
초저녁쯤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전했다.
“여보, 나 내야 할 돈이 3만 불이나 된대.”
사업체로 쓰고 있던 공간의 밀린 임대비와 세금이 3만 불, 한국 돈으로 2400만 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잠깐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고, 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숨이 가빠지고, 마치 갑자기 마주한 환자의 응급상황 때 내 몸의 반응과 같았다.
그렇게 큰돈을 갑자기 어디서 마련하지?
하지만 이내 이상하리만치 잠깐 마음이 차분해졌다.
남편의 빚고백에 지금 내 뇌는 위기상황이라고 느끼고
나의 편도체가 한껏 활성화 됐구나,
그래서 심장을 더 빨리 뛰게 만들어 도망 혹은 싸울 준비를 하고 있구나.
하지만 이건 곧 사라질 잠깐동안의 몸의 변화임을 자각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느낀 이 두려움을 남편에게 표현하지 않기로 했다.
내 인생은 순간순간 나의 선택에 달려있으니 최선의 선택만 하며 살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에는 남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언젠가 사라질 이 걱정거리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남편을 혼자 두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내야 할 돈이 훨씬 더 많네?”
“응, 세금하고 공과금도 밀린 게 꽤 됐었나 봐. 오늘 그 이메일 받고 기분이 다운 됐었었던 거야. 당신한테 말하기도 그렇고.. 걱정할 테니까.. 고민하다가 말한 거야.”
“잘했어. 당신이 다른 업체에서 받아야 할 돈도 있고, 지게차도 팔면 돈이 얼추 마련되지 않을까?”
“그렇지.. 그리고 나도 일을 곧 시작해서 갚아야지. 오늘 회사 한 곳에 가서 사장님하고 얘기해 보고 왔어. 될지 안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편은 오늘 빚을 갚으라는 그 이메일을 받고 하루 종일 어깨가 참 많이도 무거웠겠구나.
바로 말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을 남편의 뒷모습이 뭉클했다.
남편을 안아주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자.”
남편과 같이 부엌에서 저녁으로 먹을 카레를 만들었다.
우리가 요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옆집 이웃사촌들과 집 앞에서 같이 킥보드와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놀고 있었다.
중간중간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순간이 왜 그렇게 나에게 안정을 주었을까?
시간이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늦은 저녁, 아이들을 재우고 나는 노트북을 켰다.
유튜브에 초보자도 쉽게 엑셀로 가계부 쓰는 방법이라고 검색했다.
이제껏 수기로 노트에 간헐적으로 돈의 입출기록을 쓴 적은 있지만
엑셀로 우리 집 돈의 흐름을 확인해 본 적은 없었다.
그동안 엑셀이라는 존재는 내게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져서 시작도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다행히 친절하고 다정하게 설명해 주는 선생님을 따라
장장 2시간에 걸쳐 내가 원하는 모양의 가계부를 완성했다.
너무 뿌듯했다.
기록하다 보니
그동안 예상치 못 하게 통장에서 확 빠져나갔던 목돈들
1년에 한 번씩 크게 빠져나가는 자동차, 집 보험, 집 세금 등등
모두 합쳐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목돈이 갑자기 빠져나갔다고 안절부절못하던 나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고
왜 그랬을까.. 자책했다.
연마다 빠져나가는 공과금을 12달로 나누어 계산했더니 내가 매달 따로 빼놓아야 할 금액이 나왔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매달 투자 계좌로 돈을 보내고 있었다.
눈앞에 꺼야 할 불은 보지 못하고, 먼 미래에 다가올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저축을 해 오고 있던 셈이었다.
오늘 남편의 빚 고백은
우리 집 엑셀 가계부의 탄생을 있게 했고,
돈보다 가족들과의 웃는 일상이 더 중요한
나의 성향을 깨닫게 해 주었고,
오늘 내가 내린 선택들에 뿌듯했던
내게 자존감을 선물해 주었다.
남편과 나는 빚더미에 앉았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함께 하는 저녁시간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나의 소중한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 내 곁에 있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