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큰 어른

홍승수 선생님을 추억하며

by astro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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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열렸던 '핵합성' 워크숍 참가자들 (왼쪽 사진 하단에서 부터 4열 왼쪽에서 4번째. 홍승수 선생님)

필자가 근무하는 곳 옆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대의 천문학과에 Robert Rood라는 교수의 홈페이지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천문학자들의 모습이 담긴 귀한 사진들이 있다. 어느 날 심심해서 그 곳에 있는 사진들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197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열렸던 '핵합성' 워크숍 참가자들의 사진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몇 해전에 작고하신, 일반인들에게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번역한 분으로 잘 알려진, 고 홍승수 선생님이 찍혀있었다 (왼쪽 사진 하단에서 부터 4열 왼쪽에서 4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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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강의실에서의 홍승수 선생님. (우) 은퇴 후 대중 강연 ("과학하고 앉아있네") 중인 홍승수 선생님

홍승수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31년간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여러 명의 후학을 길러내신 한국 천문학의 큰 어른이다. 본인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천문학을 정말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코펠 하나'만 챙겨 유학길에 올랐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조금이라도 선진 연구를 더 배워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학교의 종용을 최대한 미루고 미루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먹고사는 문제로 산업화에 전력투구하던 한국은 천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고, 그 당시 한국에서 배울 수 없었던 지식에 목말라 힘들게 외국 유학길에 올라 선진 천문학을 배워 돌아와서 후학을 양성하신 홍승수 선생님과 같은 분이 길러낸 후학들이 대학교수가 되어 필자와 같은 세대의 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천문학은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러니 홍승수 선생님은 한국 천문학계의 초석을 다진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한국을 떠나오고 나서는 미국에 연구차 체류하실 때 한 번 뵌 적이 있고, 선생님께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계셨던 라이덴 대학에 40년이 지난 후에 필자가 박사 후 연구원으로 근무했을 때 그곳의 나이 많은 네덜란드 교수가 오래전에 '홍승수'라는 한국인이 있었던 적이 있다고 (그 당시 그 네덜란드 교수는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하는 말을 통해서 또 간접적으로 뵙기도 했다.


엄격하고 수준 높기로 소문난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당시에는 마냥 어렵게만 느껴졌던 선생님이었는데, 위의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의 청년 '홍승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위의 사진은 1974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열렸던, 우주의 원소 합성에 관한 학회로 보인다. 이는 그 당시 천문학 연구의 최전선에 있던 중요한 문제였고, 이를 방증하듯, 사진 속에는 내로라하는 오늘날의 기라성 같은 천문학자들의 젊었을 때의 모습이 보인다 (혹시 천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이 이렇게 한 데 모여있는 것이 얼마나 보기 어려운 조합인지 이해할 것이다).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외롭게 유학생활을 하던 학생 '홍승수'는 저 사진을 찍는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쟁쟁한 경쟁자들과 대가들 (그들 중 일부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아마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사이에 끼어 주눅이 들법한데도 당당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서 필자는 한 젊은 천문학자의 열정과 패기, 그리고 동시에 그의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사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강의 중, 여담으로 하신 말씀 중에 '학회에 가보니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왜 다들 나보다 똑똑하고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샘이 많이 나더라며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어렵게 공부하고 연구한 지식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있어서 선생님께서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집요할 정도로 정성을 쏟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선생님의 뜻을 모르고 설렁설렁 학교를 다녔던 나 자신이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선생님의 강의 노트는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칠판의 판서는 질서 정연했다. 여름 방학인데도 원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수업을 하기도 하셨다 (물론 정식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수업은 아니었고 순전히 선생님의 열정만으로 진행하는 '무료강의'였다).


강의면 강의, 연구면 연구, 무엇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부지런히 살아오실 수 있었는지 지금 천문학을 업으로 삼고 살고 있는 필자는 이제야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다지만, 홍승수 선생님은 뒤를 좇아가기에도 벅찬 분이다.


오래전 보스턴에 와 계시던 선생님을, 가족을 데리고 찾아가 뵈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번역하신 코스모스 번역판을 주시며 그 속에 'XXX에게, 꿈을 드립니다'라는 말을 써 주셨다. 필자도 홍승수 선생님 처럼, 그리고 코스모스의 원저자 칼 세이건 처럼,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필자가 이곳 브런치에서 천문학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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