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란 무엇일까?
고전은 현재까지도 살아남아 끊임없이 대화를 걸고 있지만 정작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학교 때 교육신서 세트를 (약간의 사기를 당하여) 사두고는 이사 갈 때마다 버릴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이 한 권만 남기고 다 버렸다. 명저다.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미국의 과학 교육과정 개혁을 위한 <우즈 호울> 회의의 종합 보고서 격인 이 책은 문고판으로 200쪽 남짓한 얇은 책이지만 들어있는 문장 하나하나는 곱씹어서 생각해 볼 만하다.
이 책은 위의 세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교육과정 전문가들의 탁상의 논의가 아닌 실제(實際)에서 결정되어 나온 것이라 우리에게는 더욱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교육의 과정을 일관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槪念)이 구조(構造)라는 것이고 교육의 과정은 곧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브루너의 교육과정은 구조중심, 학문중심 교육과정이라고 한다. 3차 교육과정(1974~1981) 이후 사실 현재까지도 흔적이 남아있는 학문중심교육과정은 각 교과만의 '구조'가 존재하며 그 구조에 따른 학습의 조직, 즉 나선형 교육과정으로 내용이 선택되고 학령이 올라가면서 확대되어 간다.
이것이 바로 교과의 구조다! 브루너는 구조를 학문의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원리>, <일반적 아이디어>, <기본개념>, <일반적 원리>등 여러 가지 말로 대용하고 있다. 즉, 학문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그 교과에서 다루어지는(다루어야 하는) 개념(槪念)의 트리(tree)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Erickson의 지식의 구조 맵이다. 사실 학문중심교육과정에서 차용된 이 맵은 지식(Knowledge)이 강조되는 교과에 구조를 위계적으로 또 직관적으로 잘 보여준다. 여기서의 개념은 교과에서 다루어지는 관련개념을 의미하며 가장 상위의 이론의 위에는 소위 요즘 이야기 하는 빅아이디어, 핵심개념(Key concept)이 자리할 수 있다. IB PYP Framework에서는 7개(형식, 연결, 원인, 변화, 관계, 책임, 관점)의 핵심개념을 정해두고 그것으로 범교과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소위 '개념적 렌즈'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교육의 과정' 발표 이후 제언(提言) 중 하나였던 '그렇다면 기능이나 표현위주의 교과는?'이라는 질문은 아래 Lanning이 '과정의 구조'라는 이론을 설파하였다.
네트형 게임의 예를 들면 풋워크, 스트로크, 스매싱 등의 기능을 익히고 단식과 복식에서 득점 전략을 세우며 게임의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앵글(Angle), 힘(Power) 등의 개념을 얻게 되고 일반화된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네트형 게임에서 득점을 위해서는 상대 코트의 빈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등이 될 것이다. 문학이나 음악 등의 교과에서도 가능한 '과정의 구조'는 지식을 다루는 교과와는 그 성질이 다른 구조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지식의 구조인가?
첫째로, 학습한 것을 앞으로 당면할 사태에 적응하게 해 주고, 둘째, 학습을 지적인 희열(喜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알 가치를 느끼게 하여 다른 학습의 사태에도 써먹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가련하리 만큼 짧은 기억수명(記憶壽命)을 연장시켜 준다는 것이다.
즉, 개구리 해부의 탐구 경험(여기서 듀이가 떠오른다.)은 다른 동물의 신체 구조에 대한 학습으로 연결될 수 있고, 대구의 중심지 입지에 대한 탐구는 다른 지역의 중심지 입지에 대한 탐구로 전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그 교과에 대한 이론이나 일반적 개념을 <구조를 통해서> 학습자들이 '발견'하게 끔 함으로써 이해와 기억의 깊이를 더하고 전이와 고등 지식으로 연결을 시킨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구조는 정적(靜的)인 것인가? 동적(動的)인 것인가?
정적인 구조라면 완결된 개념과 원리 그 자체일 것이나 그것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는 동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탐구의 과정을 통한 <사고과정>의 경험은 특수한 상황으로의 변용(變容)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보면, 브루너는 분명 동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즉 <학습하는 방법을 학습할>(learning how to learn) 수 있는 능력의 신장, 그것이 곧 지력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교육과정으로 조직한다면 바로 '나선형 교육과정'이 완성되는 것이다. (사회과에서 흔히 말하는 환경확대법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탄력적 환경확대법도 강조되고 있지만)
이렇게 보면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이 매칭이 된다. 실제 브루너와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피아제의 이론을 차용하고 근거로 하고 있다. 브루너의 교육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 바로 '핵심적 확신'을 강조하고 있는 다음 문장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강조하는 탐구학습에서 '가설'에 해당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하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지적활동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인지발달의 정도에 따른 세 가지 표현형식 (작동적, 영상적, 상징적)은 교육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외적요소가 된다. (이에 대한 고찰은 '인지(認知)의 과정)'에서 해보겠다.)
우즈 호울회의에서는 그간 학교에서 각 교과 분야의 학자들이 탐구의 결과로 얻은 결과와 결론(중간언어, Middle Language)을 단순히 전달받거나 교과서에서 읽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교육의 내재적 목적(교육의 행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목적)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고 신뢰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행위는 단순한 과학이나 공학적인 현상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듀이'에 대한 고찰에서 강조하였다. '교육의 수준(水準)은 교사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은 그냥 흘러나온 말이 절대 아니다. 교육은 교사의 사고, 언어, 행위가 곧 전범(典範)이다.
교사의 교과(교과의 구조)에 대한 이해, 탐구에 대한 경험은 학습자들에게 분명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유추가 가능한 의미 있는 가설설정 능력, 검증이 가능한 합리적인 추론과 해석, 그리고 근거와 정보의 제시 등은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지적, 도덕적 판단의 원천이 된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와 관계에 대한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듀이가 가고 브루너가 왔다.'라고 구조주의자들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브루너는 정확히 10년 뒤 이 학문중심교육과정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다. (the process of education reconsidered)
과연 교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교과'를 문명화된 삶의 형식으로 규정하고 교육을 '성인식'으로의 입문으로 규정한 피터스(R.S.Peters)의 이론과 대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