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쓴 편지
Ⅰ. 너무 소중했던 아이 (첫 만남 ~ 초등학교 저학년)
#. 똥이 된 아이 (2014년 어느날)
아이가 야릇한 미소를 담은 얼굴로 아빠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빠! 아기가 어디서 오는 줄 알아?"
성에 관한 질문은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라 늘 곤란합니다. 특히 딸에게 성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 익숙지 않습니다. 아빠 어릴 때 어른들이 해주는 말처럼 “다리 밑에서 주어오지”라는 잘못된 말을 해주기 싫었습니다.
"우리 딸은 알고 있어?"
"알지, 아기는 엄마 엉덩이에서 나와~" (아. 생각보다 간단한 답이었습니다)
"으하하, 아기가 엉덩이에서 나오는 거야?"
"응! 엉덩이"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빠를 쳐다봅니다.
순간 아이를 놀려줘야지 하는 생각이 아빠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아 그렇구나. 아기가 엉덩이에서 나오면 우리 딸은 똥이네."
아이의 눈빛이 흔들립니다. 엉덩이에서 나오는 건 똥이 맞는데, 아기도 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유치원생 아이가 아빠의 이상한 삼단논법에 반박할 마땅한 논리도 없습니다.
"?! 흥 나 똥 아니야~으앙!!"
결국 아이는 눈물로 아빠에게 항변합니다. 그날 아이는 유치원에서 성교육을 수업받았습니다.
이제 아이는 부쩍 자라서 자기의 주장도 확실하고, 아빠의 놀림과 거짓말도 제법 알아차립니다.
예전처럼 아이를 놀렸다가 웃겼다가 아빠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순진했던 그 시절이 가끔 생각이 납니다. 물론 지금의 모습도 충분히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대화 속에 많은 애정과 관계와 이해가 담겨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상에서 아이와 나눈 대화를 기록했습니다. 모든 것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하루 속에 기억에 남았던 아이의 말을 글로 옮겼습니다. 아이에게 아빠에게 소중한 추억을 더 오래 간직하기 위함입니다.
#. 너의 모습 (2008년 11월 어느 날에)
너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널 보기 위한 기다림의 순간은 늘 설레고 두려운 시간이다. 아직은 네가 아직 연약하고 조심스러운 작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초음파 사진으로 확인한 너는 힘차게 자라고 있었다. 너의 심장은 바쁘게 움직였고, 혈관을 따라 흐르는 힘찬 심장 박동 소리를 따라 너는 매 순간 멋진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쿵쾅 소리에 손이 자라고 쿵쾅 소리에 기관이 자라고 쿵쾅쿵쾅 심장 소리를 따라 발가락과 머리가 자라난다.
너의 모습은 머리 위에 네 머리만 한 영양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고, ‘캐스퍼’보다 귀엽고 빛나는 외모를 가졌다. 너의 갸웃거리는 고갯짓에 너의 엄마는 행복해했고, 나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너는 나의 행복이다. 미래다. 가슴 설레는 웃음이다.
#. 맞을 준비(2009년 5월에)
엄마의 배가 하루가 다르게 쑥쑥 불러온다. 엄마의 뱃속에서 너는 손과 발을 잘도 움직인다. 너에게 책을 읽어주면 손과 발로 응답한다. 꿈틀대며 움직이는 너의 손을 처음 느꼈을 때의 그 감동은 글로 담을 수 없다
엄마가 드디어 휴직했다. 이제 네가 세상에 나올 때가 온 것이다. 5월 26일 새벽 엄마의 양수가 흘렀다. 네가 세상에 나오고 싶다는 신호다. 허둥지둥, 짐을 챙겨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의 산통이 이어지지만 넌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침이 지나고 점심, 저녁, 밥이 되어도 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엄마는 산통을 견디며 꼬박 하루를 병원 침대에 누웠다.
넌 엄마가 참 좋은 가보다. 이렇게 엄마 배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걸 보니.
#. 너의 첫 인상 (2009년 5월 27일)
엄마의 산통이 심해졌다. 간호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엄마의 손을 잡아주는 게 전부다. 너와 엄마가 건강하기를, 무사히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한다. 생전 처음 들어가 본 출산실은 낯설다. 엄마도 긴장하고 있다. 출산실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엄마의 모습만 바라본다. 의사 손길이 바빠지고 엄마의 고통이 깊어질 때 네가 세상에 태어났다.
너는 하얀 얼굴에 검은 머리를 잔뜩 기르고 작게 뜬 눈으로 탯줄을 끊으려고 준비하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 태어나는 아이는 많지 않다고 했다. "흔치 않다"는 간호사의 말이 아빠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보석"이라는 말로 들어왔다.
너를 안아 들고 엄마는 벅찬 눈물을 흘렸다. 네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고맙다고 울었고, 엄마의 뱃속에서 10개월을 보낸 네가 대견해서 울고, 너를 만나서 반가워서 울었다.
#. 음력과 양력 (2019년 6월)
“아빠?, 내일 엄마 생일 아니야?”
“아니야!~”
“6월 27일이잖아?”
“엄마 생일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야. 음력 6월 27일!”
“음, 내일이 27일 맞는데!”
“지금 달력에 있는 날짜는 양력 날짜인 거고, 엄마 진짜 생일은 음력 날짜를 봐야 해”
“어렵다 어려워, 난 아빠가 무슨 달력을 말하는지 모르겠어.”
"보통 달력은 양력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어. 전 세계 대부분의 달력 그래. 그런데 여기 달력을 자세히 보면 숫자가 있지. 그 작은 숫자는 음력 날짜를 알려주는 거야”
“그런데 음력과 양력 날짜는 왜 달라?”
“음력은 보통 동양에서 달을 기준으로 날짜를 계산했고, 양력을 서양에서 태양을 기준으로 날짜를 만들어서 그래.”
아직 아이는 음력과 양력이 어렵습니다. 따님에게 음력과 양력 날짜를 보는 법을 알려 줘야겠습니다. 그래도 엄마 생일까지 챙기려 드는 모습을 보니 다 큰 것만 같아 기특합니다.
집에서 양력 생일을 치르는 건 아이 혼자입니다. 엄마와 아빠 모두 음력으로 생일을 치르고 있습니다. 아이와 대화가 끝나고 보니 음력과 양력의 차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지 못해 아쉽습니다.
참.??
그런데 이 녀석, 아빠 생일날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 딸을 닮은 모형 인형(2019년 5월)
“아빠, 나 어린이날 선물로 리얼 피규어 인형 하나 사주면 안 돼”
“널 닮은 피규어가 있어?”
“나랑 똑같은 인형은 아니고 사람 사진을 가지고 인형으로 만들어 주는 거야”
“그런 인형도 있구나”
아이는 쇼핑몰을 오가며 3D 피규어 인형 가게에서 본 피규어 인형이 너무 갖고 싶었나 봅니다. 인터넷 검색하다가 '3D 직업 체험'도 하며 3D피규어도 만들어 주는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신청했습니다. 아이는 체험학습을 하는 날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디데이.
체험학습 강의실에 들어서자 수백 개의 카메라가 달린 작은 스튜디오가 눈에 들어옵니다. 피규어 제작을 위한 촬영 장비입니다. 아이가 정해진 위치에 서자 “찰칵”하는 셔터 소리가 우렁차게 울립니다. 그리고 앞뒤, 좌우, 상하에서 촬영된 다양한 아이의 모습이 컴퓨터로 저장됩니다. 아이도 수백 개의 카메라가 본인을 촬영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해합니다. 아빠도 아이만큼 최신 디지털 기술에 놀랐습니다.
촬영 후에 3D 그래픽 이미지 수업도 받았습니다.
강의실 뒤에서 컴퓨터 과외수업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아이가 강의 내용을 제대로 따라 할까 걱정하며 지켜봤습니다. 뒤로 몰래 가서 컴퓨터를 살펴보니 강사님 설명을 곧잘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색칠까지 완벽하게 마무리 짓지는 못했지만 '멋진 라이언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3D 프린트 기계가 피규어 인형을 만드는 장면도 복, 기계에서 다 만들어진 피규어 인형을 꺼내 보는 체험도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체험 재미있었어? 어떤 수업이 제일 재미있었어?”
“3D프린터 기계에서 피규어 인형 꺼내는 게 제일 재미있었어. 하얀 덩어리가 있는데 진공청소기로 하얀 가루를 빨아들이니까. 그 속에서 피규어가 나왔어”
“와 신기하네, 밀가루 반죽 같은 데서 인형이 나오는 거야?”
“응, 밀가루하고 조금 다르긴 한데, 난 거기서 인형을 꺼낼 때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른 아이더라.”(아이가 입술을 삐죽 내밉니다)
“네 피규어는 2주 지난 다음에 집으로 보내준대. 오늘은 못 볼 거야.”
“아 궁금해. 빨리 보고 싶다.”
결국 아이의 관심은 3D 직업 체험보다는 온통 피규어 인형에 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아이의 피규어는 어떤 모습일지 아빠도 궁금합니다.
※ 2주 후에 도착한 아이의 피규어가 도착했습니다. 아이는 너무 맘에 들어 했습니다. 자기 손바닥만 한 피규어를 책상 위에도 올려놨다가, 침대 위에도 올려놔 보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구경합니다.
“인형 너무 가지고 놀지 말고 눈에 잘 띄는 곳에 가만히 보관해 둬. 가지고 놀다가 부러진다.”
따님은 아빠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그 인형은 5학년 가을 어느 날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따님과 똑같이 생긴 인형의 다리가 부러지니, 괜히 맘이 좋지 않았습니다. 불과 2년도 안 돼서 인형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네요.
#. 남동생이 왜 좋아? (2019년 5월)
“아빠 남동생이 왜 좋아?"
"응? 남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난 동생 싫은데, 할머니가 나보면서 자꾸 “남동생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시면서 아빠한테 ‘남동생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라고 하셨어."
"아~~!!"
아이는 늦게 결혼한 아빠 탓에 외동딸입니다. 할머니는 아빠의 나이는 생각지 않고 아직도 '손자'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연세가 많다 보니 손녀 하나 있는 게 불안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에게 할머니의 마음을 설명해줬습니다.
"우리 딸 성은 '이'씨지. 엄마의 성은 달라. 아이는 보통 아빠의 성을 따르거든, 그래서 할머니는 아버지의 성을 가진 손자가 있기를 바라는 거야"
"내가 이씨 성을 가진 남자랑 결혼하면 되겠네"(정말 기발한 생각입니다)
"아하!. 하하하. 역시 우리 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아빠가 제사 지낼 수 있는데, 아빠 죽고 나면 제사 지낼 줄 사람이 없잖아. 할머니는 그걸 걱정하시는 거야"
"내가 제사 지내면 되지."
"그래 그럼 되지. 우리 딸이 제사 지내주면 되지. 고마워"
할머니의 손자 걱정에 대한 따님의 괜찮은 결말입니다. ^^
※ 따님이 성인이 되고 나서,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를 챙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성묫길에 따님과 동행하며 조상에 대해 자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 앵무연 이야기 1 (2019년 5월)
아이의 생일날입니다. 막상 사려고 고민해 보니 딱히 떠오르는 선물이 없습니다. 아이가 평소 갖고 싶다던 ‘바퀴 달린 신발’이 생각나 마눌님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아이 생일선물로 바퀴 달린 신발 사주면 어떨까?"
"신발 사지마. 딸은 연을 사고 싶대요~"
“연이라고? 하늘에 날리는 연? “
역시 물어보기를 잘했습니다.
아이 생일날 가족 외식을 마치고 들어와 생일선물을 골랐습니다. 아이는 점찍어 두었던 '앵무새 연'을 골랐습니다. 알록달록 멋진 앵무새 모양의 연입니다. 그런데 앵무새 연만 품절이네요.
"여기 독수리 연은 어때? 여기 해마 연은? 용 모양도 멋있는데"
"싫어! 난 앵무새 연이 좋아"
앵무새 연보다 비싸고 더 멋있어 보이는(아빠 눈에) 연도 있는데 아이는 앵무새 연을 고집합니다. 결국 앵무새 연은 품절이라 생일날 사지 못했습니다.
"아빠, 괜찮아. 다음 달에는 살 수 있겠지?"
"응 다시 입고되면 살 수 있겠지. 어린이날이 있는 오월이라 많이 팔렸나 봐."
솔직히 그 앵무새 연이 쇼핑몰에 다시 등장할지 자신은 없었습니다.
따님은 오늘 사지 못한 것을 크게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아빠가 앵무새 연을 가지고 올 것이라 확신하는 분위기입니다.
빠를 시일 내에 앵무새 연이 다시 입고 되기를 바랍니다.
※ 앵무새 연은 한 달 후에 구매했습니다. 아이는 자신보다 큰 연을 보고는
조금 당황한 듯싶었습니다.
#. 앵무연 이야기 2 (2019년 6월)
아이가 갖고 싶어 하던 앵무새 연을 드디어 구했습니다. 앵무 연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몸통이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몸을 다 가릴 정도입니다. 연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 흐뭇합니다. 연을 조립해 거실 한편에 걸어놓으니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집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주말이 되어 연을 챙겨 들고 한강으로 갔습니다. 한강에는 연 날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연 날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아빠들이거나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입니다. 한강에서 날리는 연은 대부분 편의점에서 파는 가오리연입니다. 가오리연은 가벼워 날리기가 쉽습니다. 아이도 가오리연은 몇 번 날려봤습니다. 연을 날리는 법도 알아 얼레를 풀었다 감았다 하며 제법 품새가 납니다.
한강 풀밭에 텐트를 치고 거대하고 화려한 앵무 연을 조립했습니다.
"오~ 저 연 좀 봐봐~~"
알록달록 화려한 연을 들고 한강 변으로 이동하는데 풀밭에서 주말 오후를 즐기는 시민들이 시선이 앵무 연을 향합니다.
아이의 내면에서는 ‘이연이 내 연이다’라는 우쭐함도 느껴지고, ‘이 사람들이 다 내연을 보는 거야’하는 부끄러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앵무새 연을 너무 화려하고 컸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그렇게 날리고 싶어 하던 연인데, 사람들의 시선을 참으며 연을 날릴 준비를 합니다.
앵무 연의 실을 여유 있게 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도 옆에서 같이 뜁니다.
앵무 연이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역시 멋지군!’ 가볍게 날아오르는 앵무새 연을 바라보며 감탄하려는 순간 앵무새 연은 바람을 타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앉았습니다. 무게가 있다 보니 바람을 타려면 높이 올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 큰 연이 과연 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따갑습니다.
꼭 성공해야 할 텐데. 앵무 연이 바람을 타려면 좀 더 높이, 좀 더 빨리 달려야 합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앵무새 연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작은 언덕 위에 서서 앵무 연이 안정적으로 하늘을 날게 한 뒤 얼레를 따님에게 건넸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이가 얼레를 받지 않았습니다. 앵무새 연을 빤히 보던 아이가 목마르다고 합니다.
“아빠! 나 목마르다”
“어? 그래. 아빠가 사다 줄게”
“아니야 내가 갔다 올게”
아이는 재빠르게 아빠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빼갔습니다.
그렇게. 나이 오십이 다 된 어른 혼자 화려한 앵무 연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한강공원의 많은 이들이 오며 가며 연과 아빠를 쳐다봅니다. "애는 왜 이리 오지 않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귀에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혼잣말하며 외롭게 연을 날립니다. 앵무새 연을 아이도 날려보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민망함을 참았습니다.
5분, 10분…. 시간은 가는데 아이는 오질 않습니다. 민망함과 아이에 대한 걱정이 겹쳐 결국 앵무 연을 땅으로 착륙시켰습니다. 아이를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할 때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타났습니다. 그날 아이는 결국 앵무 연을 날리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자랑합니다.
"엄마, 앵무새 연을 사람들이 다 쳐다봐, 떨어질 때도 멋지게 내려와~"
쉴 새 없이 조잘대며 엄마에게 앵무새 연 날린 얘기를 합니다.
"너, 사람들 시선 때문에 앵무 연 안 날린 거였어?“
아빠의 눈을 피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합니다.
"흐흐흐 창피하잖아!"
"아빠는? 다 큰 어른이 연 날리는 건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아?
네가 아빠 옆에 있어 줬어야지."
바람 많이 부는 날 한강에서 다시 한번 앵무 연을 날리러 가겠습니다.
그때는 아빠가 아닌 따님의 손에 얼레를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 이상한 음식점 간판(2018. 가을)
아이와 애견 카페에 들렀습니다. 아이는 동물을 좋아합니다.
강아지와 교감하는 모습을 보며 반려견을 입양해야 하나 생각도 해봅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걸었습니다. 거리는 고소한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합니다. 아이 손을 잡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고민하며 걷고 있는데 아이가 말합니다
“아빠 난 그게 참 이상해”
“뭐가 그렇게 이상해?”
“아니 저기 돼지가 웃고 있잖아”(삼겹살집 간판에 있는 귀여운 돼지 그림입니다)
“응, 귀엽네”
“아니, 사람들이 자기를 먹는 건데 어떻게 웃을 수 있어, 그것도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음식점을 보면 돼지도 그렇고 소도 양도 다 그래~”
“하하하 생각해 보니 그렇네!!”
아이의 시선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고깃집 간판입니다. 그렇다고 음식점에서 울고 있는 돼지 캐릭터를 쓸 수 없겠지요. 아이는 먹는 사람보다는 보이는 동물 캐릭터에 더 감정이입을 했나 봅니다.
아이에게 마케팅적인 시각으로 설명하려다 생각을 접고 아이 말에 공감해 줬습니다. 사람 입장보다는 귀여운 동물의 처지를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순수한 동심을 오래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14. 저녁 약속(2019년 1월)
아이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아빠의 저녁 약속이 아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빠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아빠 오늘 일찍 와?”라는 말은 아이의 단골 질문입니다. 아빠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이 몰릴 때가 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저녁 약속이 있는 아빠에게 아이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오늘도 늦게 와?”
“응 늦어~~”
“왜 늦게 와?”
“아빠 오늘도 저녁 약속이 있어~~”
“왜 약속이 만날 있어?”
“회사 생활하다 보면 약속을 해야 할 때가 있어~”
“난 아빠가 집에 있어도 돈을 주는 회사에 다녔으면 좋겠어.~”
“흐흐흐 아빠도~”
로또를 한 장 사야겠습니다 ~~
#. 아빠의 착각? (2019년 2월)
아이는 아빠의 껌딱지였습니다.
아이가 기저귀를 떼고 두 발로 뛰기 시작할 때부터 주말이면 아빠와 단둘이 놀러 다녔습니다. 동네에서 가까운 키즈카페부터 멀리 있는 서울의 웬만한 실내 놀이터까지 많은 곳을 경험했습니다. 아이가 아빠랑 서먹해지기 전에 많은 추억 만들라는 마눌님의 강압도 작용했지만, 주말에 아이와 놀러 다니는 것이 좋았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도 내려가곤 했습니다. 왕복 5시간 동안 좁은 차 안에 있어야 하는데도 아이는 아빠를 따라나섰습니다.
얼마 전 주말에 경조사가 생겨 아이와 함께 나가 경조사도 챙기고 애견 카페라도 다녀오려고 아이에게 같이 가자고 요청했습니다.
“딸, 빨리 씻어~~ 아빠랑 같이 가게~”
“어디 갈 건데?”
“결혼식장이랑, 상갓집!”
“음. 안 가면 안 돼?”
“안 가도 되지~ 그럼 아빠 혼자 다녀올게”
“아니 아빠도 안 가면 안 되냐고~”
“아빠는 가야 해~|”
“음….”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거실에서 뒹굴뒹굴했습니다.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어서 혼자 외출 준비했습니다. 옆에서 아빠와 딸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눌님이 거들었습니다.
“왜 안가? 아빠랑 같이 가는 거 좋아하잖아!”
“그동안 아빠랑 갔던 건 핸드폰 보려고 갔던 거야~”
헉!
아이의 대답에 아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딸, 그동안 아빠랑 외출했던 게 핸드폰 보려던 거였어? 그런 거였구나!”
“아빠.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며 당황했습니다. 엄마와 한 얘기를 방에서 옷을 갈아입던 아빠가 못 들었을 거로 생각했나 봅니다.
주변에서는 이제 슬슬 이별할 때가 됐다며 마음 준비하라고 합니다. 아이도 외출이 귀찮을 때가 있겠지요. 이제는 엄마, 아빠보다 친구들이 더 좋을 나이가 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예전처럼 아빠와 단둘이 데이트 시간도 내주면 고맙겠습니다.
#. 드라마를 보다가 (2019년. 6월)
“아빠, 저 언니는 왜 그래?”
“왜 그랬냐 하면 저 언니가 신입사원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그 신입사원이 언니의 윗사람이 된 거야. 알고 봤더니 글쎄 그 신입사원이 회장 아들이었대. 그래서 언니가 회사를 그만둔 거야"
"왜 언니가 윗사람이었는데 신입사원이 갑자기 더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데?"
"돈 많은 사람들은 많이들 그렇게 해!"
"치 나쁘다. 회장 아들하고 우리하고 다른 게 뭐 있는데, 아빠가 돈 많은 것 빼고 다른 게 뭐 있나?"
"그렇긴 하지. 그런데….”
아이와 함께 주말 드라마를 보다가 아이의 질문에 설명해 줄 말이 궁색해졌습니다. 아빠가 돈이 많지 않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막상 아이들 눈에 비쳐진 사회의 민낯이 조금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눈에는 재벌가의 자녀들과 일반 가정의 자녀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막상 사회에서 부딪혀 보면 그 벽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이들의 순수한 눈에는 드라마의 설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사라져 가는 사회입니다. 아이가 자랐을 때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작은 정상이라도 마련해 줬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아이가 사회라는 험한 곳으로 나오면 구불구불 오솔길을 힘들게 걸어갈 수도 있고 저 멀리 산 정상에서 여유롭게 출발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현실에 절망하지 말고, 자신이 서고자 했던 곳을 향해 묵묵히 오를 수 있는 뚝심과 용기를 가진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신데렐라 (2018년 12월)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좋아합니다. 엄마가 아무리 “그만 보라고” 잔소리해도 아이는 어느새 아빠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어느 주말 아침, 아이는 소파에 앉아 있는 아빠 다리를 베고 누워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었습니다. 세상 편한 자세입니다. 빨래하랴, 설거지하랴 분주한 엄마 눈에 소파에 누워있는 아빠와 아이의 모습이 예뻐 보일 리는 없겠지요.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던 아이 엄마는 햇볕에 바싹 마른 쿠션과 쿠션 커버를 아이 얼굴에 휙~ 집어 던졌습니다. 쿠션은 아이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엄마는 매섭게 한마디 던졌습니다.
“핸드폰 끄고 이거나 넣어!!”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던 아이는 갑자기 날라 온 물체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 화난 엄마의 얼굴을 보고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조용히 쿠션을 집어 듭니다.
그리고 잠시 후 들려오는 노랫소리….
“신데렐라는~ 어려서~ 어머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아이는 쿠션을 정리하며 조용히 노래로 반항했습니다. 소심한[ 반항하는 아이 모습이 아빠 눈에는 왜 귀엽게만 보일까요? 엄마는 분주하지만 즐겁고 평화로운 주말 아침 풍경입니다.
#. 외모 자부심<2019. 6월>
요즘 부쩍 외모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엄마 화장품에 큰 관심이 없었던 아이는 '화장품 쿠션' 형태의 선크림이 애용품이 되었습니다. 쿠션을 열어 수시로 얼굴에 바르며, 엄마가 화장하는 모습을 흉내 냅니다.
"엄마! 저 언니 예뻐?"
"글쎄, 관심 없어~"
"힝~,"
시험공부를 하다 잠시 TV를 보던 아이가 엄마에게 말을 건넵니다. 마눌님은 연예인 외모에 별 관심 없다며, 아이의 질문을 잘랐습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아이는 다시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살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따님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딸, 너도 화장하고, 방송 조명받으면 저 언니만큼은 돼~"
"흥! 뭐야 아빠, 난 화장 안 해도 예쁘거든!"
헐!! 아이의 자존감은 아빠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컸습니다.
아이는 아이돌 그룹의 댄스도 열심히 따라 합니다. 하지만 춤은 배운 적이 없어 많이 어설픕니다.
"따님, 방송 댄스 좀 배워야겠다. 문화센터 알아볼까?"
"아빠 뭐야, 난 안 배워도 멋지거든!"
딸이 춤을 좀 더 멋지게 췄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마디 건넸다가 본전도 못 건졌습니다. 아이에게 매번 핀잔을 듣는 아빠지만 아이의 자신감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아이가 지금처럼 자존감 강한 아이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살다 보면 상처받을 일도 있을 것이고, 커가면서 사회현실을 알게 되면 자신감도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모도, 행동도, 마음가짐도 지금의 자신감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 아이가 쌀독에 빠졌던 날
아이의 옛날 사진들을 보다 보면, 아이의 과거 모습과 행동들도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한가로운 주말 아이와 함께 컴퓨터에 저장된 아이 어릴 적 앨범을 보았습니다.
“너 참 못생겼었다. 정말 용 됐네.”
“내가 그렇게 못생겼었어?”
“사진을 봐봐 “
“뭐, 그래도 귀엽잖아~”
아이는 자기 아기 사진을 보며 여기는 어디냐? 난 뭐 하고 있는 거냐? 등 당시의 상황들과 아기였을 때 자기 행동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봅니다. 사진과 아빠의 설명을 들으며 아이는 기억도 나지 않을 추억을 돌이켜 보며 재미있어합니다.
사진은 순간의 저장입니다. 사라질 추억이 사진 속에서 살아남아 사진 속 인물들과 가족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아이의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노력했지만, 찍지 못해 아쉬운 장면도 많습니다. 그중 가장 아쉬웠던 장면은 일명 ‘쌀독 사건’입니다.
아이가 다섯 살 정도 됐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도 집밥이 제일 맛있다고 말하는 아이는 그 나이 때 생쌀을 좋아했습니다. 쌀을 씻고 있으면 옆에 와서 쌀 몇 톨을 손에 들고 가 혼자 오도 오독 씹어먹곤 했습니다.
그런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거실에서 잘 놀던 아이가 어느 순간 안 보인다 싶더니 베란다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베란다로 뛰어나가 보니 아이는 보이지 않고 쌀독 위로 아이의 두 다리만 바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놀란 마음에 아이의 두 발목을 잡고 들어 올렸습니다.
아이는 쌀독에 바닥에 있는 쌀 톨을 꺼내 먹으려고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머리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진 것입니다. 아이를 진정시키고 나니 갑자기 웃음이 났습니다. 쌀독 위에서 버둥거리는 두 다리가 생각나 아이 엄마와 한참을 웃었습니다. “아.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놨어야 하는데….” 하는 얘기를 하며 또 웃었습니다. ‘쌀독에 나와서 바둥거리는 아이의 앙증맞은 두 다리’는 아빠의 머릿속에만 남아있습니다.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하지만 아이가 실수하는 장면, 장난치는 모습, 밝게 웃는 모습 미처 찍지 못한 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몇몇 장면을 아빠와 엄마의 기억 속에 남지만, 이미 잊힌 장면도 너무 많습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의 사진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아빠의 육아 열정이 식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모습을 조금 더 자주 사진에 담아야겠습니다.
#. 삼각김밥
아이는 아빠 핸드폰에 있는 아기 때 사진, 아빠가 예전에 SNS에 올린 동영상을 보며 좋아합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사진을 허락도 받지 않고 지울 때도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족 셋이 나란히 앉았습니다. 아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아이가 4살 때 동영상을 찾았습니다. TV 앞에 서서 노래와 율동을 하며 엄마 아빠에게 호응을 유도하는 영상입니다. 셋이서 영상을 보며 추억에 잠기다가 엄마가 아이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너 참 못생겼었다.”
“지금은?”
“지금은 엄청 용 됐지?”
엄마와 대화하며 아이는 씨~익 웃으며 다시 동영상을 재생해서 봅니다. 지금은 아주 예뻐졌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못생겼어도 귀여웠던 아기 때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가 태어났던 때가 생각납니다.
까맣고 풍성한 머리숱과 태열이 없이 하얀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실눈을 뜨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신생아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요즘도 아기 때 모습으로 놀리곤 합니다.
“너 아기 때는 되게 못생겼었어? 꼭 삼각김밥 같았어?”
“왜 삼각김밥이야?”
“머리숱은 까만데, 얼굴이 삼각형이었거든 크크크”
“흥 그래도 지금은 이쁘잖아!”
아이가 예쁘게 자라줘서 고맙습니다. 매년 한두 차례 병치레하지만,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잘 놀아줘서 고맙습니다.
#. 모녀싸움은 칼로 물 베기(2019년 3월)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녀를 보고 있으면 신기합니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엄마에게 혼나고 나서 몇 시간 후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위대함 때문이겠지요.
주말에 일기와 밀린 숙제를 하러 자기 방에 들어간 딸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가끔 거실로 나와 종이 인형을 보여주고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인형을 가지고 놀고, 다시 인형을 만들고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숙제와 일기를 다 쓰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이는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참다못한 마눌님이 아이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아이는 숙제는커녕 일기를 한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눌님은 결국 폭발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숙제와 일기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아이는 가져올 게 없었습니다. 큰 눈망울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곧 아이 방에서는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건너뛰겠습니다.
딸은 눈물 콧물을 쏟았고, 앞으로 공부와 숙제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아이는 노트에 똑똑 눈물을 떨구며 숙제를 마쳐야 했고, 울음을 꾹꾹 참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딸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이러다 모녀지간에 금이라도 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아빠의 걱정은 기우는 하루도 못 갔습니다. 월요일 퇴근하고 집에 오니 딸은 거실에 앉아 숙제하고 있습니다. 숙제하면서 엄마에게 장난도 치고, 조잘조잘 얘기도 하면서 말이죠. 숙제를 끝내고 나면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엄마 옆에 붙어 귀찮게도 합니다. 화날 때는 무서워도 엄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기 때문이겠지요.
딸은 여전히 잠이 들 때와 나들이할 때면 아빠를 찾지만 결국 아이에게 최고는 엄마입니다.
부성애는 모성애를 이길 수 없나 봅니다.
#. 아빠의 코골이(2019년 1월)
"따님~ 미안한데, 그만 읽고 자자~"
동화책을 덮으며 아이에게 말하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 싶었는데, 아이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깜짝 놀라 아이를 살폈습니다.
“왜 울어? 잠이 안 와?”
“아빠 미안한데 밖에 나가서 자면 안 돼?”
“응? 왜? 아빠랑 자기 싫어?”
“아빠 코골이 때문에 잠을 못 자겠어.”
“아! 미안해. 아빠가 술을 마셔서 코골이가 심해졌나 보다”
이불과 베개를 끌어안고 거실로 나왔습니다. 방문을 나서는 데 뒤에서 아이가 더 서럽게 웁니다. 아빠와 같이 자고는 싶은데 코골이 때문에 잠은 못 자겠고, 쫓겨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니 너무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훌쩍, 훌쩍 아이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다시 침실로 들어가 아이를 안아 주었습니다.
"따님 왜 울어? 따님이 잘못한 게 아니야. 아빠가 코골이가 심해서 그런 거야. 아빠가 미안해."
아이를 다독인 후 다시 나와 잠을 잤습니다. 따님이 갓난아기 때부터 잠자리에서 동화책을 읽어줬습니다. 한때는 귀찮아서 책을 읽어주는 것을 멈추려고도 했습니다.
"아빠가 책을 읽어주면 좋은 꿈을 꿔~"
어느 날 아이가 한 이 말 때문에 지금도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아이는 아빠 옆에서 잠을 잡니다. 어릴 때는 책을 읽는 동안 아이가 꿈나라에 빠져들었습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이 들어서 코골이가 심한 아빠 옆에서 잠을 자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잠귀도 밝아지고, 잠에 빠져드는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이제 술을 먹고 들어 온 날은 아이 옆에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 직쏘 퀴즈 (2019년 1월)
지루한 오후 아이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자신이 '직쏘'라며 퀴즈를 내겠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이 문제를 맞혀봐"
"무슨 문제인데?“
숙제 중에 풀지 못하는 문제이겠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규칙은 5가지 숫자를 알려줄 것이다. 이 중 3가지를 골라 서로 더하면 10이 되면 된다. 단 사용한 수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OK, 알았어. 풀어보지"
"3 5 6 1 9. ? + ? + ? = 10"
"풋 3.6.1. 맞았지?"
"잘했군. 좋아. 다음 문제…."
'초등학생 문제를 못 풀까 봐, 이런 문제는 눈감고도 풀지.' 자신만만해하며 다음 문제를 기다렸습니다.
" 이제 다르게 해보지. 3 1 8 9 7. ? + ? + ? = 10"
아무리 찾아봐도 숫자 3개를 더해서 10이 될 수 있는 숫자가 없습니다.
"뭐지? 음. 정답은 답 없음"
"땡.! 정답은 3, 1, 6이다. 9를 뒤집으면 6이 된다."
”하…. 이런 말도 안 되는….“
"크크크 메롱"
아이가 즐거워하며 카톡 창을 마무리합니다. 말도 안 되는 문제라고 따지려다가 이것도 창의성일 수 있다는 생각하고 저의 부족함을 인정했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 '날다'의 반대가 '헤엄치다'가 아니듯이 물고기의 반대는 새가 아니라고 말해줬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의 사고를 어른들 사고의 틀에 맞추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아이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아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음. 숫자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생각, 곰이 물구나무를 서면 '문'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괴짜 같은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 아이의 용돈(2019년 1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아이는 아직 용돈이 없습니다. 아빠 생일날에 엄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제 용돈 모아서 엄마 아빠 선물도 사주고 그래~”
“난 가진 돈이 없는데”
둘의 대화를 듣다가 아이에게 제안했습니다.
“딸 앞으로 한 달에 용돈은 오천 원씩 줄게!”
(생각해 보니 액수가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상 타면 특별 상여금으로 5천 원을 추가로 주고.”
금액을 더했습니다.
아빠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다시 묻습니다.
“시험 백 점 맞으면?”
“백 점 맞으면 천원 더 줄게”
“왜 천원밖에 안 줘?”
“시험은 자주 보잖아. 그리고 넌 시험만 보면 거의 다 백 점이잖아!”
“........”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아이는 입을 닫았습니다. 본인이 생각해도 시험 백 점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요.
“오늘은 친구가 솜사탕 사줬어! 오늘은 친구가 지우개 선물로 줬어”라며 자랑하는 아이에게 “친구에게 무엇을 받으면 너도 그만큼 베풀어야 해”라고 말했지만 정작 아이는 친구에게 쓸 용돈이 없었습니다.
아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이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본인의 주머니에서 자기가 먹고 싶고, 사고 싶은 것을 사다 보면, 돈의 소중함과 돈을 관리하는 방법도 알게 될 것입니다. 아이가 용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내년 아빠 생일날, 아이의 작은 선물을 기대해 봅니다. ^^
#. 시인(詩人)
< 봄 >
눈이 녹으면
봄이 찾아온다.
너무 빨리 오셨네
아직, 맞을 준비가 안 됐는데
분홍빛 띠며
노란빛 띠며
초록빛 띠며
숨어 있던 나비들도 나와
춤추고
멀리 떠났던
새들도 돌아와
노래한다.
아이가 일기를 쓰기 싫어서 쓴 시입니다. 엄마에게 어디서 베낀 거 아니냐며 한 소리 듣고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직접 썼다고 항변했죠. 누구나 가끔 감성이 폭발할 때가 있듯이 아이도 가끔 시를 쓰는데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다음 시는 지난해 가을 시골집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쓴 시입니다. 늦은 밤 차 안에서 시를 쓴 후 읽어주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시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먹는 '밤'에 관한 시인데 아빠는 어두운 '밤'으로 이해했습니다. 서운해하는 아이에게 한참을 사과해야 했습니다.
< 밤 >
가을이 되자
아기 밤이 엄마 품속에서 나왔어요.
이제 엄마 곁을 떠나!
세상 구경 나가요.
#. 새 학년 새 학기 (2019년 3월)
교실 문을 열면서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괜찮아 난 잘할 거야!"라는 하얀 천사의 목소리와 "친구들이 날 싫어할 수도 있어"라는 검은 천의 목소리가 싸웠다고 합니다.
교실 앞에서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망설이다 '잘 할 수 있다!'는 다짐하고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기 전 아이는 많이 설레고 긴장한 것 같습니다. 새 학년이 된 다음 날 저녁을 먹으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친구들은 어때?”
“응 괜찮아!”
“선생님은 어떤 분이셔? 좋아?”
“응 남자 선생님인데 되게 젊어, 오빠 같아”
아빠가 5남매 중에 막내라 딸아이의 사촌 오빠들은 나이가 많습니다. 제일 큰 오빠가 30대 중반이 넘었고, 제일 어린 오빠는 대학교 졸업반입니다. 아이 눈에는 웬만한 선생님들은 아저씨가 아닌 오빠같이 보입니다.
“아 그렇구나”
“수업은 재미있었어?”
“응 괜찮았어. 근데 내가 발표했는데. 내 뒤로 발표한 애들은 다 나랑 똑같이 발표했어.”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있었던 얘기를 하면서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새 학년 새 반에서도 잘 적응하는 듯해 덩달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자신을 믿고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멋진 아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 아이와 산타 Ⅰ(2018년 12월)
10살. 궁금한 것도 많고 어른들의 세상도 제법 많이 알아 가는 나이입니다. 아이 또래 중에는 제법 어른스러워진 친구도 많지만, 아이는 아직 산타할아버지를 믿습니다. 산타 옷을 입고 백화점이나 가게에서 선물을 나눠주는 사람이 모두 산타할아버지라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산타 복장의 사람들이 가짜 산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3학년 친구들과 산타할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는 가짜라고 하고, 아이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는 진짜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산타할아버지를 본 적은 없지만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아이는 지난겨울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산타할아버지가 정말 있어?"
"있지. 너도 산타할아버지 존재를 믿잖아!"
"그런데 우리 반 친구들은 산타할아버지가 없대!"
"산타 할아버지는 믿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거야. 안 믿는데 산타할아버지가 힘들게 선물 주고 그러겠어?"
"그럼 선물은 산타할아버지가 주는 거 맞아? 엄마 아빠가 주는 거 아냐?"
"산타할아버지는 착한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물로 주는 거야"
"맞아. 우리 작년에 크리스마스 여행을 갔을 때 난 분명 아빠랑 계속 같이 있었는데, 갑자기 선물이 생겼었잖아! 맞아! 산타할아버지는 정말 있는 거야."
크리스마스 여행 때 산타 선물은 아이가 목욕할 때 차에 미리 사뒀던 선물을 아이 침대맡에 두었습니다. 아이는 다음날 눈을 뜬 후 선물을 발견하고는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잊히질 않습니다.
산타할아버지를 믿은 아이의 동심이 귀엽습니다. 아이에게 ”산타 선물은 아빠가 주는 것이다”라고 말해주고 싶을 때도 있지만 순수한 동심을 굳이 깨뜨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돼서도 산타할아버지를 믿는 동심이 있다면 어떨까?’ 라거 상상해봅니다.
#. 아이와 산타 2 (2019년 11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아이는 산타할아버지가 부쩍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정말 갖고 싶은 선물은 강아지입니다.
"아빠 산타할아버지가 강아지도 선물해 줄까?"
"살아있는 동물을 선물로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 강아지 정말 갖고 싶은데…."
아이는 다섯 살 때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네가 강아지를 보살필 나이가 되면, 네가 강아지 밥을 줄 나이가 되면,
네 10살 생일날 강아지를 데려오마"
강아지를 사달라는 아이에게 10살이 되면 사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한두 해 지나면 잊히겠지 했지만, 아이는 매년 강아지 얘기했습니다.
“아빠 나 10살 되면 강아지 사줄 거지? 약속했지”
10살의 마지막 12월이 되었지만, 아직 강아지를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작은 평수의 집에서 강아지를 키울 자신이 없다는 엄마의 주장 때문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아이는 강아지가 아닌 다른 선물을 받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짜 산타가 나타나 아이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안겨주면 어떨까? 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면 아이가 정말 행복해할 텐데….
올해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 아이와 산타 3
11살, 아이가 부쩍 자랐습니다. 아이가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산타 할아버지 이야기합니다.
"아빠! 산타할아버지가 정말 있을까?"
"아빠가 말했잖아 산타는 믿는 사람한테만 있는 거라고, 그래서 진짜 믿은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준다고.~"
"그렇지. 음. 그래. 그런데 말이지…."
"그런데 왜? 산타 선물 받고 싶은 게 생겼어?."
"응. 나 올해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선물이 생겼어!"
"그래? 뭔데?"
(크리스마스 때까지 몇 차례 바뀔 테지만 아이가 갖고 싶은 선물 리스트는 잘 기억해 둬야 합니다. 그중에 가성비가 좋은 걸로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산타할아버지가 1억 원만 줬으면 좋겠어!!!"
"1억? 헐. 그걸 어떻게. 야. 애가 그렇게 큰돈을 바라면 안 되지….“
말도 안 되는 선물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빠가 왜 이렇게 당황할까? 난 산타할아버지에게 말한 것뿐인데 하하하"
아이는 아빠의 표정을 보며 해맑게 웃습니다.
아이가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빠는 조금 더 산타를 믿기를 바랐는데. 조금은 아쉽지만, 아이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 아이 눈에 낀 콩깍지
"책 좀 읽어!"
요즘 아이가 엄마에게 매일 듣는 잔소리입니다. 아직은 책보다는 유튜브 같은 동영상 검색을 좋아합니다. 아빠의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릅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됐다 싶어 화장실 문을 열면 엄청나게 큰 게 나왔다며 엉덩이를 들어 굳이 증거물(?)을 보여줍니다. 그런 건 안 보여줘도 되는데 말이죠.
가끔은 책을 가지고 화장실에 들어갈 때도 있지만, 아직도 열에 아홉 번은 휴대폰을 챙겨 들어갑니다. 그나마 아이는 잠자리 누워서 아빠가 책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면서부터 들인 습관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가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줬습니다. 책을 읽다가 아빠가 먼저 잠든 날도 많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그날도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쳤습니다. 멋진 팝업 그림이 펼쳐지는 ‘신데렐라’입니다. 신데렐라가 멋진 드레스를 입고 궁궐에서 열리는 무도회장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화려한 조명과 멋진 왕자, 그리고 예쁜 옷을 입은 신데렐라가 책 속에 등장합니다.
‘왕자는 신데렐라를 보고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신데렐라도 왕자의 멋진 모습에 반했습니다’ 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옆에서 가만히 책을 보던 아이가 소리쳤습니다.
"신데렐라야, 난 멋있는 사람이랑 매일 같이 있거든. 하나도 안 부럽거든!!"
신데렐라의 왕자님이 부러워 순간적으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8살 아이의 눈에는 아빠의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어쩌면 아빠 기분이 좋아지라고 한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11살, 아이의 눈에 낀 콩깍지는 점점 사라집니다. 아빠의 불룩 나온 배가 불만이고, 아빠의 입 냄새도 불만입니다. 아빠가 노력해야겠지만 이제는 ‘아이의 멋진 왕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짜장면이 싫은 아이.
“짜장면 먹을까?”
“싫어. 난 그냥 밥 먹을래~”
“탕수육도 시켜줄 게 먹자~”
"엄마는 짜장면 시켜. 난 밥 먹을게"
어느 토요일 점심 엄마와 딸의 대화입니다. GOD의 노래 중에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노랫말이 나오는데, 우리 집은 아이가 짜장면이 싫다고 말합니다.
주말에 밥 차리기 귀찮은 엄마는 간단히 짜장면을 시켜 먹고 싶지만, 아이는 집밥이 좋다며 집밥을 달라고 합니다. 결국 엄마 뜻대로 짜장면을 시켜보지만 아이는 중국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넌 참 희한한 애다. 다른 애들은 짜장면 시켜달라고 난리인데, 엄마가 먹자고 해도 안 먹으니."
"그게 뭐~, 난 집밥이 제일 좋아!“
햄버거나 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의 식성은 조금 할머니 입맛입니다. 청국장이나 김칫국을 좋아하고, 시금치 무침이나 콩나물무침을 좋아합니다. 맨밥에 김만 줘도 밥을 잘 먹고, 간장 계란밥을 줘도 좋아합니다. 쌀국수에 고수를 넣어줘도 싫어하지 않는데 기름지고 단 맛이 나는 음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다 좋아하는 음식을 싫어하는 식성이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엄마가 해주는 반찬과 음식들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아이가 좋습니다.
#. 아빠의 소원
"내 소원은 딸이 성년이 되었을 때 둘이 팔짱을 끼고 호프집에 가 맥주 한잔하는 겁니다."
육아로 정신없던 시절, 누군가 내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답변이었습니다. 내 소원을 들은 지인들은 내게 욕심이 많다고 했다. 욕심이 많은 근거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 딸과 팔짱 끼고 맥주 한잔하려면 딸이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가 좋아야 하고,
둘째, 현재 내 나이를 고려해 환갑이 넘어서도 술을 마실 정도로 건강해야 하고,
셋째, 부녀가 외식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 한다.
그 나이가 되면 이 세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맥주 한잔하는 데 큰돈이 드는 일은 아닐 테니 경제적 여유는 그렇다 쳐도 건강한 신체와 화목한 가족관계를 바라는 것이 욕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딸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습니다. 딸은 아빠를 때로는 남자친구로, 때로는 든든한(?) 아빠로, 가끔은 엄마에게 혼나는, 챙겨줘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딸을 먼저 키워본 주변 사람들은 딸에게 너무 정 주지 말라고 훈수를 둡니다. 딸이 사춘기가 되면 아빠를 멀리한다고 말합니다. 딸은 이제 곧 사춘기를 맞이할 나이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상상이 안 되지만 ‘어떻게 변해도 이해해 줘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딸에게 부담 주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둬야겠습니다.
그래도 나의 소원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꿀 생각도 없습니다. 따님의 팔짱을 끼고 맥주 한잔하는 날이 온다면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오늘 술은 조금 줄여야겠습니다.
※ 이제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는 외모도 성격도 사춘기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빠를 귀찮게 하고, 아빠에게 안기는 것을 멈추지 않네요. 아직은 사이좋은 부녀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소원성취의 날까지 6년이 남았네요.
#. 어린이날 회상(2019년 5월)
“어린이날은 내가 주인공이야.”
학교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을 배우고 온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올해는 3일 연휴라 멀리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도 많은데 게으른 아빠는 여행 계획을 잡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날이 닥치고 나서야 아이가 평소 가보고 싶다던 용인 민속촌에 가자고 얘기했더니, 아이는 서울랜드를 가자고 합니다. 전날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왔기 때문에 먼 거리를 가는 것보다 조금 가까운 데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서울랜드에 도착했습니다. 재잘거리는 또래 아이들과 하늘로 솟구치는 분수를 보자 아이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니 아빠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습니다. 아이가 타고 싶어 하는 놀이기구를 타고, 대기 줄이 짧은 놀이기구는 두 번씩 탔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키가 작아 타지 못하는 놀이기구가 많았는데, 이제는 키가 커서 놀지 못하는 곳이 생겼습니다. 아이는 약간 실망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그만큼 컸다는 것에 만족해했습니다. 해가 지고 나서 마지막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아이가 아빠 볼에 연신 뽀뽀를 합니다. 고맙다는 표현이겠지요.
아이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잠든 아이를 보니 평소에 잘 놀아주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조금 짠해 보이네요.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노래처럼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발 냄새
아이와 외출하는 날입니다.
운동화를 신기로 한 아이는 양말은 갑갑해서 싫다며 신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엄마의 성화에 신어야만 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아이가 말을 건넵니다.
"아빠 운동화 신으면 양말도 꼭 신어야 해?"
"그럼, 양말 신어야지"
"왜 신어야 하는데?"
"양말을 안 신으면 발에 땀이 차서 미끄럽기도 하고, 발 냄새도 심해져"
"난 발 냄새 안 나~"
"흐흐흐 발 냄새가 안 나? 너 발 냄새 엄청 심하잖아?"
둘의 대화를 듣고 곁에 있던 아저씨가 슬쩍 웃었습니다. 차에 올라탄 따님 눈을 흘기며 한소리를 합니다.
"아빠는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발 냄새 얘기를 할 수 있어?"
"아…. 미안해, 다른 사람 있는지 몰랐어."
"응? 아니. 아빠가 딸한테 발 냄새가 난다고 말하냐고?"
"아…. 우리 딸이 발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지…. 카카카."
"흥.!! "
조수석에 앉은 따님은 삐친 표정으로 삐딱하게 앉아서 발가락을 운전석 가까이 올립니다. 시큼한 과일식초 냄새가 솔솔 풍겨옵니다. 신발 속에서 발효된 냄새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 발 좀 치워줘!!"
"싫어. 아빠 딸 발 냄새잖아!!"
아이는 장난을 치느라 발가락을 아빠 코앞까지 들이댑니다. 아이와 티격태격하며 외출합니다. 차 안에 꽉 찬 식초 냄새에 머리가 아파져 옵니다.
#. 행복의 조건
"아빠~ 무슨 생각 했어?"
화장실에 간 아이를 기다리며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가
아이의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습니다.
쓸모없는 생각을 하다가 아이에게 들킨 것 같아 살짝 당황했습니다.
"무슨 생각 했냐 하면 아빠가 어떻게 하면 우리 딸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조금 더 많이 웃으며 살 수 있을까? 생각했지.”
아이는 잠시 아빠의 얼굴을 빤히 바라봅니다.
"아빠는 내가 좋아?"
"당연히 좋지, 아빠 딸이기도 하고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
"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 딸이 아빠보다 더 행복하게, 더 즐겁게 살면 좋지"
"그럼 아빠는 그냥 내 곁에 오래 있어 주면 돼. 그게 내가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술 좀 줄여!."
아이의 행복을 얘기하다가 결국 아빠가 아이의 말에 감동했습니다. 아이에게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베풀지는 못합니다. 대신 아이 옆에서 친구처럼 놀아주고, 대해주기로 했습니다. 지금처럼 아이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 아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님께도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해 주는 딸과의 대화였습니다.
#. 꿈 1. 노르웨이 출장
노르웨이로 출장을 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회사생활 하며 동남아를 벗어나는 출장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마지막 출장은 10년 전 파키스탄 출장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유럽, 그것도 노르웨이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설렙니다.
출장 목적은 패션쇼 참관입니다.
패션쇼를 진행하는 디자이너와 촬영팀 직원들의 손길이 바쁩니다.
무대에 올릴 의상을 준비하고 기타 소품으로 가져갈 물건이 가득합니다.
직원들은 엄청난 캐리어를 들고 공항에 들어섭니다.
난 간편한 차림입니다. 직원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모처럼 해외 출장이라 기분은 들떠있습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하기 위해 출국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노르웨이행 비행기가 탑승구로 이동했습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본 일행이 탑승구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며 다시 이동해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잘못 타는 건 아닌지, 비행기가 떠난 건 아닌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는데 우리가 탈 비행기가 오지 않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 저 비행기는…. 안 되는데.”
옆 활주로에서 노르웨이행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습니다.
줄을 잘못 섰습니다.
나는 달려갔습니다. 노르웨이 비행기를 향해 정말 엄청난 속도로 달렸습니다.
다행히도 비행기는 대기 순번 승객들을 태우기 위해 활주로에 잠시 멈췄습니다.
숨이 턱이 차오를 때까지 달려서, 다른 승객들을 제치고,
승무원에게 표를 보여줬습니다.
승무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대기 승객들만 태울 수 있다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정식 비행기표는 이미 마감이 끝났다고 합니다.
나의 노르웨이행 출장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활주로에 주저앉았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습니다.
활주로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는데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속도를 높입니다.
‘쉑~~에엑 쉑~~’ 경쾌한 소리를 내며 창공으로 날아오릅니다.
아! 내 노르웨이 출장도 함께 날아갔습니다. 이런 절망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기분이 묘해집니다. 눈물을 쏟던 눈이 갑자기 떠졌습니다. 공항은 온데간데없고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옆에서 아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쉐~에~엑, 쉐~에~엑!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를 내며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습니다.
그렇지. 건설회사에 다니는 내가 왜 10년 전 다녔던 패션 회사의 패션쇼 출장을 가겠습니까? 왜 공항 출국장이 시외버스 터미널 모양이었을까요? 하나하나 따져보면 현실성이 하나도 없었던 노르웨이 출장이었습니다.
잠시나마 설렜던 노르웨이 출장이었습니다. 딸아이의 코를 고는 소리가 준 한밤중의 행복입니다.
#. 아빠의 외모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돼서도 아빠가 옆에 있어야 잠이 잘 온다고 합니다.
엄마와 잠을 자면 무서운 꿈을 꾼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아이에게 짧은 동화책을 읽어준 후 불을 끄고 아이를 향해 돌아누웠습니다.
"아빠?“
"아빠 여기 있어"
”아빠 얼굴이 안 보여, 불 좀 켜줘“
책상 등을 켜고 나니, 아이는 아빠 얼굴을 몇 초간 가만히 본 후 이제 됐다며 눈을 감습니다. 다시 불을 끄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빠 잘생겼지? 하하"
"휴~(아이의 한숨) 잘생긴 건 아니지"
"뭐야 아빠가 못생겼다는 거야?"
"못생긴 것은 아닌데. 그냥…."
"잘 생기긴 했지만, 따님의 이상형은 아닌 거구나!"
"그래도 아빠 같은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지."
아빠 손을 꼭 움켜쥐고 따님은 잠이 듭니다. 코골이가 심한 아빠 곁에서 잠을 청하는 따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이뻐 보입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의 성격도 까칠해집니다.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남자 사람인 아빠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까 걱정도 됩니다. 지금의 이 모습은 아빠 마음속에 영원히 저장해 놓겠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아빠보다 키도 (훨씬) 크고 멋진 짝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물고기를 키우며
"아빠 우기지 좀 마…. 내 말은 새끼를 한 마리라도 더 살려야 된다는 거야!"
마눌님의 허락을 받고 집에 작은 어항을 설치했습니다.
물고기들을 추천받아 풍선몰리 3마리, 플래티 한 쌍, 구피 2쌍을 넣었습니다.
구피 1쌍은 아이의 친구가 선물한 것입니다.
"아빠 구피 한 마리는 새끼를 가졌대!"
"진짜? 어떤 놈이 암컷인데?"
"여기 배가 불룩한 거~'
딸은 신나서 아빠에게 자랑했습니다.
아이는 매일 집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물고기 밥을 줍니다. 하루는 아이 대신 물고기 먹이를 줬다가 아이에게 혼난 적도 있습니다.
"아빠, 먹이는 내가 주기로 했잖아, 그리고 먹이는 시간 맞춰서 줘야 한단 말이야.~"
아빠가 원해서 어항 관리 다 하겠다고 산 어항을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흐뭇하게 어항 속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아이와 마눌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빠는 이제 물고기에게도 순위가 밀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속상해합니다.
며칠 전 어항 속 필터를 갈아주다가, 새끼 두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따님 친구가 준 구피가 새끼를 낳은 것 같습니다. 수초 사이를 숨어다니던 새끼를 다른 물고기들이 잡아먹으려고 열심히 쫓아다닙니다. 바라보는 사람은 불안불안합니다. 마눌님도, 따님도 새끼의 생존을 확인하느라 바쁩니다.
"아빠 새끼만 별도로 키우는 망이 필요해~"
"망이 있어도 죽을 놈들은 죽더라고, 새끼를 다 살릴 수는 없어. 새끼들이 잘 도망쳐서 살아남길 바라야지."
"그러면 어린 물고기들이 불쌍하잖아."
"불쌍해도 어쩔 수 없잖아. 구피는 새끼를 엄청 많이 났는데, 이 좁은 어항에서 다 키울 수는 없잖아!"
"아빠 내 말은 다 키운다는 게 아니고, 몇 마리라도 살려야 된다는 거야!!"
아이는 목소리를 높여 아빠에게 소리칩니다. 아이의 호통에 어항만 바라봤습니다.
새끼를 발견한 다음 날 밤 새끼들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새끼들이 숨을 만한 공간을 만들던지 분리통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따님과 어항을 살펴보며 어떻게 하면 새끼들이 숨을 장소를 만들까? 고민했습니다.
작은 물고기가 됐든 반려동물이 됐든 집에서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이가 돌 봐줘야 하고, 연민의 정을 줄 수 있는 작은 생명이 함께 있다는 건 좋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물고기들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초 4병
"나도 잘 모르겠어. 짜증 낼 일이 아닌데 괜히 짜증이 나!"
아침부터 아이는 눈물을 똑똑 흘립니다. 토요일 아침 문화센터 수업받으러 가기 위해 외출 채비하는 따님의 입술이 삐죽 나와 있습니다. 퉁명스러운 따님의 말투에 엄마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면서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냉랭해진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 아이의 배를 툭! 치며 장난을 걸었습니다.
"뭐야 아빠! 내 배를 왜 쳐!"
"이건 친 게 아니고 그냥 건드린 거지…."
"아프다고, 엄마! 아빠가 내 배 쳤어!"
"그래. 엄마도 봤어. 엄살 부리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머리 빗는데 움직이면 자꾸 헝클어지잖아!"
마눌님은 아이의 머리를 다듬어 주랴, 옷 입혀 주랴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아이가, 어색해진 집안 분위기를 느끼고 한마디 합니다.
"오늘 아침 분위기 이상하네. 다들 화만 내고…."
"짜증도 전염되는 거야, 하품이 전염되는 것처럼. 누구 한 명이 짜증을 내면 옆에 있는 사람도 짜증이 나는 거야. 짜증도 적당히 내고 끝내야 해. 네 주변 분위기는 네가 만들어 가는 거야…."
투덜대는 아이에게 잔소리했습니다.
"............"
바이올린을 챙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데 아이가 눈물을 흘립니다.
"아빠 미안해. 엄마 아빠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짜증 날 때가 있어."
"그래. 아빠도 그럴 때가 있어. 괜찮아…."
아이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습니다.
어느덧 아이도 사춘기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기쁘다가, 짜증이 나다가, 슬퍼지다가, 감정의 기복이 심한 날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사춘기가 빨리 온다고 합니다. 아빠 때는 중·고등학생 시절이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배웠는데. 요즘 아이들은 초 4병, 중2병. 하는 말이 유행인 거 보면 아이들의 키만큼이나 사고도 빠르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힘든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겁쟁이 아빠
엄마와 아이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늘 그렇듯이 아이의 공부입니다.
일요일 오후 아이는 아빠의 핸드폰만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마눌님은 불시에 아이의 숙제 검사를 했습니다. 엄마의 숙제 검사를 예상치 못했던 아이의 눈빛이 떨렸습니다. 전쟁의 서막이 열릴 것입니다.
"너 수학 문제 왜 하나도 안 풀었어? 어제까지 다 풀어놓으라고 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무슨 핑계를 대야지 하는 데 아이의 변명거리는 빈약합니다.
"해야 할 일도 안 해 놓고, 뭐 잘했다고 온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어!"
"아니, 아니,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려고 했는데 왜 안 했어? 핸드폰 보려고 안 한 거야? 놀려는 마음이 있으면 해야 할 일은 끝내놓고 놀아야 할 거 아냐?“
아이가 더 이상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세상 대다수 엄마가 그렇듯이 한번 시작된 잔소리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일절, 이절, 삼절, 반복해서 혼이 나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적당히 해, 한 번만 말해도 애들은 다 알아들어!"
"당신이 애 볼 거 아니면 가만히 있어. 어디 바람이나 쐬고 오던가!!"
아이 편을 들어주려다가 불똥이 되레 아빠에게 튀게 생겼습니다. 혼나는 아이를 뒤로하고, 슬그머니 대문을 나섰습니다.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로 아빠의 뒷모습을 쫓습니다. 졸보 아빠는 두어 시간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냉랭한 집안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하며 대문을 열었는데, 마눌님과 아이는 싸운 적 없다는 듯이, 혼난 적 없다는 듯이 화기애애합니다.
엄마가 만들어 준 간식을 먹으며 아이는 희희낙락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옷을 갈아입는데, 아이가 옷 방으로 들어와 한마디 합니다.
"아빠는 맨날 나 혼날 때만 운동하러 가더라! 흥!"
뭐 잠깐이지만 아빠가 편들어 줬던 기억은 없고, 자신이 혼나고 눈물 흘릴 때 꽁무니 빼던 아빠의 모습만 기억나나 봅니다. 아빠가 운동하러 간 것은 전략적 후퇴였다는 것을 아이가 알까요?
아빠가 겁쟁이가 됐든, 모녀가 화목해서 다행입니다.
딸!!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미리미리 하고 놀자!!!
#. 작은 키는 아빠의 유전자?
최근 아이는 반에서 키순서 번호 조정이 있었다고 자랑했습니다. 학년 초에 2번이었던 아이는 이제 5번이 됐습니다. 사진 속 아이는 손가락 V를 하며 밝게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학년 초에 2번을 배정받고는 바로 뒷번호 친구가 자기보다 작은데 자기가 앞번호라며 원망 아닌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는 여름방학 때 키가 조금 자랐습니다. 본인도 키 크는 게 느껴지는지 수시로 키를 재달라고 했습니다. 매일 키를 재지만 키는 아직 140cm를 넘지 못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아빠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조잘댑니다.
"아빠 나 140cm가 넘었어!!!"
"오 정말, 아빠랑 다시 키 한번 재볼까?"
기둥에 등을 댄 따님의 머리 위로 140cm 표시 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140cm를 넘어섰습니다. 아이의 키는 142cm입니다.
이제 워터파크나 놀이공원에 가서 키 때문에 못 타는 놀이기구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 부쩍 많이 먹더니 키도 많이 자랐습니다.
"아이가 한 170만 크면 좋겠다."
"풋, 당신 유전자가 어디 가냐?"
"우리 누나들은 키 작지 않아. 난 초등학교 때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
마눌님은 아이의 키가 작은 이유가 아빠의 유전자 탓이라며 비웃곤 합니다. 아빠는 초등학교 내내 키 순서로 앞에서 1번과 2번을 번갈아 맡았습니다. 키 큰 친구들을 부러워했지만 키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잠도 많이 자고, 밥도 잘 먹기 때문에 아빠보다 키가 클 거라고 믿습니다. 키는 유전이 아닌 환경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믿습니다.
딸. 169cm까지는 자라다오! 파이팅.
#. 아이의 과거사
소셜미디어에 올렸던 아이와 과거 이야기를 보면 아이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말을 했는지 신기합니다. 기발한 상상과 행동에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 뭔가 큰 인물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5살 딸내미와 고모의 대화
딸 : "아 목마르다"
고모 : "목말라? 목마르면 부엌에 가서 엄마한테 물 한잔 달라고 해~"
아이는 고모 얼굴을 빤히 보다가 방에 드러누우며 말합니다.
딸 : "엄마는 바빠요. 아 피곤해~"
고모 : "응…? 아!!"
고모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물 한잔을 조카에게 가져다줬습니다. 아이는 시원스레 물을 들이켭니다.
할아버지 생신날 온 가족이 시골집에 모였습니다. 며느리인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는 안방에 누워 친척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죠. 아이의 환심을 사고 싶은 고모는 결국 아이의 물 심부름을 했습니다.
5살 딸내미와 아빠의 대화
딸 : "아빠~ 멍멍! 해봐요."
아빠 : "? 멍! 멍!"
딸 : "강아지야 이리와~" 하며 아빠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아이는 아빠를 순식간에 강아지로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4살 딸내미와 엄마의 대화
마눌님이 아이 때문에 화가 난 상황에서 외출했습니다.
승용차 안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딸 : "우리 어디 가요?
엄마 : "너 다른 엄마한테 데려다주러 가는 거야~"
"딸 : "우와, 난 엄마 많~~네!"
엄마 : "헐~~…."
엄마에게 말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4살 딸내미와 아빠의 대화
아이를 재우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이가 다시 일어납니다.
딸 : "엄마한테 갔다 올 게~"
아빠 :"자다 말고 엄마한테는 왜 가는데?"
딸 : "울지마, 빨리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
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돌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아빠를 돌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4살 미모의 딸내미
자기 주변에 널브러진 장난감과 잡동사니를 치워달라며 짜증을 부립니다.
아빠 : "이거 “치워주세요” 해야지, 떼를 쓰면 되냐?"
딸 : "아빠 미워~"
아빠 : "아빠도 딸이 미~워~"
딸 : " 아냐. 나 얼마나 이쁜데~"
아빠 : "! 헐…."
4살 방귀는 누가 꼈을까?
딸아이와 마눌님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바로 아래층에서 유치원생 아이와 부부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뽕~~’하는 경쾌한 방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래층 아줌마가 자신의 아이를 보며 "너 방귀 뀌었어?" 물으니 아래층 아이는 당연히 "아니 안 꼈어~" 라고 말합니다.
아래층 부부의 시선이 마눌님에게 쏠렸습니다. 마눌님(당황하며) "딸, 너 방귀 뀌었어? 엘리베이터에서는 조심해야지~" 라고 말했지만 딸래미는 천진난만한 눈망울로 엄마 얼굴만 빤히 바라봤습니다.
엄마가 다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용하는 공간에서는 방귀 뀌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마눌님의 얼굴만 바라봅니다. 마눌님은 얘기하면 할수록 자기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낍니다. 본인이 방귀를 뀌고 아이에게 떠넘기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겨우 일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나섰습니다. 아래층 부부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딸내미가 "엄마 나 아까 방귀 뀌었어…."라고 실토합니다. 아직도 아래층 사람들은 마눌님이 방귀를 뀌고 딸에게 뒤집어씌웠다고 오해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흐흐흐
#. 아이의 방학 계획표 (4학년 겨울 방학)
따님이 방학 기간에 실천할 생활계획표를 만들었습니다.
아침(09:00 ~13:00)에는 샤워하기, 공부하기, 책 읽기, 밥 먹기 등입니다.
점심(13:00~ 17:00)은 밥 먹고 학원 다녀오기가 있고,
저녁은(17:00~21:00) 저녁 먹고, 샤워하고, 잘 준비입니다.
오전에 독서와 공부를 모두 몰아놓고, 나머지 시간은 노는 알찬 계획입니다.
주말은 더 알찬 계획을 짜 놓았습니다.
아침 9시에 일어나 10시까지는 샤워하고 아침 먹고,
10시부터 1시까지는 바이올린 수업하고, 어쩌면 놀기.
저녁 시간(13:00~12:00)은 저녁 먹고, 샤워하고, 잘 준비입니다
아이의 방학 계획표를 보면서 아빠의 어릴 적 계획표가 생각납니다.
둥근 시계 모양으로 24시간의 칸을 나눠놓고 1~2시간 간격으로 꼼꼼히 할 일을 적어놨습니다. 일기 쓰기, 공부하기, 운동하기, 밥 먹기…. 등등 공부가 일상인 계획표였습니다. 물론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애초에 지키지 못할 시간 계획을 짜 놓았기 때문이었죠.
아이의 생활계획표는 아빠의 어릴 적 계획표와 매우 다릅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잔뜩 적어 놓았고, 학원이 끝난 이후에는 무조건 노는 실천 가능한 계획표입니다.
계획표를 보면서 아이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아침에 책 읽고, 공부하고…. 이거 너무 무리하는 거 아인가?"
"책 한 권 읽고, 공부할 거야!"
"오후나 저녁에도 책 읽거나 공부하는 계획도 좀 넣지?"
"학원에서도 공부하거든?"
"아. 그렇지. 학원은 공부하러 가는 거지만…. 아무튼 계획표대로 할 수 있게 노력은 해"
"걱정하지 마세요."
방학 중 아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10시입니다. 아침 먹고, 샤워하고 나면 학원 갈 시간이지요. 오전에 책을 읽고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계획은 계획일뿐 무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 영어 발음
아이가 영어시험 공부합니다.
결혼 전 영국에서 어학연수 몇 개월 다녀왔다는 이유로 아이 영어 공부는 아빠가 봐주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단어 10개, 문장 3개를 외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exercise, drink, read. 등등. 아빠가 단어를 불러주면 아이가 받아씁니다.
"어얼리(early)"
"....? .다시 한번 읽어줘."
"어얼리, 일찍이란 뜻의 영어 단어야"
"에이 그건 ‘으얼리’라고 읽어야지"
"‘어얼리’지, 이걸 ‘으얼리’라고 읽어?"
"아빠가 옛날에 배워서 그래. 난 '으얼리'라고 배웠어"
"그래 발음은 아빠보다 딸이 배운 게 맞을 거야. 자 '으얼리'."
아이가 early를 노트에 적습니다.
아이는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원어민 발음을 곧잘 따라 합니다. 아빠는 영어를 문법부터 배웠지만 아이는 발음부터 배웠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방식이 옛날과 요즘 세대는 매우 다릅니다.
※ 6학년이 된 지금 아이의 영어 실력은 아빠를 넘어섰습니다. 아이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못 하는 아빠에게 ‘영국은 왜 갔다 왔냐며’ 놀리곤 합니다. 몇 개월 연수 생활로 영어를 잘하기는 힘들단다 아니야.
#. 유행 좀 아는 여자
"맨날 감기에 걸리냐? 건강관리 좀 잘하자!"
병원문을 나서며 아빠가 던진 잔소리에 아이는 눈을 흘기며 대꾸합니다.
"그러니까, 응? 아빠가 좋은 씨를 줬으면 내가 맨날 감기 걸리겠어?"
"씨? 씨가 나쁘면, 너처럼 예쁜 아이가 나왔겠어?"
"어? (아이는 살짝 당황하면서) 내가 뭐 예쁜가?"
"아주 아주 예쁘지."
건강하지 않은 걸 아빠 유전자 탓으로 돌리려던 아이는 더 이상 대꾸가 없습니다.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걸렸습니다. 아이에게 예쁜 유전자를 줘서 다행입니다.
아이는 유독 감기에 잘 걸리는 편입니다. 지난겨울에 유행했던 'A형 독감'에 이어 'B형 독감'까지 연달아 걸렸습니다. 병원 진료를 마친 아이에게 농담을 건넸습니다.
"우리 딸은 유행 좀 아는 여자야?"
"흥! 아픈 딸에게 할 소리야?"
"그니까. 건강관리 좀 잘하지 그랬어…. 흐흐흐"
"아빠가 돼서 딸 놀리기만 하고…."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빠의 농담이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아이 눈에는 금세 눈물방울이 맺혔습니다.
"농담이야. 아빠가 우리 딸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안아주고 달래서 겨우 눈물을 멈춰 세웠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 마음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아이가 아픈 원인이 꼭 아빠 탓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된 후에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이 최고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딸, 내년 경자년에는 감기 따위 멀리 보내버리자!!
※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유독 독감에 잘 걸리던 딸이 코로나19에 걸리는 것은 아닐지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2년 동안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자라주어서 고맙습니다.
#. 아이와 산타 4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빠들은 산타의 선물로 고민이 많아집니다. 지난 21일, 아이와 단둘이 주말 나들이했습니다. 아이가 몇 달 전에 사달라고 했던 '나무 조립 키트'를 파는 매장에도 들르고, 아빠가 좋아하는 프라모델 매장에도 가보고, 다른 장난감 가게를 둘러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받고 싶은 선물 있어?"
"나 닌텐도 갖고 싶어!"
"닌텐도? 그건 너무 비싸"(아빠의 눈이 아래로 쳐졌습니다)
"아빠가 왜 걱정해~ 난 산타한테 부탁할 거야"
"산타할아버지도 그렇게 비싼 선물은 안 줄걸?"
"산타할아버지는 착한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주잖아~"
"전 세계 어린이들이 따님처럼 비싼 선물만 원하면, 산타할아버지도 감당 못하지~"
"왜, 산타 할아버지는 선물을 직접 만들잖아~ 그런데 왜 돈이 들어?"
"요정들이 선물을 만들어도, 그 물건을 만들려면 부품도 사야 하고. 어쨌든 너무 비싼 건 안 들어 줘~!"
"하하하 나도 알아.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선물 아빠한테 말 안 할 거야."
"네가 원하는 선물을 산타한테 말해줘야지 산타가 선물을 준비하지~~"
"베게 밑에 편지 써놓던가. 아무튼 아빠한텐 말 안 할 거야!“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알아내기 위해 주제를 바꿔가며 얘기했습니다. 아이가 동물 캐릭터 잠옷을 갖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저녁 아이는 엄마와 온라인 쇼핑을 하며 상어 캐릭터 잠옷을 골랐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 산타는 택배 아저씨가 될 것입니다.
#. 아이의 용돈
오랜만에 시골 할머니 댁을 방문했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시골집을 나서려는데 아이가 용돈을 가지고 할머니와 실랑이하고 있습니다. 실랑이는 결국 아이가 용돈을 받아 쥐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서자 아이는 몰래 식탁 위에 받은 용돈을 꺼내 놓더니 화장실로 쏙 들어갔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왜 용돈을 꺼내 놓았냐고 따님에게 물었습니다.
”아까 할머니가 주신 용돈, 왜 식탁 위에 올려놨어?"
"아 할머니가 이미 용돈을 주셨는데 또 주시잖아."
"용돈 많이 받으면 좋지 않아?"
"이미 2만 원이나 받았어. 그런데 할머니가 집에서 또 주시는 거야. 용돈 주셨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또 주셔서, 식탁 위에 올려놓은 거야."
"우리 딸 착하네~“
할머니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셨습니다. 치매 초기라 한번 한 행동이나 말을 반복하십니다. 나이를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아이도 할머니가 건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주말에 아빠 옆에 붙어 있을 때 같은 내용으로 몇 번씩 통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 욕심 부리지 않고 할머니를 생각하는 따님 마음이 기특합니다.
"할머니 아까 용돈 주셨어요."
"내가 줬었나? 그냥 또 받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돈 많아요~"
할머님과 헤어질 시간이 오면 따님은 언제나 같은 말이 오갑니다. 아이 말대로 따님은 부자(?)입니다. 12월 용돈을 주는 날에 아이와 약속했던 용돈 5천 원과, 시험 100점 맞은 2과목 보너스 2천 원을 더해 7천 원을 주었습니다.
"이번 달에는 안 받을래."
"왜?"
"나 용돈 10만 원이나 남아있어."
"우와 아빠보다 부자네!~“
용돈을 꺼내던 지갑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받은 용돈을 자기 맘대로 쓸 만도 한데 아이는 돈을 잘 쓰지 않습니다. 먹고 싶은 길거리 군것질을 봐도 참고, 몇천 원 하는 뽑기 장난감 기계 앞에 서서 구경만 하고 꾹 참으며 차곡차곡 용돈을 모았습니다. 따님의 용돈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안전하게 재테크 할 수 있는 방법을 상의해 봐야겠습니다. ^^
우리 딸, 지금처럼 할머니한테 효도하면서, 커서 부자 되세요~~!!!
#. 추억이 되어가는 일상들.
아이가 잠자리에 누워 아빠 볼에 아주 찐~~하게 뽀뽀합니다. 아이는 아빠의 뽀뽀는 거부하지만, 본인이 내킬 때는 마음껏 뽀뽀합니다. 벌써 12살이 됐지만, 아직도 코골이가 심한 아빠와 같이 자는 걸 좋아합니다. 아빠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지요. 아이는 아빠가 책을 몇 페이지라도 읽어줘야 잠이 듭니다.
아이는 10살 때까지 아빠와 샤워했습니다. 엄마랑 샤워하면 장난도 못 치고 씻기만 해야 하지만 아빠랑 샤워하면 장난도 치고, 소꿉놀이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1살이 되면서부터는 혼자서 씻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샤워할 때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해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화장실 문이라도 열었다간 ‘변태 아빠’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덕분에 아빠는 일거리 하나가 줄어 조금 편해졌지만 가끔은 아이와 같이 샤워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샤워하던 에피소드입니다.
* 아이와 샤워 시간은 매일 새로운 역할 놀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빠는 미용실 원장 선생님이 되었고, 초등생 따님은 패션모델이었습니다. 샤워가 끝나고 역할 놀이도 끝날 때쯤 패션모델이 된 아이가 물었습니다.
“근데 남자예요? 여자예요?”
“네? 저요 남자예요~. 딱 보면 모르겠어요?”
“네, 전~혀 모르겠어요?”
“아니 왜요? 내가 여자처럼 예뻐 보여요?”
“아니요! (초등생 따님의 시선이 슬며시 아래로 향합니다) 그냥 안 보여서요~~~”
“헐 !!! 뭐라니…?”
아 놔! 이놈을 성추행범으로 신고해야 하나~~ 이러려고 이놈을 씻겼나 자괴감이 듭니다.*
아이와 샤워하던 시절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추억이 돼 버렸습니다. 따님과의 일상들이 하나둘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습니다. 어젯밤 책을 펼쳐 든 아빠 얼굴에 닿던 따님의 진한 입술 자국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따님과 나란히 누워 동화책을 읽어줄 날도 이제 몇 달, 길어야 몇 년뿐이겠지요. 이렇게 글이라도 남길 수 있어 다행입니다. 딸과 알콩달콩 보내는 일상이 있어 행복합니다.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