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르치는가?)
교육과정(敎育課程, curriculum)은 통상 교육의 목적(목표)을 정립하고 교육 내용(경험)을 선정(scope), 조직(sequence)하여 교수와 학습의 형태와 평가를 담아내는 것을 말한다. '교육과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 교육과정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성찰해 보는 경험은 많지 않다. 내용적 지식은 탐구의 폭을 확장시키고, 이는 곧 안목(眼目)을 키울 수 있다. 즉, 교육과정을 다룰 수 있는(재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해오던 일들, 특히 지식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다다랐으나 결국 입시의 체제 속에서 결과지향적이고, 단순 암기식의 경쟁 위주의 교육으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통해 공교육은 점차 '붕괴되었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사교육은 '활성화되었다'라는 그 반대의 표현으로 치닫게 되었다.
지식교육에 어떤 결함이 있었고 어떤 잘못이 있었을까?
'한국의' 교육과정은 교육과정을 주관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외국에서 유행하는 교육과정을, 단지 그것이 자신의 피상적인 견해와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또는 오로지 그것이 외국에서 유행한다는 이유에서, 맹목적으로 떠들썩하게 받아들이는 형편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수없이 변모해 온 교육과정의 변천사를 통해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교육의 철학은 분명 급속도의 변화를 이루고 있는 현대사회와 함께 달라져왔다. 그에 따른 교육과정의 형태와 총론, 특징도 물론 시대마다 순간순간 개정되어 왔고 지금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 즉 교과는 큰 변화가 있었나?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주지교과라 하는 국수사과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과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교육과정탐구에서는 여러 가지 학습에 대한 모형을 크게 두 가지, 목표모형과 내용모형으로 나누고 있다. 목표모형은 타일러(Tyler, 1902-1994)에 의해 주창된 교육과정의 고전모형으로 '종합적 교육과정이론'이라고도 불린다. 목표모형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바로 '학생 행동의 변화'다. 그 학생 행동이라는 것은 1. 어떤 결과를 나타내어야 하며, 2. 달성 정도가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 목표와 평가 사이의 관련은 블룸(Bloom, 1913-1999)의 교육목표 분류학에 의해 더 확고해졌다. 이는 메이거(Mager, 1923-2020)의 행동적 목표 진술에서 더욱더 구체적으로 그 성격이 드러난다. 즉, 수업의 목표는 안다, 이해한다, 감상한다 등의 의미적재된 용어가 아닌 '쓴다, 지적한다, 열거한다, 비교한다'등의 잘못 해석될 여지가 없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용어'로 진술되어야 하며, 그것이 평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순환과정)
목표모형은 객관적이고, 교사가 수업을 실천할 때 교육의 특성상 구체적이지 않고 애매성을 가진 '난점(難點)'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점이 분명히 있다. 특히, 과학적이고 검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학생과 학부모 등 교육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납득이 갈 수 있는 모형이다. 하지만 단순히 2차 방정식과 같은 문제를 풀 줄 안다고 해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년도(年度)를 안다고 해서 그 교과의 가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타일러나 블룸, 메이거 등 목표모형 학자들은 문제를 '풀 줄 알면' 그 (교과의) 가치가 학생에게 실현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본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러한가? 더 극단적으로 몰아붙여 '빙고게임'을 할 수 있고, '숨은 그림 찾기'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교사는 그 교과를 가르쳤고, 학생들은 이해했다고 볼 수 있는가?
목표모형과 대비되는 내용모형은 대표적으로 브루너(Bruner, 1915-2016)의 '지식의 구조'와 발견한습(탐구학습)을 대표한다. 여기서 구조는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구조를 안다는 것'은 그 교과에 '스며 있는 아이디어'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내용모형의 가장 큰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의 구조에 관해서는 이미 브루너의 교육의 과정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용모형에서는 교육과정에 담긴 그 교과를 특징짓는 '사고방식' 즉 '안목'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다른 문제사태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지적인 희열을 느끼고 교과의 내재적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고유의 '학문'을 '익힌다'라는 의미에서 '학문중심 교육과정'이라고도 불린다. (이해, 기억, 전이)
목표모형과 내용모형을 바라보는 저자의 가치는 분명 중립적이지 않다. 목표모형에서 중요시하는 목표는 최종적으로 평가될 내용이므로, 그것은 학문의 사고방식 또는 탐구과정과 관련을 맺지 않는 '교육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고, 목표모형이 나타내고 있는 교육관은 '교육'을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교육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 철학과 가치는 변해왔고 그에 따라 그 철학이라는 기본 그릇에 담겨 있는 내용 즉 '교과'도 역시 달라져왔다. 하지만 교과 그 자체로만 생각해 본다면 교과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우리는 다시금 상기해보아야 한다. 교과의 가치를 가르쳤다, 이해했다는 것을 학생 행동(능력, 태도, 흥미 등)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 인가?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이 복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해당 교과의 기본 아이디어(개념)는 결코 단편적이지 않다. 하물며 우리 인간행동의 가장 고유하고 문화적인 활동인 교육을 어찌 측정가능한 결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학습목표로서의 교육의 내용은 단편적인 '부분'으로서만 가치를 가지며, 교과의 가치는 분명 그러한 '부분'들의 총화 이상의 것이고 그 '가치를 안다'는 것이 바로 '학문을 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통용될 것이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노예 소년에게 기하학적 지식을 '발견(또는 회상)'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브루너의 탐구학습에 대한 아이디어와 상통한다. 노예 소년이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힘입어 탐구하고 마침내 발견한 것이 바로 '지식'이며 이렇게 보면 탐구와 발견 등 외부적 특징(방법)은 지식을 '이해'하도록 하는 수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탐구의 성격이 강한 과학이나 사회과에서는 '수업 모형'으로 공식화되어 있고, 이 공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나머지 수업 안에서 억지로 그 전철을 밟으려 하는 경우를 무수히 보아왔다. 분명한 것은 탐구학습은 공식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사고방식)의 이해다. 브루너가 말한 중간언어(middle language, 1971)의 전달이나 이해는 주입식 교육의 전형이다. 학습경험이 적은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인식을 하고 가설을 수립하고 검증하는 경험에는 교사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학습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의 변화, 곧 행동의 변화는 교육의 분명한 목적이다. 즉, 목표모형이 말하고 있는 '행동의 결과'가 아닌 '행동의 변화'로 구분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를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교사라면 아마 이 말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관'이란 교육의 목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왜 가르치는가?'라는 문제의 설정은 분명한 과정에 영향을 끼친다. 객관식 문제의 정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학생 '행동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수단으로써의 교육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조각상을 더 사실적으로 '데생'하고, 더 높은 옥타브의 고음을 부르기 위해서는 몸의 '기능'을 더 이끌어 내기 위한 교육을 해야 한다. 과연 그것이 '교과의 가치'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한 교육의 결과만으로 학생들은 어떤 '안목(眼目)'이나 '관점(觀點)'을 가지게 될까? (물론 표현이나 도구교과의 반복과 연습, 훈련을 비하하거나 가치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인지(認知)의 과정에서 더 살펴보겠다.)
'행동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 교사는 그 부분을 아무래도 더 강조하게 될 것이고, 비유하여 표현하면 결국 학문이라는 큰 숲에서 나무만을 보게 되는 우(愚)를 범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교육을 하고 있다. 왜? 그것이 시험에 나오니까?
교육의 중요성은 그것이 실제적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지성'을 개발한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우리는 '실습'만을 할 수 없고, 특성화 학교만이 존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상은 실용성을 갖춘 인간을 원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바람직한 관점과 인간에 대한 덕이라는 태도를 갖춘 인간이다.
즉, 정인보(1893-1950) 선생의 말을 빌면 '얼'을 갖춘 인간이다.
자, 이제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대한 어느 정도 답이 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