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무슨 와인이었더라?: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기억들이 주는 의미
천문학을 직업으로 가지게 되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학회나 관측을 핑계(?)로 다른 나라들을 가 볼 기회가 많다는 점이다. 혹은 필자처럼 아예 다른 나라로 이사를 해서 한 2-3년 살아 볼 기회도 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네덜란드에서 사는 동안 네덜란드의 지리적 여건의 이점을 살려, 와이프, 아이들과 시간 날 때마다 자동차로 유럽 여기저기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빠듯한 형편에 아끼고 아껴서 좀 궁상맞게 다니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그리운 시간들이다.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여행은 가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경치가 좋은 곳을 보러 갈 수도 있고, 보고 싶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는 곳을 찾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것은, 아름다운 자연도, 멋있는 건물이나, 미술작품도 아닌, 때때로 굉장히 사소한 것인 경우가 있다.
여름휴가를 맞아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시작해서, 프랑스 파리와 보르도를 지나 남 프랑스 해변을 따라가다 알프스 산맥 밑자락에서 방향을 틀어 스위스를 들러, 프랑스 독일 접경지역을 따라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꽤나 긴 여행이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가려운 곳 속 시원히 긁어보지 못한 것처럼 계속 머릿속이 남아 있는 것은 스위스 라우터브루넨의 숙소에서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바라보며 와이프와 마셨던 와인 이름이다.
그전부터 스위스는 물가가 살인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우리는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넘어가기 전에 장을 봐서 가기로 했다. 레만 호수를 따라가다가 우리에겐 생수이름으로 유명한 마을, 에비앙에 들러서 장을 봤다. 조그만 슈퍼마켓이었는데 쇼핑 바구니에 먹을 것을 이것저것 담고 나서 지금 기억하기로 5유로가 채 안 되는 레드 와인 하나를 담았는데 "Chateau de..."라고 적혀있었다. 라우터브루넨에 짐을 풀고 멀리 폭포를 보면서 저녁을 일찍 먹었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맛있는 와인은 처음이었다. 아마 주변 경치 탓이 컸겠지만 5유로가 안 되는 와인이라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와이프랑 서로 이 와인 이름을 꼭 기억해서 (왜 사진 찍을 생각을 못 했나 모르겠다) 나중에 찾아보자고 얘기를 하고 여행에서 돌아와 기억을 더듬는데 "Chateau de"까지 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대부분 와인들이 다 "Chateau de"로 시작하는 라벨이 붙어있고 정작중요한 건 그다음에 나오는 지명이라는 사실을. 외우려면 "Chateau de" 다음에 오는 지명을 외웠어야 했다. 아무리 기억을 하려 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그때 마셨던 와인에 대한 기억이 간절해서 내가 마셔본 중에서 제일 맛있는 와인으로 기억이 남아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때때로 온전하지 않은 기억의 조각을 붙들고 살아간다. 어릴 적 아이가 좋아해서 자주 가던 장난감 가게이름, 어느 해 겨울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우리 식구 모두 정말 맛있게 먹었던 소세지 이름, 여행 중에 지나가다 잠시 쉬러 들렀던 목장에서 직접 만들어 팔던 아이스크림 이름. 그때는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온전하지 않은 그 기억들이 마음속에 점점 크게 자리 잡는다. 이 기억들의 공통점은 '나중에 또 먹으러 오지 뭐', '다시 보러 올 기회가 있을 거야'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순간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요즘은 매 순간 일어나는 일들 중 조금이라도 특별했던 일이라면 잘 기억해 보려고 노력 중이다. 언젠가 두고두고 즐거움을 주는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