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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Jul 25. 2021

2021년 28-29번째 주

미나리

아직 여름이 한창이지만 마치 가을처럼 추수할 게 많았던 2주였다. 드디어 부엌이 들어왔고, 큰 가구들은 구매를 다 마쳤고, 지난 9월에 조인하고 나서부터 계속 일해왔던 크고 작은 프로덕트들이 드디어 릴리즈되면서 "짜잔!"하며 바쁘면서도 설레고 뿌듯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 돌아온 독일에서 1년이 다 되어가고 이렇게 제법 실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아참, 나는 나에게 관대한 편이다. 



미나리 미나리 분더바 분더바  


해외에 살면서 한국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극장으로 향한다. 코로나 규제가 완화되면서 테스트 없이 가서 볼 수 있게 되어 이번 주에 <미나리>를 보러 동네에 있는 독립영화극장으로 갔다. 예전에 살던 세 도시도 그렇고, 이런 작은 영화관들은 주로 카페나 바랑 붙어있어서 팝콘 대신 와인을 챙겨 들어가 영화를 보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시작된 나의 고난. 당연히 자막일 줄 알았던 영화가 많은 부분 더빙 처리가 되어있었다. 영화 자체가 영어와 한국어가 섞여있는데, 그 기준에 따라 더빙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역할에 따라 더빙된 것도 아니었고 아주 난장판이었다. 예를 들면, 윤여정 배우의 순자 역할은 대부분이 자막으로 처리되었는데, 순자가 짧은 영어로 데이빗과 소통하는 장면에서는 쌩뚱맞은 성우의 목소리로 사투리 섞인 한국어를 하다가 몇몇 영어 단어를 독일어로 더빙해버렸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언어와 상관없이 배우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건 뭐 뒤죽박죽이었다. 미나리로 노래를 만들어 흥얼거리는 장면에서는 "미나리 미나리 분더바 분더바"하는 바람에,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고 뭐 잘 안 가리는 하이브리드 노마드 같은 내 처지의 처연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달까. 알아듣는 건 그래도 제법 많이 알아들을 수 있어서 고됐던 독일어 수업의 효과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영화가 참 좋아서 더빙이 망쳐놓은 것에 너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미나리>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맞아, 인생 원래 저렇게 피곤한 거였지'였다. 아메리칸 드림은 너무 거창한 것 같고, 그저 좀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좌표를 옮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보기만 해도 너무 고되다. 외롭고 막막하고 되돌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저 살아내야 한다. 작은 행복의 순간들과 큰 시련의 순간들이 맞물려 나타나고 그리고선 뒤돌아보며 후회하고 교훈을 얻을 새도 없이 다음 날은 오고야 만다. 순자는 힘들어하는 딸에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다. "얘, 이것도 재밌다 야!" 가능하면 앞으로도 가볍고 명랑하게 살고 싶고, 시련의 다음 날 아침에 꼭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먹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착의 느낌


중장기 계획이 없는 해외거주자들은 언제나 임시로 살고(live) 또 산다(buy). 수많은 한국의 자취생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결혼이 모두가 거쳐야 할 관문인 듯 결혼 전까지는 좋은 가구나 물품들을 사지 않는다. "언젠가 정착하게 되는 순간"을 위해서. 그런데 그러면 정착이 목표가 아닌 나는 언제나 임시로 살아야 하나 싶은 의문이 작년 말부터 들어, 언제 어떻게 되든 내가 머무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정을 붙이기 위해 이것 저것을 사기 시작했다. 뭐 대단한 구매를 하는 건 아니고, 그것보다는 조금 덜한 "에이, 나중에"가 없는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실패도 많이 했고 뒤늦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산 게 제법 많아져서 쓸데없는 건 중고거래 플랫폼을 통해 팔거나 무료로 나누기도 했다. 아무래도 1인 가구치고는 제법 큰 규모여서 다음 이사를 하게 된다면 릴로케이션 서비스를 받아 도시를 이동하는 경우일 것 같다. 가볍게 살고 싶었던 나는 이렇게 살짝 무거워졌다.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늘려가고 이웃들과 짧지만 간단한 대화들도 나누기 시작했고 집 근처에 좋아하는 공간들을 하나 둘씩 찾아가고 있다. 아직도 자주 틀리지만 지도 앱 없이 달리기도 하고 약속장소로 향하기도 한다. 다다음주에 친구가 놀러오기로 했고 그러고 나면 이 집과 이 도시가 더 우리집, 우리 동네 같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마음은 언제나 힙을 향해 있는데 어쩌다 보니 항상 힙과 거리가 먼 회사에서 일해왔다. 그런 회사에서 쿨한 사람 역을 맡는 게 나의 직업적 운명이라면 운명이랄까. 그러다 보니 이런 회사들에 적응해가는 패턴이 있다.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부서 간의 업무 분장이 명확한 기업들에는 언제나 크로스펑셔널 업무들이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제대로 본인의 강점과 전문분야를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뿌려놓은 씨앗이 어느 순간 열매를 맺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아, 그 분야는 egal이지!"하는 피드백을 제3자로부터 듣게 될 때. 지난 회사에서 막 열매를 제대로 맺고 박스에 담아 판매를 시작할 즈음에 이직을 했다. 아깝긴 했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그 또한 좋은 투자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회사에서도 슬슬 열매가 맺히고 있다. 지금 회사는 전 회사보다 규모가 더 큰 조직이라 이 내부에서만 잘 옮겨다녀도 열심히 쌓은 노력을 손해없이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에도 부담없이 투자해주는 회사라 올해 말까지 잡힌 교육과 컨퍼런스 기회가 벌써 5개. 일은 이렇게 평온하게 하고 재미는 밖에서 찾는다면 방랑벽이 도지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정말 또 떠나고 싶다면 파견 자리를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도 이제 더 이상 손해보는 결정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된 해결책들. 이것도 정착의 느낌이다. 





실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았는데 아껴두기로 했다. 아직 미나리의 감상에서 못 헤어나왔고, 다른 이야기들은 정리가 덜 되었다. 테니스 레슨이 끝났고 다음 단계는 9월에 다시 시작할 예정. 어제 레슨에서 연습 경기를 했는데 드디어 백핸드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고, 힘이 좋고 왼손잡이인 나는 이제 백핸드와 함께 더 나은 초보자가 되었다. 몸의 노화에 대해 배워가고 있고 노화를 막을 순 없지만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노화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얼마 전에 격주정리 글들을 다시 읽어봤는데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중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흥미로웠다. 다시 한번, 나는 나에게 관대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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