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들이 다루는 물리량
천문학에서 다루는 숫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고 체감하는 숫자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 '천문학적 숫자'들은 실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숫자들과 비교해 보기 전까지는 그 크기를 체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차이가 천문학을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는 "천문학적 숫자"와 천문학자들이 쓰는 물리량의 단위에 관한 얘기를 해 보겠다.
거리:
새끼손가락을 펴서 시선 방향으로 팔을 쭉 뻗은 후, 한쪽눈을 감은채 새끼손가락을 쳐다보자. 이제 우리 눈과 팔 끝에서 보이는 새끼손가락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을 그리고 눈에 보이는 새끼손가락의 두께를 '호'라고 가정한 부채꼴을 상상해 보자. 이때 그 부채꼴의 중심각을 각도기를 가지고 재면 대략 1도에 해당하는 값이 나온다. 천문학에서는 이를 시직경이라고 부른다. 이 자세를 유지한 채 밤하늘의 보름달을 쳐다보면, 보름달 크기가 아마도 새끼손가락 두께의 절반 정도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 보름달은 시직경은 0.5도이다.
이 시직경을 이용하면 각거리를 잴 수가 있다. 위와 같이 새끼손가락을 펴서 팔을 쭉 뻗은 자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번에는 왼쪽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가면서 감아보자. 그러면 왼쪽눈을 감았을 때와 오른쪽눈을 감았을 때 허공에서 보이는 새끼손가락의 위치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치의 차이를 더 잘 보이도록 하려면 허공이 아니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배경에 있는 물체를 향해 팔을 겨누면 좋겠다). 왼쪽과 오른쪽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새끼손가락의 위치차이를 각도기를 사용해서 재고 두 눈동자 사이의 거리를 알면, 우리 눈에서부터 새끼손가락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다. 새끼손가락까지의 거리에다 방금 각도기로 잰 각거리를 '도'가 아닌 '라디안'이라는 단위로 바꾼 후 곱하면, 두 눈동자사이의 거리가 된다 (이를 '각거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두 눈동자사이의 거리를 알고 각각의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새끼손가락의 위치의 차이(각도)를 알면 역으로 눈에서부터 새끼손가락까지의 거리 (각거리)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실험을 우주적 스케일로 가져가보자 (위의 그림 참고). 지구는 태양을 1년에 한 번 공전한다. 한쪽 눈을 번갈아 감고 새끼손가락을 보는 위의 실험을, 지구가 6개월의 시간차를 두고 위치할 때 (예를 들어 여름과 겨울) 똑같은 별을 관측하여 배경의 별들을 기준으로 한 그 별의 상대적 위치 차이 (여름과 겨울에 별이 보이는 위치)를 재는 것으로 바꾸면, 우리는 그 별까지의 각거리를 알 수가 있다 (물론, 두 눈동자사이의 거리를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태양사이의 거리를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이다). 천문학에서는 이렇게 6개월 차이를 두고 관측된 별의 상대적 위치차이 (시차, 영어로 parallax)가 1초 (1/3600 도, 팔을 쭉 펴서 본 새끼손가락 두께의 1/3600이 되는 아주 작은 값이다)가 되는 경우에 해당하는 각거리에 "파섹 (parsec, parallax of one arcsecond, 혹은 줄여서 pc)"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거리의 단위로 사용한다. 지구-태양의 거리가 1억 5천만 킬로미터이므로 1 파섹은 30조 킬로미터, 빛의 속도로 가도 3.26년이 걸리는 3.26 광년이다. 천체의 거리가 더 멀어질수록 시차를 재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거리를 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쓰던 습관이 있어서 아직도 천문학자들은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킬로미터나 미터대신 파섹을 사용한다. 참고로, 제일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까지의 거리가 약 4.24 광년 (1.3파섹)이고 우리 은하 내의 별들 사이의 평균 거리가 약 1파섹 정도 된다.
속도:
천체들이 움직이는 속도 역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지구상에서 탈 것 중 가장 빠른 비행기의 속도가 시속 1000 킬로미터라고 하면 이는 초속 280미터에 해당한다. 반면 은하 중심부의 활동성 은하핵에서 제트가 분출되어 나오는 속도는 초속 수백 혹은 수천 킬로미터가 되기도 하고, 별들이 은하 안에서 운동하는 속도도 초속 100여 킬로미터 정도가 된다 (적색 편이, 청색편이를 재거나, 방출선, 흡수선이 퍼진 정도를 재면 속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초속 0.28킬로미터인 비행기의 속도와 비교하면 (1000-10000배나 되는) 천지차이다. 하지만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이며 이 우주에는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는 없으므로, 여전히 "초속 몇 킬로미터" 혹은 "광속의 몇 퍼센트"와 같이 속도를 표시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시간:
음속의 3배가 넘는 마하 3의 속도(대략 초속 1킬로미터의 속도)로 계속 날아가도 100만 년이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바로 1파섹이다. 초속 1킬로미터로 가도 100만 년이나 걸려야 (초속 1000킬로미터로 가면 1000년) 겨우 이웃하고 있는 다음 별에 도달할 수 있으니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간을 분, 초, 시, 일단위, 혹은 월단위로, 심지어 연단위로 재어봐야 실용성이 없다. 또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천체를 관측해서 시간당 잃는 에너지 양(광도)을 재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천체가 에너지가 다 고갈되어 없어질까 역추산 해보면 이 역시 1-10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따라서 천문학에서는 보통 100만 년 (mega year) 혹은 10억 년 (giga year) 단위로 시간을 표시한다.
질량과 광도:
태양 질량은 지구 질량의 30만 배, 목성 질량의 1000배나 된다. 이런 태양과 같은 별이 은하에 천억 개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체의 질량을 킬로미터로 나타내는 것은 실용성이 없다. 그래서 천문학에서는 보통 천체의 질량을 나타낼 때 태양질량을 단위로 사용한다. 태양의 광도는 대략 10의 26승 와트이다. 보통 집에서 쓰는 120와트 전구 10의 24승 개를 합친 만큼의 에너지를 낸다. 이미 태양의 광도 자체도 엄청난 양인데 이런 태양을 천억개나 가지로 있는 은하의 광도를 와트를 사용해서 나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천체의 광도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태양의 광도를 단위로 사용한다.
이런 천문학적 단위를 사용하면 커다란 규모의 천체들의 물리적 특성을 비교적 작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별들 사이의 평균 거리가 1파섹이라고 하고 은하 안에 태양과 같은 별이 천억 개 있다고 하면, 별들이 구 모양으로 균일하게 분포하는 경우 은하의 크기는 몇 파섹이나 될까 (재미 삼아 한 번 계산해 보시라)? 대략 3000 파섹 정도의 반지름을 가지게 된다 (실제 은하들의 크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천문학적인 단위 (파섹, 태양질량, 태양광도)를 쓰더라도, 여전히 어떤 물리량은 천문학적인 숫자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엄청난 중력으로 시공간을 왜곡하는 거대 질량 블랙홀의 질량은 태양 질량을 단위로 하면 '100만-1억' 태양질량이고 은하들의 광도나 질량도 태양의 광도나 질량을 단위로 하면 수 천억 '태양광도', 수천억 '태양질량'이 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사용하는 단위에 따라 사고의 양식과 범위가 달라진다. 재벌회장과 소규모의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 다루는 돈의 단위가 다르고, 군단장과 분대장이 다루는 병력의 단위가 다르듯이 (어느 쪽이 더 좋거나 더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학자들도 사용하는 단위에 따라 사고의 양식과 범위가 달라지는 것 같다. 미시세계를 연구하는 학자과 거시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보는 세상의 모습이 다를 수 있다. 똑같은 은하의 탄생이라고 하더라도 138억 년 우주의 역사를 고민하는 천문학자와 100만 년에 걸친 별의 탄생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에겐 아주 다른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다. 외계행성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은 파섹대신 지구-태양 사이의 거리를 거리의 단위로, 태양질량대신 지구질량을 질량의 단위로 쓴다. 각자의 삶을 사는 우리들도 쓰는 단위를 바꾸면 생각의 스케일이 달라진다. 인생을 긴 시간단위로 보면 하루하루 마주하는 순간의 고비와 굴곡이 덜 고통스러울 수 있고, 인생을 짧은 시간단위로 보면 삶의 커다란 목표를 향한 지루한 하루하루의 여정에서 잠깐이지만 소소한 즐거움으로 자신을 충전할 수 있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동시에 우주를 향해 과학적 상상의 나래를 펴는,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두 가지 단위를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천문학자라는 직업은 어떻게 보면 운 좋은 직업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