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 모드를 종료합니다
“ 저 개발 관두고 기획하려고요.”
즐겁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망년회 자리에서 나는 깜짝 선언을 했다. 말이 깜짝이지 폭탄선언이었다. 같이 술을 마시던 개발자 선배들은 술이 확 깬다면서 개발자를 관두지 말라며 나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계속되는 야근과 쌓인 연차에 비해 나오지 않는 퍼포먼스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아 지쳐있었다.
때마침 기획이라는 나의 삶에 빛과 소금으로만 버티면서 지내고 있었다. 개발보다 기획 공부가 더 재미가 있어서 새벽까지 공부하던 시절...
선배들이 나를 뜯어말리던 이유는 다양했는데,
“ 너 기획자랑 개발자 연봉차이가 얼마나 나는 줄 알아? “ (같은 연차라도 개발자가 훨씬 높음)
“ 개발자만 7년을 넘게 했는데 너무 아깝잖아. “
“ 나중에 다시 개발로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는 것, 정말 힘들다. “
수많은 말 (그중엔 비속어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 들이다. 선배들이 하는 말이 맞았다. 7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는 경력을 버리고, 신입으로 기획? 누가 봐도 뜯어말릴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기획자라는 직업이 정말 매력이 있었다는 것도 있지만, 개발자로 살면서 느꼈던 말 못 할 여러 스트레스 요인도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나의 스승이나 다름이 없던 분께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 자두야, 처음부터 같이 해보자. "
".. 죄송합니다. 이미 마음 굳혔어요. "
죄송하다는 말로 나의 생각을 확고하게 전달하였다.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개발자들 선배들에게 미안함이 컸지만, 내 인생이기에 하고 싶었던 기획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 나이가 딱 서른 살이었는데,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당시에도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었기에 기획 공부에 매진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여 여기저기 지원을 했다. 개발자 출신이기에 포트폴리오는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포트폴리오도 없이 지원하다니.. 미쳤구나 싶다.
여러 회사를 지원하면서 기획자 뽑는 건데 착각하고 지원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으면 어쩌지 했는데, 그런 연락을 몇 통 받았다. 추려서 15곳을 지원했고 놀랍게도 15곳 중 11곳이 모두 면접을 보고 싶다는 답변이 왔다.
2주간 면접을 하루에 많게는 3개까지 봤었다. 당시 코로나가 한창이었기에 화상으로 진행하는 면접 반, 직접 방문 면접이 반 이런 식이었다.
면접으로 녹초가 되어도 좋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만 있다면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본 회사의 면접은 줌으로 진행하였는데, 다른 회사와는 대표, 인사팀, 기획팀이 같이 들어와서 면접을 봤는데 이곳은 기획팀장 혼자 직접 면접을 진행했다. 면접을 보면서 느꼈다.
‘ 이 회사에서 오퍼 오면 무조건 간다. ‘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최종 합격 했다.
입사 후 기획자로 2년 차가 되었을 때, 팀장님과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는 시간이 있었다. 문득 면접 보던 기억이 떠올라 팀장님에게 나를 채용한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웃으면서 말씀해 주셨다.
" 원래 기획자들 대부분이 예민하고 좀 분위기가 많이 다운되어 있어. 물론 다 그렇지는 않아. 프로젝트 시작하면 다들 자기 일에 신경 쓰느라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지. 내가 널 뽑은 이유는, 내가 하는 모든 질문에 긍정적으로 유연하게 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개발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나의 성격은 밝은 편이다. 어려운 일에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비상시에는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써보는 그런 성격인데, 그게 면접 때 보였다는 것이다. 개발자 출신의 기획자가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앞에서 말한 나의 밝은 성격과 유연함이 인상 깊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나의 최대 장점이니 계속 가지고 가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3년이 훌쩍 넘은 지금. 그 마음 가짐은 여전히 있으며, 잃지 않기 위해 소중하게 간직하며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