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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Nov 28. 2020

2020년 47-48번째 주

올해 11월도 이렇게 잘 흘러갔다


희망하는 사람들, 공부하는 사람들


빌게이츠가 라시다 존스와 함께 새로운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나는 즐겨 듣고 있다. 첫 화 질문은 코비드19 이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였고, 두번째는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 요즘 들어 깨달은 건, 인류에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공부하고 있거나 반대로 공부해가며 인류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내 휴양지에서의 2주를 앗아간 바이러스, 시끄럽고 정신없는 바에서의 맥주 한 잔을 못 마시게 하는 바이러스, 마우스 누디티가 노 매너가 되게 만든 바이러스, 그 바이러스에 무방비하게 당하기보다 희망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 공부하고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발견할 때 큰 위안이 된다. <팩트풀니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 객관적 사실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정보들이 어떻게 잘라내어 전달하는가에서부터 더 이상 객관적이지 않으며,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소위 "사실"들이 우리를 더욱 비관적이게 만든다는 "사실".  

나도 어쩌면 희망적이고 싶어서 그 아귀에 맞는 정보들만 찾아다니며 내 버블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게 선택의 영역이라면 나는 비관보다는 낙관하기를 선택할 거다. 

 

https://podcasts.apple.com/us/podcast/bill-gates-and-rashida-jones-ask-big-questions/id1538630420



1년 2개월만의 한국행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올해는 한국에 가지 말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않게 10일 휴가와 오버타임이 제법 되고 어차피 재택근무를 하고 있으며 해외 근무를 오래 한 매니저 덕에 자가격리 기간에 재택을 하는 걸 계산해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껴서 한국에 1개월 정도 머물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어쩌다 겸사겸사 한국 업무를 서포트하게 되었고, 그게 출장으로 연결되어 한국에 2개월 동안 머물 기회가 생겼다. 정확히는 독일식으로 "수습기간"이고 해외 출장이 극도로 제한적인 상태에서 이런 기회가 생겨 여러모로 감사하다. 하지만 떠나온 지 5년이 넘은 곳에서 근 1개월 출근하며 사람들과 일할 생각을 하니 벌써 불편함이 밀려오는 건 기우일까. 실은 벌써 선을 넘은 질문을 아주 짧은 미팅에서 여러 개 연달아 받고는 이미 불쾌해진 상태.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정체성에서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좀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being nice vs. a push-over


아시안 여성으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특정 상황에 대해 중간 지점을 선택할 권리를 가져볼 수 없다. 무슨 이야기냐면, bad ass 거나 push-over거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간은 없다. 회사가 처음이기도 하고 배우는 게 많을 것 같아 서포트가 필요한 동료들이 접근해오면 웬만하면 도와주는 편이다. 그리고 우리 팀과 갈등이 있는 다른 팀과 일할 때도 뭐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도록 중간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자청하는 편. 물론 무리다 싶거나 무례하다 싶은 상황은 정확하게 선을 긋는다. 하지만 회사에서 "유명한 쌈닭"이 되지 않는 한, 아시안 여성이 듣게 되는 평은 "넌 너무 나이스해"다. 10개의 칼 같은 상황을 목도하고도 한 번의 소프트 스팟을 보이면 이 말을 하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넌 너무 나이스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만다. 지금까지 3개의 회사를 유럽에서 다녀보며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사실 이런 저런 걸 검색해 보면서 이 차이를 생각해봤는데, 누군가가 나의 선의를 악용하고 있다면 그건 푸쉬 오버라는 답이 참 명쾌했다. 내 업무를 가져가서는 자기가 한 것처럼 팔았던 동료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들었을 때의 황당함이 맥락을 찾게 되었다. 그냥 내가 경험을 쌓은 것으로 충분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건 좋은 방식이 아니었다. 일을 쳐내고 내가 높은 가치를 두는 일에,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 받는 일에 더 집중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여성들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중간을 선택할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남자보다 더 남자같이 일하거나 일찌감치 그 경쟁에서 발을 빼고선 안전한 영역에 머무는 것, 이 두 선택지밖에 없었다. 지금은 좀 다르기를 기대하고, 이번 출장이 그걸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으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누군가가 묻어가고 싶어할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한테 뭍어갈 기회를 허락하는 건, best use of my time이 아니라는 사실도 항상 생각해야 할 듯.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한 친구가 나한테 해줬던 피드백이 기억난다. 나는 너무 내 안의 공정성에 갇혀 사는 것 같다고. 이렇게 훅을 맞고도 난 내 손을 더럽히지 않겠어 하고 선비처럼 걸어나오는 일은 이제 그만 하고 싶고 슬슬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 굳이 고르자면 bad ass로 가야겠다고. 

마침 이 고민을 하는 순간에 다시 한국에 가서 여행객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으로 이것저것 경험하면서 나름대로의 스몰 데이터를 모아올 생각을 하니 불편한 마음이 제법 사라진다 - 이것도 또다른 방식의 정신승리인가. 





이른 크리스마스 파티


거의 한 달만에 오피스에 갔고, 지금 팀에는 나름 코로나 리츄얼이 생겼다. 이렇게 모두가 모일 때 breakfast meeting을 하는 것. 다들 무언가를 싸와서 같이 아침 먹으면서 업무 상황 공유를 하고, 이때마다 샴페인이 빠지지 않는다. 전 회사는 알콜이 아주 엄격하게 금지된 회사였어서 이런 분위기가 전혀 없었는데, 이번 회사 그리고 이번 팀은 다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참 내 스타일. 이렇게 아침 8시 반부터 샴페인을 따고 치즈와 빵과 스프레드와 샐러드와 과일까지 너무 즐겁게 즐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 빅보스가 미팅룸으로 들어와서는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또 한 병을 까고. 어쩌다 밝힌 내 위스키 사랑으로 빅보스 방에 있던 위스키까지 나오면서 브런치가 런치가 될 시간까지 조금 이른, 아담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다. 그리고서는 다들 이미 합의라도 된 듯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난 샴페인이랑 치즈 사온거 말고는 준비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돌아갈 때 선물 좀 챙겨가야 할 듯. 

이 팀의 훈훈함은 참 귀여운데, 전에 특별히 약속하지 않은 오피스 데이가 있었는데 팀원 중 두 명이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의 프레첼을 인원 수 만큼 동시에 사온 것 (이 프레첼은 너무 맛있어서 주말 아침마다 생각나는 맛). 암튼 훈훈한 팀이 있어 마음이 따뜻하고, 크리스마스 마켓은 날아갔지만 크리스마스의 정신까진 뺏어갈 수 없다며 다들 열심히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이 귀여울 따름. 


어렸을 땐 내가 내향적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커서 보니 나는 엄청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빨리 이 시기가 지나가서, 까페에 앉아 책도 읽고 이런 포스팅도 하다가 옆 테이블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수다도 떨고, 바에 가서 열심히 잔 부딪치며 신나게 마시고 놀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 지금은 회사 사람들하고 지금 사는 건물 이웃들, 독일어 학원 사람들이 내 주변인의 전부지만, 춥고 어둡고 비오는 11월도 이렇게 끝이 나듯이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 믿으며 희망을 가져보기로. 





이 "격주정리"가 재밌는 점은, 내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생각들 중 어떤 게 고인 생각이고 어떤 게 흐르는 생각인지 잘 보여준다는 점. 내가 좋아하는 주제들이 그저 같은 생각을 되풀이해 그저 고여있는 걸 확인하고 나니, 어떻게 빠져나올지 혹은 어떻게 흘려보낼지를 알 것도 같은 느낌. 시작하길 참 잘했고, 내가 내 독자가 되는 건 불편하지만 즐거운 일인 걸 알게 되어 기쁘다. 


(아참, 제목 위 배경 사진은 야생 멧돼지 보호구역에서 찍은 사진. 나무 뿌리나 떨어진 넛들을 성실하게 찾아 먹는 돼지들이 생각보다 엄청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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