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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엽 Oct 24. 2023

지식의 구조와 교과

(교과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역시 브루너의 '교육의 과정'을 번역했던 이홍우 교수의 책이다. 교육의 과정은 '논리적 시(詩)'와 같아서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며 저자의 생각에 다가가는 즐거움이 있지만 또한 시적 상상력과 논리적 추리력을 동시에 동원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위 저서는 저자의 상세한 설명과 서술로 이루어져 있어 교과를 바라보고 다루어야 하는 교사에게는 보다 친절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교과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통찰이 없이는 교사는 '교과서'를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에 담긴 교과의 사실적 지식과 관련 개념을 통째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고 진도를 빼내야 한다는 의도(?)가 담긴 수업을 하게 된다. 이것이 브루너가 지적한 '중간언어' 즉 '지식의 덩어리'다. 물론 사실적 지식에 대한 기억과 전달의 중요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기억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은 동기와 흥미를 자극한다. 기억은 그 이전의 기억을 통과한다. 기억이 풍부해지면 전이성은 한층 더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사실적 지식의 전달은 엄청난 지식의 양에 따라 '주입식 교육'의 형태로 밖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주입식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주입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교과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과 성찰,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경험중심 교육과정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동일한 실체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에서 가치가 출현하듯 두 교육과정은 입장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 교육의 내용을 교과라고 보는 것은 '교과 쪽'에서 학생들이 경함 '할' 내용을 보는 것이며, 교육의 내용을 경험하고 보는 것 것은 '경험 쪽에서' 학생들이 경험'하는'내용을 보는 것이다. 



아동중심, 학생중심, 학습자중심이라는 말은 교육현장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강조되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또는 나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동안 ‘아동중심, 학생중심’이라는 말의 의미를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학습자의 활동이 많다고 해서, 발언권을 높인다고 해서 학습자 주도성이 강조되는 수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들의 이익, 즉 관심과 유용성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교사가 21세기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주입식 교육의 방법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교사들이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루 5~6시간의 수업을 그렇게 교과가 아닌 교과서의 내용을 전달하는 식의 수업은 효율적(교사의 체력과 학생들의 집중의 측면에서 보아도)이지도 않고 사실 실현 가능성도 떨어진다. 학습자들이 자유롭게 서칭을 하고 토의토론하면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만들고... 이상적인 학습자 중심의 수업 모습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이 바로 교과다운 수업인가? 하는 것이다. 

브루너의 핵심적 확신과 대담한 가설에 의하면 각 교과는 그 교과만의 지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범위와 조직. 즉, 수준을 달리하는 나선형 교육과정을 통해 지도하는 것이 바로 ‘학문중심 교육과정’이다. 



이 책에서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지만 사회과(역사과)의 교과다운 수업으로 본 주제를 다룬다면 ‘봉건제도’라는 중세사회의 생활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봉건제도의 속성으로 포함되는 다양한 사실들(계약, 주종관계, 장원제도)을 하나하나 실제 사례와 조사를 통해서 알아보고 동양의 봉건제도와도 비교하며 알게 한 후 봉건제도가 아닌 다른 계급제 사회모습(군현제, 군국제)과 비교해 본다. 왜 봉건제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에 대한 문제인식으로 출발하여 사회문화, 정치, 경제, 지리 영역의 구체적 가설(나라의 크기, 인구, 교통과 통신의 미발달, 농경주의 사회, 종교 등)을 수립해 보고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가설을 검증해 보는 것도 교과다운 발견학습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의 조사와 발표 위주의 과학수업에서는 효율적이고 학생 참여도가 높으나, ‘수업의 운영자’로서의 교사의 역할이 아닌 ‘교과의 지도자’의 모습에 대해 고민거리를 던지고 있다. 헤겔은 철학적 사고를 ‘상식과의 투쟁’ 또는 ‘일상생활의 안정감을 상실하는 과정’으로 규정하였다. 학생들의 개념에 확장을 일으키거나 오개념을 건드릴 수 있는 ‘부정적 수업(‘무엇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 무엇이 아니다’를 가르치는 수업)’의 선례를 소크라테스의 회상을 이끌어내는 대화법에서 찾고 있다. 계기교육을 겸한 도덕과 수업(공개수업의 형식)도 마찬가지다. ‘국기를 게양하는 방법’에 대한 수업의 주제에 대해 그 사실적인 방법들을 지도하는 것은 학교가 아닌 곳에서도 얼마든지 학생들의 실습으로 할 수 있다는 지적과 그것이 과연 교과다운 수업? 학생들에게 이익이 있는 수업? 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교과의 스민 아이디어 즉 ‘구조’를 대입해 본다면 ‘국기를 취급하는 데에 어째서 이런 규칙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상위에 둔다면 수업의 방법이나 형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국기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의식’과 ‘권력’, ‘외교’와 ‘상징’등의 보다 큰 개념의 렌즈로 보다 세부적인 우리 인간들의 행위나 사건, 현상 등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과와 맥락을 함께 하는, 학생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험이 바로 듀이가 말한 ‘경험’이다. 



‘듀이가 가고 브루너가 왔다’는 말은 두 사람의 교육사상이 그만큼 최근(최근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 벌써 100~50년 전의 사상이니까) 교육 이론에 있어서 시사점을 남겼다. 수업의 실천이라는 것이 단순한 이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오히려 실천은 이론보다 더 어려운 현실의 문제다. 하지만 칸트의 말을 빌어 ‘이론 없는 실천은 공허하고, 실천 없는 이론은 맹목적이다.’ 결국 이 두 가지는 교과와 경험과 같이 함께 가야 할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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