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이야기들
요즘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참 힘들다. 단순히 개그맨처럼 웃긴 것 말고 (이것도 만만치 않게 힘들지만 기대도 안하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재밌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다. 최근 3년간 만난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에 스파크가 있었던 적이 정말 드물다. 관심어린 질문들이나 지속되는 연락이 그런 관계를 유지하게끔 할 때도 있지만 재미없는 대화를 하고 나면 들어간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재미있는 사람들을 그래도 어렵지 않게 만났던 것 같은데, 이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많이 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변수는 예전과는 다르게 내가 버블 밖에 있다는 점. 한국에서 살 때는 버블인지도 모르고 버블 속에서 살았었는데 지금은 undefined 외국인1으로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 한 예로는 소비행태가 굉장히 다른 사람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실 기회가 생길 때다. 엄청 고매한 취향이나 스탠다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격민감도가 높은 사람도 아닌데, 그 적당한 퀄리티와 상대가 편안해 할 버짓 간의 애매한 경계에 맞추어 시간을 보낼 장소를 정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그냥 상대에게 장소를 일임하고 나면 아주 랜덤...한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경우가 제법 있다. 물론 이건 재미없는 대화에 비하면 아주 견딜 만하다. 비슷해야 재밌다는 게 아니다. 달라도 분명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찾기가 힘드네.
가끔 너무 재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리워지는 내 버블 안 친구들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이것도 그저 생각에 그치고 마는 게 예전에 나랑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 하나와는 더 이상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냥 내가 변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늙어가며 인내심은 줄어들고 아집만 더 커지나 싶은 생각도 들고. 누군가에겐 내가 하는 이야기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 재미없는 말들에 불과할지도. 나도 어느 시점에는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재미없더라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노력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더 잘 즐겨볼 것인가. 아직은 낙관적으로 전자의 방향을 택하고 있지만 얼마나 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예전 독일어 선생님하고 수업시간에 영화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추천했던 영화다. 다른 영화 코드가 맞아서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둘이 신나 이야기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때 확신했다, 이 영화를 봐야겠군 하고. 그러다 시간이 되어 봤는데 역시나 좋은 영화였다. 베를린과 물과 신화, 그리고 떠나기도 하고 찾아오기도 하는 사랑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 스포일러 없이 이야기할 방법을 못 찾겠어서 그냥 이렇게 추천만 던지고 갑니다. 독일어를 좀더 잘하게 되면 독일 영화들에도 관심을 가져보고 싶다. 사운드트랙도 그렇고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에 충실한 게 맘에 들었다. 이 감독의 다른 영화도 보고 싶어졌다.
모카포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재택도 길어질 예정이고 이렇다 할 수집 취미도 없는 내 거의 유일한 데일리 루틴인 커피 마시기에 좀더 투자하는 게 뭐가 나쁜가"라는 지리한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기로 결정했다. 이틀 전에 머신이 도착했고, 올해 내린 결정 중 손에 꼽게 맘에 드는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출근길에 사마시던 폴바셋 라떼를 참 좋아했는데 그때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원두는 새 동네에 있는 4개의 로스터리를 가서 빈을 사서 커피를 내려마셔도 보고 주문해서 마셔보기도 했는데, 처음에 고른 집이 아무래도 제일 나았고 이 집을 나의 커피빈 담당으로 정했다. 이 집은 빈을 우유 유리병에 넣어 팔아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을 옵션을 제공하는 점 때문에 더욱 맘에 들었다.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아침에만 마시지만 그래도 이 우유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나 병으로 판매되고 지금 사는 지역에서 나오는 오가닉 우유다. 우유는 절대 저지방으로 마시지 않는다는 나만의 철학 때문에 3.8% 지방이 함유된 우유를 마시고 있다. 대부분의 날에는 오틀리의 바리스타 오트밀크로 대신한다.
대단히 까다로운 입맛은 아니어도 이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아닌 건 확실히 가릴 줄 알게 되었다. 대부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티를 그닥 안 좋아하는데 나는 티도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물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네. 나는 그냥 마시는 모든 것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인가보다. 좀더 에스프레소를 잘 내리고 싶어서 유튜브를 찾아봤고 굉장히 좋은 팁을 알게 되어 기쁘다. 오늘도 이렇게 나에게 잘해줄 수 있어 좋고 아직 맛있는 커피 한 잔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안심이 된다.
한국인 친구들과 가족들 다수가 기혼자에 슬슬 자녀가 생기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타지에서 혼자 살림을 차리고 살아가는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보태고 싶어한다. 재밌는 점은 그런 말들에 패턴이 있다는 거다. 먼저 "부러움"의 감정이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건데 삶의 어떤 순간을 같이 공유했다는 것 때문에 그 친구들은 내 삶이 어쩌면 그들이 살 수도 있었던 삶이라고 생각하며 감상에 빠지는 듯 하다. 나도 내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저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생각에서 부럽다거나 뒤쳐졌다는 느낌을 챙겨오진 않는다. 하지만 그 부러움의 감정이 가끔은 무겁게 느껴지는 건, 나는 이미 그들이 모르는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이 생각하는 부러움은 그저 그들의 상상 속에서 나온 것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다른 건 기혼자들은 본인들이 싱글의 삶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는 점이다. 하지만 기혼자들은 지금 시점의 싱글의 삶에 대해 알 수 없다. 과거의 싱글이었던 시기를 놓고 비교할 수 있겠지만 모든 변수가 철저히 통제되지 않은 비교이지 않은가. 여기서 거슬리는 부분은 기혼자들은 미혼자들을 자신의 미혼 시절에 멈춰있는, 결국은 결혼을 해 그 길을 밟을 사람으로 본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는 덜 자란 사람이거나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겠지만) 삶의 낮은 단계에 멈춰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래서 부러움과 동시에 결혼과 육아의 의미에 대해 설교를 하는 이 모순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이 무례함을 매일매일 견디지 않아도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지적해주고 싶지만 나도 여자고 그냥도 힘든 나라에서 육아에 직업을 병행하는 사람들이니 말없이 웃고만 만다. 그리고 어차피 내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을테니 말이다. 예전에는 이런 집단적인 경향성이 있을 때 그냥 "아 정말 싫어"하고 피해버렸었는데, 한국의 인종차별 문제도 그렇고 이런 구조적이고 오랜 기간 학습되어 온 문제들에는 좀더 확실한 개선방안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뭐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고 적어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요즘은 회사도 여러 번 출근했었고 덕분에 팟캐스트도 자주 듣고 집에 오면 책 읽을 짬도 내면서 부지런하게 인풋도 넣어가면서 지내고 있다. 활동하면서 에너지를 오히려 더 얻어오니 시간이 더 알차게 보낼 힘이 생긴다. 실은 더 잘 정리된 글을 쓰고 싶고 한 스텝 정도는 더 깊이 들어간 이야기를 채워보고 싶었는데 여전히 얕고 별로다. 최근 따로 알게 된 남자 하나, 여자 하나로부터 우연찮게 동네 아마추어 축구팀에서 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추어 축구팀이어도 매년 경기에도 참가하고 매주 연습도 하는 걸 보면 다들 제법 진지하다. 나는 이런 아마추어들이 참 대단해보인다. 프로의 퀄리티를 알면서도 좋아서 꾸준히 해나가는 것. 내가 무언가에 아마추어의 진심을 담게 된다면 그건 쓰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고, 제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전에 미리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