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에 대한 이야기
부모님 집을 떠나 독립이라는 걸 한 지가 어언 6년째다. 늦은 나이에 독립을 해외에서 시작해 혼자 이런 저런 일들을 해내오면서 마냥 꽃길만 걷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 시련이 넘쳐나지도 않았다. 다른 해외거주하는 분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난 참 운 좋고 평탄하게 살아왔구나 하고 느낀다. 그러던 나의 구김살 없는 해외독립생활에 이사한 집이 시련을 주기 시작하니, 건강하고 밝기만 한 줄 알았던 멘탈에 금이 가는 걸 지난 번 격주정리 때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상황은 변함없이 난장판이지만 덕분에 따뜻한 여러 마음을 만나게 되었다. 집이 너무 엉망이어서 잠도 잘 못 자고 입맛도 없어 매일 버터밀크와 바나나만 먹으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상황을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말했더니 당장 세 명이나 돌아와서는 머물 곳을 알아봐주었다. 마침 내가 원래 살던 바로 옆집 친구가 자기 집이 비었다며 편하게 와서 쓰라고 해주어 다시 나의 작은 동네로 돌아와 2주 정도 지내게 되었다. 돌아온 건물에서는 마주치는 옛 이웃마다 네가 왜 여기 있냐며, 다시 돌아왔냐며 재밌다는 얼굴로 내 난장 플랫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정말 Everybody knows my name :) 다. 이 귀여운 건물에서 첫 시작을 할 수 있었어서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또 다시 했다. 그러다가 새 집 진행상황을 점검하고자 어제 저녁에 들러봤는데 (물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그렇게 엉망이 아니어보이는 것이었다. 아마 내 유리멘탈이 그 사이 회복되어서 그랬나보다.
운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은 2주였다. 백인 남자가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쥐고 나오는 운, 부유한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을 보장받고 살아가는 운, 좋은 안목을 자연스레 습득해가는 운, 나쁘고 더러운 건 안 보고 살 수 있는 운, 안 내키는 거엔 아니라고 노!라고 선택할 수 있는 운, 착한 사람들이 주변에 다가오는 운. 운이 모든 걸 결정하니 아무리 노력해도 의미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운을 가지고 태어나든지 살며 얻어가든지 운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운이 마치 능력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잊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살던 나는 지금보다 신경질적이었고 예민했었다. 좋든 나쁘든 외부 자극이 많은 환경에서 생활했었고 그 모든 맥락이 너무 선명하게 읽혔었다. 지금은 듣기 싫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스르르르 흘러가게 귀를 닫아버릴 수도 있으니 자극의 양 자체가 확실히 줄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했고 덕분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공분도 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도 자발적으로 시도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게 다 내 능력 덕일까. 결국 운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대단하고 뻔쩍뻔쩍하게 사는 것도 아닌데 운을 이야기하는 것도 좀 주제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다가 그렇게 운까지도 비교하기 시작하는 나에게서 능력주의 사고방식을 다시 한번 발견하고 말았다.
지난 6년 동안 예민했던 감각들을 둔하게 만들려고 나도 모르게 참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뭘 또 그렇게까지, 설마 아니겠지, 시간 아깝게 남의 생각까지 괜히 넘겨짚지 말자 하며 단순하게 살아왔던 것 같은데, 이번 이사를 기점으로 도대체 뭐가 바꼈는지 - 좀더 큰 도시로 이사가면서 서울사람 마인드가 다시 살아났는지 소셜라이징을 다시 시작해서 그런지 - 예민하고 거슬리는 게 늘어나고 있고 나도 다시 가드를 올리고 날을 세우게 된다. 재밌게 책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작가의 male gaze에 대해 짚고 넘어가게 되고, 백인들의 한국 콘텐츠 소비 방식이 마냥 곱게만 보이지는 않아 비판적인 의견을 보태곤 한다. 커플 베이스의 문화니 자주 파트너들을 소개받고 같이 어울리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대화라기보단 취조에 가까운 개인적 질문을 받기도 한다. trajectory가 특이하다 보니 궁금할 수 있겠다 싶다가도 내 안에도 없는 답을 혹은 내가 경험하며 어렵게 얻어낸 결론을 초면에 정제되지 않은 질문으로 쉽게 얻어내려고 할 때면 가시 돋힌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과정이 재미있는 건 지난 6년 간에도 저 모습의 나를 꺼내줬던 몇몇 친구 혹은 지인들이 있었는데 그때 뿐이었다는 점. "현실세계로 온 걸 환영해!"의 메시지가 저 멀리서 보이는 것 같은 건, 아마도 요즘 지진부진하게 계속 하고 있는 중장기 플랜 고민의 연장선에서 지금 이곳이 '맘에 안 들면 떠나면 되는 곳'보다는 무겁게 느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시 운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즘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읽고 있다. 이 책의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History has failed us , but no matter. 운도 이거다. 운은 우리를 자주 들었다 놨다 하지만 결국 no matter다. 굉장히 악하지도 그렇다고 억지로 노력해서 선하려고 한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환경에 이리저리 무기력하게 휘둘리고 한번의 태풍이 불고 가면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삶을 이어나가는 것의 반복. 등장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며 읽는 게 많이 고통스럽지만 스토리는 쭉쭉 흥미롭게 읽히는 게 특징인 책. 운이라는 게 어차피 내 권한이 아니라면 힘들 때일수록 "but no matter"가 가진 힘에 기대어보는 것이 방법이 아닐까. 그리고 모든 것이 잘 풀릴 때 쉬이 우쭐해하지 않고 받은 복을 세어보는 것도 함께.
나의 해맑음이 드디어 명을 다한 게 아닌가 싶고, 두렵기보단 올 게 왔구나 하며 묘하게 기대가 된다.